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9화

“와우.”

도리도리와 짝짜꿍을 익힌 나는 있는 힘껏 손뼉을 쳐 주었다.

“와, 우리 한아가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거야?”

예비 이모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는 웃었다.

“이거 캐리비안의 해적 OST, 맞지?”

이모가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응, 맞아.”

예비 이모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연주를 이어 나갔다.

처음 예비 이모부를 만났을 때, 그의 얼굴에는 여드름 자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제대하고 군복을 벗어던진 그는 한층 더 잘생긴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매끈한 피부 결 때문인지 콧날은 더욱 우뚝해 보였고, 턱선은 한층 더 날카로워진 듯했다.

우리 아빠가 차지한 비주얼 센터 자리를 넘볼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비주얼 차석 정도는 될 듯싶었다.

“여은아.”

연주를 마친 예비 이모부가 굵직한 목소리로 이모를 불렀다.

“응?”

감동적인 연주의 여운을 즐기던 이모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예비 이모부를 바라보았다.

“너 졸업하고 나면……. 나 조금만 기다려 줘.”

이모는 벌써 대학 졸업반이었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똑똑하기까지 해서 대학을 조기 졸업한다고.

먼저 사회에 나가는 여자 친구 때문에, 이모의 남자 친구는 조금 불안한 모양이었다.

“내가 얼른 따라갈게.”

내 몸을 부둥켜안은 이모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응.”

짧은 대꾸에서 울음기가 배어났다.

이렇게 사랑스러울 때가!

나는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피아노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싶을 만큼, 몸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지는 것만 같았다.

도, 레, 미.

간지러운 기분을 못 견딘 나는 그만 실수로 피아노 건반을 차례대로 누르고 말았다.

질척한 소음을 내며 입을 맞추던 두 청춘이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얘 지금 도부터 차례대로 친 것 같은데?”

예비 이모부가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박! 한아야! 다시 해봐! 응? 다시!”

이모는 고개를 옆으로 내리고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이번에는 도만 꾹 눌러보았다. 아무 건반이나 누르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도레미를 또다시 차례로 누르는 것은 인생 2회 차로서 반칙처럼 느껴졌다.

“우리 한아 음악 영재인가 봐!”

이모가 내 볼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전 삶에서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했다.

악기를 익히는 데에는 시간뿐만 아니라 돈도 많이 든다.

보육원에서 그런 금전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를 갖는 것은 사치였다.

물론 보육원에 여러 악기가 있기는 했지만, 공공재인 악기를 독차지하고 연습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음악 실기 수행평가가 제일 싫었다.

성적 관리에 열을 올렸던 사춘기 아이에게는 자존감을 훅훅 떨어뜨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국어, 영어, 수학 등의 성적은 월등했지만, 음악, 미술 등의 실기 과목에서는 교육 빈부의 격차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음악 영재라니요, 이모님.

“자, 이게 도야. 도!”

이모는 내 손가락을 잡고는 건반을 꾹 눌렀다.

이번 삶에서는 차고 넘치는 예술적 교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보육원 아이들이 떠오르면서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해적이 될 거라고 했던 남자아이는 대체 누굴까?

혹시 나한테 친동생이 있었나?

엄마, 아빠가 나를 동생과 함께 보육원에 맡겼던 건가?

이상하게 그 아이와 관련한 기억만 흐릿했다.

“한아 힘든가 보다. 아직 소근육이 덜 발달해서, 그렇게 손가락으로 건반 누르게 하면 힘들 거야.”

해적 남자아이 생각에 잔뜩 인상을 찌푸린 나를 예비 이모부가 안아 들며 말했다.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우리 엄마가 피아노 전공했잖아.”

이모의 예비 시엄마는 피아니스트였나 보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구나. 멋있어.”

귀여운 이모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멋있어?”

어디선가 귀에 착 감기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다! 소리 벗고, 기저귀 질러!

“우아아아! 움마! 우우움마!”

나는 반가운 기색을 온몸으로 표현하기 바빴다.

“선준이도 와 있었구나. 피아노 치고 있었어?”

예비 이모부가 인사할 새도 없이 이모가 떠들기 시작했다.

“응, 언니! 근데 우리 한아 음악 시켜야 할 것 같아! 얘 아까 도레미를 차례대로 쳤어! 대단하지 않아? 어떻게 돌도 안 된 애가 도, 레, 미를 차례대로 쳐? 박자도 정확했다니까?”

“그래? 우리 한아가, 피아노를?”

엄마가 ‘우리 딸 천재’ 모드로 돌입했다.

