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8화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기분 좋은 압박감을 느끼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호흡은 위태롭게 차오르고, 열기는 금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하아! 흐으읏!”

    고개를 비틀어 간신히 입술을 뗀 순간, 꽉 막혀 있던 열기가 터지듯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반쯤 가라뜬 몽롱한 눈으로 내 얼굴을 살피며,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하아. 담은아.”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것처럼 깊이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는 애원하듯 내 이름을 읊조렸다.

    “서후 씨.”

    나 역시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에게 매달리듯 했다.

    두 사람을 에워싸고 얇은 막이 차오르는 것처럼 공기가 습해지기 시작했다.

    매끈한 그의 살갗 위를 더듬는 손이 자꾸만 땀 때문에 미끄러졌다.

    “으으응.”

    뒷무릎이 간질거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타고 얕은 전율이 흘렀다.

    “참아. 벌써 가면 더 힘들 거야.”

    그가 경고조로 뇌까렸다.

    매사에 정중하고 우아한 남편도 침대 위에서는 이성을 잃을 때가 종종 있었다.

    올려다본 그의 눈초리가 붉었다. 평소보다 훨씬 흥분한 상태임을 그의 눈초리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팔딱팔딱 뛰는 게 보일 정도였다.

    “흐으읏. 참고, 싶은데.”

    그가 한숨을 몰아쉬며 의문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서후 씨가 너무 야해서, 못 참겠어! 으읏.”

    미간이 저절로 모이고, 입술 새가 멍하니 벌어졌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꺼풀이 내려앉으려는 순간이었다.

    “눈 감지 마.”

    그가 광대 언저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마주 보았다.

    “보여 줘, 전부.”

    그가 내 눈동자를 꿰뚫듯이 집요하게 응시했다.

    숨이 턱 막혀서 신음조차 흘러나오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남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눈이네.”

    그는 쾌락에 흠씬 젖은 아내를 내려다보며 토막 난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도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끝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눈을 감았을 때, 육중한 몸이 무너져내렸다.

    “이제 집에 가야지.”

    그가 납작한 배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창밖이 어둑어둑했다.

    “말도 안 돼! 지금 몇 시예요?”

    화들짝 놀라서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 그가 내 어깨를 잡아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오후 6시. 해가 많이 짧아졌네.”

    “저녁 먹고 집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어떡하죠?”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럴 줄 알고, 룸서비스 시켜 놨어. 누워 있어. 갖고 올게.”

    나한테 침대에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그는 금세 전실로 나가서 은색 베드 트레이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푹신한 이불 위에 작지만 화려한 상이 차려졌다.

    베드 트레이 위에는 안심 스테이크과 크랩 파스타, 시원한 무알콜 샴페인이 놓여 있었고, 에스프레소 잔 크기의 화병에는 은방울꽃이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그런데 커트러리가 한 세트뿐이다.

    “포크랑 나이프가 왜 한 세트뿐이야?”

    그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스테이크를 얇게 썰어서 내 입안으로 넣어 주었다.

    “와, 고기가 살살 녹아.”

    힘을 몽땅 빼고 잠들었다가 일어난 탓인지, 그가 입에 넣어 주는 음식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서후 씨도 먹어.”

    그는 내 입에 넣어 줄 때보다 훨씬 큰 크기로 고기를 썰어서 입안에 넣었다.

    고기를 씹는 동안, 나를 열심히 먹일 생각인 듯했다.

    기다란 손으로 은 식기를 움직이는 칼질은 우아했고, 크리스털 플루트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는 손짓에서도 기품이 넘쳐흘렀다.

    그가 들어 올린 잔의 입구가 내 입술에 닿았다.

    차갑고 달콤한 샴페인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으음.”

    잠자리만큼이나 황홀한 식사였다.

    “그렇게 맛있어?”

    “응.”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나보다?”

    발칙한 멘트가 퍽 귀여운 남편이다.

    “아니, 내 남편 민서후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지.”

    그가 포크에 파스타를 돌돌 말아서 내 입에 넣어 주고는 물었다.

    “그럼, 더 먹을래?”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응.”

    “오늘 우리 담은이 과식하겠네.”

    그가 음식을 깨끗이 비운 트레이를 테이블 위로 옮겼다. 그러고는 여유가 없다는 듯이 급하게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

    엄마, 아빠가 늦는다.

