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0화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가까운 하객석에 앉아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희고 동그란 얼굴, 기다란 눈매와 우물처럼 깊은 눈동자를 나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슈트를 차려입은 것과 달리 아이의 품에는 낡은 곰 인형이 안겨 있었다.

애착 인형인가?

‘누나! 나쁜 형아가 내 인형 빼앗아 갔어!’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감정 컨트롤이 어려워진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구, 우리 공주 고단한가 보다.”

아빠가 얼른 나를 안고는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러운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이제 돌잡이를 막 끝낸 아이의 가슴에 피멍울이라도 든 것처럼 한 맺힌 설움이 복받쳤다.

뭔데? 쟤 누구야? 곰 인형은 또 뭐고!

답답해서 발버둥을 치자, 아빠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한아 배고픈가 보다.”

사회자가 돌잡이와 관련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사이, 우리 가족은 대기실로 향했다.

엄마는 고운 한복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치고는 젖을 물렸다.

엄마의 심장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기 시작하자, 불안감이 차츰 가라앉았다.

“모유는 언제까지 먹일 거야?”

아빠는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왠지 엄마의 가슴을 빼앗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멋있는 우리 아빠가 너무도 밉다!

나는 단풍잎 같은 손으로 엄마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켰다.

“조금만 더 이따가.”

엄마의 부드러운 대답이 위안이 되었다.

역시 나랑 엄마는 진짜 잘 맞아!

말 못하는 돌쟁이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엄마가 너무 좋다.

“우리 한아는 좋겠다. 엄마가 한아를 이렇게 예뻐해서.”

아빠가 질투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아빠! 딸내미 질투는 하지 맙시다!

“당신 질투해요?”

엄마가 말끝을 귀엽게 늘리며 물었다.

“질투는 무슨. 내가 내 딸을 왜 질투해.”

아빠는 자상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하지만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녹진녹진했다.

아, 진짜! 돼지가 되든 말든, 먹다 자야지! 아빠가 저런 눈으로 엄마를 보는 건, 정말이지 못 견디겠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으음.”

아빠가 엄마의 입술을 묻어 뜯는 건지, 앓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어요! 자꾸 제 식사 시간에 이러실 겁니까?

분에 겨운 항의도 하지 못하고,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이상하다.

젖 맛이 변했다.

고소하고 달콤한 모유 맛이 이상하게 밍밍했다.

뭐야, 엄마!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제 슬슬 젖을 끊기 위해서, 젖 맛이 변하는 음식이라도 따로 챙겨  먹는 걸까?

나는 며칠 전부터 엄마의 일상을 눈여겨보았다.

“너무 졸려. 한아가 이제 통잠 자는데도, 너무 졸려.”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온다는 말을 해 댔다.

“한아야. 엄마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하지? 한아 잘 때 엄마도 같이 자야겠다.”

엄마는 내가 생후 6개월이 되던 시점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내가 낮잠 자는 시간에 업무를 보고, 화상 회의도 진행했다.

내 엄마지만, 진짜 멋져!

근데 요즘 엄마는 내가 낮잠에 빠지는 시간에 함께 잠이 들었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는 걱정스러운 손길로 엄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응, 한아야……. 자자.”

결국, 엄마는 나보다 더 빨리 눈을 감았다.

아빠에게 엄마의 건강 이상을 알리고 싶었지만, 아직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비루했다.

그날 저녁 퇴근한 아빠가 나를 안아 들었을 때, 나는 온 힘을 기울여서 내 의견을 피력했다.

“암마! 아야!”

우리 예쁜 엄마가 어디 아픈 것 같다고, 아빠!

“응? 뭐라고?”

“암마! 암마! 아야!”

아빠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당신 어디 아파?”

퇴근한 아빠를 반기던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 아니? 왜 아프냐고 물어봐?”

“한아가 엄마 아야 하다잖아.”

“아니야, 나 안 아픈데?”

엄마가 아빠에게서 나를 빼앗아서는 거실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엄마가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 물었다.

“한아야. 엄마가 아픈 것 같아?”

나는 울먹이며 엄마의 품을 파고들었다.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해졌다.

엄마의 품에서 두 개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망연자실, 나에게 동생이 생기려나 보다.

며칠 후, 엄마와 아빠는 나를 앉혀 두고는 우물쭈물했다.

“한아야, 엄마, 아빠가 한아한테 할 말이 있어.”

두 분은 육아서에서 본 대로 나를 앉혀 두고 동생의 존재를 정중히 알리려는 듯했다.

엄마는 보드라운 손으로 나의 이마를 쓸어넘기며 미안한 듯 웃었다.

아……. 어머니. 제가 먼저 알았거든요? 그냥 확 말씀하시죠?

