소설리스트

79화 (79/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1화

그날 저녁, 엄마는 동생을 품에 안은 채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아빠의 무릎에 앉아 있었고, 증조할머니가 아빠의 옆에 자리하셨다.

“자, 한아야. 우리 한아한테 소개해 줄게. 한아 남동생, 민한율이야.”

민한율……. 동생의 이름을 들으면 뭔가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우리 한아, 동생 한번 안아 볼래?”

“웅! 아나볼래요!”

세 살 아이가 갓난아이를 안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동생을 안겨 주기 위해 서로의 팔을 겹치며 조심스럽게 마주 앉았다.

감동을 자아내는 순간이었다.

엄마가 고소하고 달콤한 젖 냄새를 풍기는 아기를 내 가슴팍까지 들이밀었고, 아빠는 내 팔을 받치며 아기를 품에 안은 것과 같은 자세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우아!”

“와, 우리 한율이가 누나라고 하나 보다! 한아도 한율이한테 인사해 줘야지!”

어머니, 이 녀석은 그냥 옹알이를 한 것 같사온데.

“안넝. 한뉴이!”

나는 비루한 발음으로 동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녀석 똑똑하기는. 동생 이름을 바로 알아듣네.”

증조할머니가 나를 기특하다며 칭찬해 주셨다.

“우아아!”

“응, 우리 한율이도 누나가 반갑대요!”

이제 태어난 지 보름이 갓 지난 한율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아, 이런. 진짜 천둥벌거숭이가 태어난 건가?

너는 왜 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아이와 같은 곰 인형을 선물 받은 거냐?

한율의 새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묻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한율은 금세 할머니의 품에 안겼고,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사탕을 빼앗긴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앙!”

“우리 한아 왜 울어?”

“한뉴이! 한뉴이이!”

나는 저 녀석과 아직 해야 할 말이 있단 말입니다! 확인할 게 남아 있다고요!

긴말은 하지 못하고 떼를 부리며, 몸을 뒤틀었다.

“응. 우리 한아가 동생을 계속 안고 싶구나. 한율이가 조금만 더 크면, 누나인 한아가 잘 놀아 주자!”

아빠가 나를 품에 꼭 안고는 상냥하게 다독여 주었다.

나는 입술 끝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훌쩍거렸다.

아, 우리 아빠 너무 좋아.

아빠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겨우 울음을 삼켰을 때였다.

“그리고 한아야. 오늘부터 아빠랑 잘까?”

이게 무슨 소리예요? 여태 아빠랑 같이 잤잖아. 새삼스럽게 왜 이러세요?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2층에 올라가면 신기한 방이 있어.”

아빠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요정이 사는 숲 같은 방이 있더라. 그 방에는 노란색 동굴이 있는데, 거기서 자면 꿈속에서 요정을 만날 수 있대.”

아빠는 나를 안은 채로 신비로운 이야기를 이어가며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님방이었던 2층 침실 벽에는 숲을 연상케 하는 뮤럴 벽지가 발라져 있었고, 침실 한쪽에는 노란색 벙커 침대가 자리했다.

이전 생에서 내가 너무 갖고 싶어 했던 침대였다.

“와! 동구이다!”

나는 신생아인 동생의 수면 패턴과 나의 수면 패턴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침실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렇게 서러울 때가! 엄마 내놔! 내가 엄마 옆에서 잘 거야!

그런데 그토록 갖고 싶었던 벙커 침대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이전 생에서 드라마에서 아역 배우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오늘부터 여기서 아빠랑 요정 꿈꾸면서 잘까?”

그러니까 이 말은 아빠도 부부 침실에서 쫓겨났다는 뜻이다.

가여운 우리 아빠.

아직도 엄마만 보면 눈동자를 활활 불태우는 사람인데.

“죠아! 너어무 죠아!”

불쌍한 아빠가 나를 재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동생에게 빼앗긴 우리가 서로 위로하면서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덜미를 토닥여 주었다.

우리 음란 마귀들이 애들 때문에 떨어져서 고생이 많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인생 2회차인 나는 성숙한 태도로 동생과의 분리 수면을 받아들였다.

***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동생과의 첫 조우에서 녀석은 아무런 낌새도 내비치지 않았다.

나보다 고단수인 녀석이 태어난 건가?

그동안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존재에 관한 적극적인 고찰의 첫 단추는 내 남동생의 정체 확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생과의 독대가 필요했다. 엄마와 아빠는 나와 동생이 오붓하게 눈을 맞출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가 뭐 동생을 잡아먹기라도 하나?

거실에 앉아서 나무 블록을 가지고 놀던 나는 어떻게 하면 동생의 눈을 들여다보고 옹알이를 곁들인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한아야. 동생 자니까, 쉿 해야 해요.”