자식을 향한 기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나만 피곤해진다.

“우리 한아 이모랑 도, 레, 미 쳐 볼까?”

엄마가 이모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건반을 마구 두드렸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폭주하려는 엄마의 교육열을 조금 식힐 필요가 있었다.

“우리 한아 피아노도 잘 치네! 아구, 기특해라!”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엄마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우리 엄마는 내가 기저귀를 흠뻑 적셔도, 잘 쌌다며 손뼉을 쳐 주는 사람이니까.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건반을 두드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우리 집 2층 거실에는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가 생겼다.

***

대체 해적이 되겠다던 아이는 누굴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짙어졌지만, 아기의 신분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세월은 느릿하게 흘러서,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1년째 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여보, 우리 한아가 오늘 돌잡이로 뭘 잡을 것 같아요?”

내가 태어나고도 한동안 아빠의 이름을 부르던 엄마였다.

여전히 ‘여보’라고 부를 때는 어색해하면서도, 그 호칭을 입에 붙이려고 애쓰는 엄마가 귀여웠다.

“글쎄. 우리 한아가 잡고 싶은 걸 잡겠지.”

아빠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연보라색 한복을 차려입은 아빠는 사극 속에 등장하는 지체 높은 선비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연보라색 한복을 입은 엄마는 공주가 따로 없었다.

우리 엄마는 분명히 전생에 궁에 살았을 거다.

그리고 나는?

엄마와 아빠의 장점을 잘 섞어서 태어난 나는 오늘의 주인공답게 깜찍한 기품이 좔좔 흘렀다.

“우리 한아 뭐 잡을 거야?”

엄마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어머니, 소녀도 그 고민을 오랫동안 했사온데……. 아직 뭘 잡을지 정하지 못하였나이다!

“자, 이제 우리 한아가 등장할 시간이다!”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돌잔치가 결혼식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아.”

엄마가 심호흡하며 중얼거렸다.

“그때는 워낙 소규모였고. 오늘은 정담은이 스몰 웨딩 한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을 크게 벌였으니까.”

아빠가 엄마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동그란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결혼식 때는 뭐가 뭔지 잘 몰라서 그냥 지나갔던 것들이 돌잔치 때는 막 생각나더라고요. 한복도 결혼식 때는 쨍한 색 입었으니까, 돌잔치 때는 연한 색 입고 싶고. 그때는 하객도 적었으니까, 오늘은 오만 사람 다 부르고 싶고.”

그러니까 결혼식 때 못다 쓴 에너지를 나의 돌잔치에 쏟아부었다는 뜻이다.

“고생했어. 이제 나가자.”

대기실에서 빠져나가자, 시꺼먼 슈트를 입은 경호 인력이 순식간에 세 식구를 에워쌌다.

뭐야? 여기 진짜 궁이야?

궁궐 뺨치게 고급스러운 솟을대문을 지나, 푸른 잔디가 깔린 중정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방을 궁궐 같은 기와가 둘러싼 형태였다.

“오늘의 주인공, 민한아 공주님의 사랑스러운 가족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세요!”

와, 나 저 아줌마 알아!

유명한 아나운서였던 아줌마가 사회를 보고 있었다.

엄마가 내 컨디션을 섬세하게 컨트롤 한 덕분에 나는 돌잔치가 진행되는 내내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존경하는 엄마 그리고 아빠.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한아를 낳고 나서야…….”

엄마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향해 쓴 편지를 읽을 때는 나도 하마터면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

“사랑하는 할머니.”

아빠는 증조할머니께 쓴 편지를 다 읽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우아아앙!”

민망해하는 아빠를 위해 나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읜 아빠에게 증조할머니는 부모 이상의 존재였다.

증조할머니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세상 이야기를 하시다가도, 금세 아이처럼 돌변하시곤 했다.

지금은 손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바라보시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아, 우리 한아가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주네요.”

사회자는 매끄럽게 돌잔치를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돌잡이 시간이 되었다.

“자, 우리 한아가 뭘 잡을까요?”

팔각 교자상 앞에 앉은 나는 돌잡이 물건을 쭉 훑어보았다. 판사봉, 마이크, 돈, 실, 붓, 청진기, 축구공, 책, 마패 등 종류도 다양했다.

마패는 뜻밖인데? 관직에 오른다는 뜻인가?

나는 서슴없이 마패를 집어 들었다. 재벌이니, 돈은 차고 넘쳤다.

어머니, 저는 야망이 있는 아이예요. 권력의 맛이 세상에서 제일 매혹적이라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하객석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한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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