나는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렸다.

“우리 한아한테 동생이 생길 것 같아.”

머뭇거리는 엄마를 대신해서, 아빠가 입을 열었다.

“웅.”

나는 쿨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마주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 한아 동생 생기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생물학적으로 나와 유전 형질이 비슷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뜻을 말하는 겁니까?

법적으로 부모님의 자녀가 한 명 더 생긴다는 뜻을 말하는 겁니까?

너무 싱거운 질문이어서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고 말았다.

“헤헤.”

엄마가 아빠를 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한아가 뭐 그런 걸 묻냐잖아. 우리 한아는 똑똑해서 동생이 뭔지 당연히 알지.”

보육원에서 내 밑으로만 몇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아이들의 언니였고, 누나였다.

동생 하나 돌보는 일쯤이야.

“그래서 말인데, 한아야.”

엄마가 이제 본격적인 안건을 꺼낼 것처럼 비장하게 굴었다.

동생이 생기는 것 말고 비장할 일이 또 있나?

“우리 한아 이제 엄마 쮸쮸는 그만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병원에서 동생의 안전을 위해 그만 먹여야 한대요.”

그런 게 어딨어?

의사 나오라고 해!

내가 뭐, 모유 먹으면서 엄마 배를 발로 차기라도 하겠어?

와, 이거 되게 억울하네!

나는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하고 엄마를 응시했다.

“우리 한아, 엄마가 갑자기 쮸쥬를 못 주게 되어서 미안해요. 작별할 시간도 주지 않구…….”

엄마의 예쁜 얼굴이 무너져 내리는가 싶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아니, 어머니! 그렇게 우시면, 제가 떼를 쓸 수 없잖아요.

새삼 숙연해졌다.

손을 뻗어 엄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엄마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왈칵 눈물이 고였다.

나를 버리고 찾지 않았던 부모를 그리워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엄마는 내게 젖을 물리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울고 있다.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또 한 번 감격스러웠다.

“암마. 암마!”

나는 울지 말라는 듯이 엄마에게 양손을 뻗었다.

엄마는 나를 품에 꼭 안고는 통통한 볼에 매끄러운 뺨을 비볐다.

“웅, 우리 딸. 기특한 우리 딸. 벌써 엄마 이해하고 떼도 안 부리는 거야? 엄마한테는 어리광부려도 돼. 엄마한테 우리 한아는 제일 소중한 맏딸이야.”

맏딸이라는 말에 새삼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렇다. 나는 이 집안의 장녀이자, 증조할머니가 심으신 오동나무의 주인이었다!

의젓한 맏이가 되어야겠다며, 엄마의 품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로부터 만 8개월 후, 내 동생이 태어났다.

증조할머니는 오동나무 옆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으셨다.

그리고 이모는 갓난아기인 동생에게 매료되어서는 좋아 죽으려고 했다.

“아우, 얘는 진짜 형부 판박이다! 애가 어쩜 이렇게 콧대가 우뚝하냐!”

이모, 나 서운하다. 내가 첫 조칸데? 첫정은 무서운 거라고 하더니, 다 거짓말인가 보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이모는 한아가 더 좋아! 우리 여자들끼리 요거트 하나 먹을까?”

나는 요즘 요거트와 치즈 맛에 푹 빠져 있었다.

이모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요거트를 가져와서는 내 앞에 앉았다.

이모가 요거트 껍질을 까는가 싶더니, 거기 묻은 요거트를 혀로 할짝거렸다.

와! 신기해! 재벌도 요거트 껍질에 묻은 걸 핥아먹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이모를 바라보았다.

“어? 미안. 이거 먹지 말라고? 껍질에 묻은 건데, 좀 봐주라!”

이모는 귀엽게 읊조리고는 부드러운 실리콘 숟가락으로 요거트를 떠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를 머금었다.

“우움!”

“우리 한아, 그렇게 맛있쪄요?”

“마이따!”

나는 이제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제법 다양해졌다.

“아구 우리 한아 말도 잘하네!”

요거트를 먹는 사이, 엄마가 동생을 재우고는 거실로 나왔다.

“이건 뭐야? 뭘 이렇게 들고 왔어?”

이모가 가져온 종이봉투를 살피는 엄마의 얼굴은 고단해 보이는데도 예뻤다.

“응, 그거 한아 동생 선물. 내가 한아 애착 인형으로 토끼 인형 사 줬었잖아. 그건 곰 인형이야.”

엄마가 종이봉투에서 꺼낸 곰 인형은 내가 돌잔치에서 봤던 남자아이가 안고 있던 인형과 같은 것이었다.

‘누나, 내 인형 찾아 줘!’

설마! 나를 혼란하게 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내 동생으로 태어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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