동생을 재우고 나온 엄마는 나를 품에 안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나와 두 살 터울로 동생을 낳은 엄마는 요즘 몹시 피곤해 보였다.

“담은 양, 이제 좀 쉬도록 해요. 한아는 내가 볼게요.”

엄마가 안쓰러웠던지 외할머니는 구 실장을 우리 집으로 파견했다.

기저귀 가는 솜씨가 몹시도 훌륭한 구 실장의 찍찍이 손맛을 이제 동생이 누릴 차례였다.

“아니에요. 제가 한아랑 놀아 줄래요.”

엄마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는 동화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아, 나 또 자존심 상하려고 그러네.

글자라고는 몇 개 박혀 있지 않은 책이었다.

MSG 담뿍 담긴 학교 앞 떡볶이 맛도 잊고, 유아식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저 책은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다.

“한아야, 이게 뭘까? 사자! 이건 뭘까? 나비! 어머! 사자와 나비가 친구가 되었네.”

하하, 재미있다.

나는 엄마의 노력에 반응해 주기 위해 박수를 두어 번 쳤다.

“흐으암.”

그런데 하품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우리 한아 졸려요?”

“웅. 한아 코 자.”

나는 손등을 겹쳐서 머리를 박는 시늉을 했다.

“담은 양, 한아 재우면서 같이 좀 자요. 그러다 몸 상해.”

구 실장의 성화에 엄마는 나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동생이 집으로 온 후, 나는 부모님의 침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었다.

아빠도, 나도 참으로 외로운 밤을 보내는 중이었다.

“한아야. 동생 자니까, 쉿 하고 코 자자.”

“웅. 코 자자”

나는 목소리를 낮춘 엄마를 흉내 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엄마의 품에 안겨서 눈을 꼭 감았다.

엄마의 가슴팍에서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모유 냄새가 났다.

아, 이런 걸 고향의 냄새라고 하는 건가!

이전 생에서 나는 뿌리를 잃은 삶을 살았었다.

나의 고향은 어떤 모습인지,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세세하게 들여다볼 기회도, 여유도 없었다.

“우리 한아 코 자자. 자장자장.”

“웅, 한아 코 자자.”

나는 자장가를 불러 주는 엄마의 말투를 또 따라 했다. 엄마가 웃으며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춰 주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보육원 선생님을 따라 말을 배우던 나는 우아하고 예쁜 엄마의 말투를 따라 했고,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잠이 안 와도 억지로 눈을 감았었던 나는 이제 엄마의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누나, 잠이 안 와.’

또다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나는 부모님 사랑 담뿍 받으면서 잘 살고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너도 이번에는 좋은 삶을 살면 좋겠어.

혹시 네가 내 동생으로 태어났니?

나는 자꾸만 머릿속을 휘젓는 그 아이가 내 동생으로 태어난 거면 좋겠다고 바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우우웅.”

어디선가 낯선 옹알이가 들려왔다.

놀라서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뭐야? 왜 옹알이 소리가 들려? 어떤 새끼야? 이 구역에서 젖비린내 풍기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한데?

아, 맞다. 나 동생 있지.

고개를 슬며시 돌리자, 엄마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상냥한 누나인 내가 동생을 돌봐 주겠어요!

나는 엄마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엄마는 패밀리 침대 한가운데 누워 있었는데, 엄마의 오른쪽에는 내가 그리고 엄마의 왼쪽에는 동생이 누워 있는 형국이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엄마의 배를 타고 넘으려다가 멈칫했다.

이러면 엄마를 깨운다고, 멍청아!

나는 엄마의 몸을 빙 둘러서 살금살금 기기 시작했다.

어휴, 우리 엄마 다리가 길기도 하지.

동생이 누워 있는 쪽에 다다랐을 때, 나는 숨이 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죽을 맛이었다.

인생 참 쓰다. 동생하고 독대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동생은 머리 위에 달린 모빌을 올려다보느라 바빴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동생의 뺨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엄마 젖을 먹고 몹시도 포동포동해진 동생의 볼이 쑥 들어갔다.

네가 이렇게 돼지가 됐으니까, 우리 엄마가 힘들지!

동생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나는 동생의 정체부터 확인해 보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엎드려서 동생의 머리 옆에 양팔을 짚은 뒤, 덮치듯 고개를 내밀었다.

모빌을 향해 있던 한율의 눈이 나에게로 옮겨붙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새까맣고 맑은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냐, 너?

텔레파시를 보내기 위해 눈에 힘을 빡 준, 순간 몸이 갸우뚱 기울었다.

이번 작전에서 간과한 게 있다면, 세 살 아이의 신체 구조였다.

나는 몸에 비해 머리가 커도 너무 컸고, 동생을 들여다보다가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우아아아앙!”

놀란 동생이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가 벌떡 일어나서 동생을 덮친 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쳤다.

아이씨,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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