    이유식을 잔뜩 먹고, 한바탕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엄마, 아빠는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으응애애!”

    곁에 아무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목청껏 울음을 터뜨렸다.

    어디선가 우당탕하는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모가 아기 침대 난간 너머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응? 우리 한아 깼어요?”

    뒤이어 이모의 남자 친구도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우리 예쁜 한아 깼어요?”

    예비 이모부가 나에게 바람직한 호칭을 들이대며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 내가 자는 동안 뭘 했습니까?

    이모와 예비 이모부의 광대 언저리가 몹시도 붉었다.

    “우아아우!”

    “우리 한아 기저귀 갈아야겠다! 그치?”

    “아우우!”

    나는 고개를 힘껏 내저으려 노력했다.

    무엄하다! 내가 아무리 아기라고 한들, 어찌 외간 남자 앞에서 기저귀를 갈려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화를 내려는데,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휴, 우리 한아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구 실장이 능숙한 솜씨로 나를 안아 들었다.

    “어……. 한아가 깬 거, 실장님이 어떻게 아셨어요?”

    이모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한아 침대에 베이비 모니터 있잖아요.”

    이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예비 이모부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베이비……모니터요?”

    이모가 눈을 치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한아가 자는 모습 모니터링하는 거요. 여기 붙어 있잖아요.”

    아기용 침대 난간 모서리에 붙어 있는 장난감 같은 물건을 구 실장이 가리켰다.

    “헛! 이거 모빌 아녜요?”

    “한아가 모빌 볼 시기는 지났죠.”

    이모의 얼굴이 이제는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래서 둘이 무슨 짓을 했는데, 어?

    이모는 매우 어색하게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긁어 대며 물었다.

    “이거 한아 침대만 찍히는 건가요?”

    “그럼요. 한아 침대만.”

    구 실장이 안심하라는 듯이 웃었다.

    “하하, 그렇구나. 한아 침대만 찍히는 거구나.”

    “그렇지만 소리는 다 들린답니다. 오늘 한아가 자면서 유독 끙끙거리더라고요.”

    아니, 구 실장 양반! 나는 끙끙거리지 않았소만!

    “아앗! 우리 한아가 어디가 불편했던 걸까요? 왜 그렇게 끙끙거렸을까?”

    누가 들어도 어색한 이모의 질문이었다.

    이봐요, 이모. 진정하고, 생각이란 걸 하고 물어보라고! 나랑 이 방에 같이 있었잖아!

    “그러게요. 왜 그렇게 끙끙거렸는지……. 같이 계셨던 여은 양이 모르면, 누가 알까요.”

    구 실장이 예비 이모부를 한번 흘끗 보고는 나를 안고 침실을 나섰다.

    “한아 아가씨. 이모랑 남자 친구는 놀리는 재미가 있어요. 그렇죠?”

    “으꺄으!”

    “어머, 한아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요, 구 실장님. 저는 구 실장님이 이렇게 사악한 분인 줄 몰랐어요.

    거, 청춘들 연애 좀 하게 내버려 두도록 합시다!

    기저귀 찍찍이는 기가 막히게 잘 채우시는 분이 연애하는 커플한테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요?

    구 실장은 기저귀 교환대에 나를 눕히고는 유려한 손길로 기저귀를 갈아 주었다. 찍찍이 간격이 딱 좋다!

    “어휴, 근데 한아 공주님 엄마 아빠도 생각보다 늦으시네요. 미술관 데이트는 잘 하셨으려나.”

    “우우우.”

    “우리 한아 공주님,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저기요, 구 실장님. 우리 엄마 아빠가 미술관에 가지 않았다는데, 내 이유식 한 끼를 걸겠소.

    “미술관 갔다가, 저녁도 먹고 들어와야 하니까. 조금 더 늦으실 수도 있어요. 그 전까지 저랑 재미있는 책을 읽을까요?”

    “으아아앙!”

    구 실장이 기저귀 교환대에서 나를 안아 들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모랑 예비 이모부 구경하고 싶은데, 책은 무슨?

    이전 삶에서 세계문학 전집과 한국문학 전집을 섭렵한 민하나였다.

    보육원에 굴러다니는 수능 국어영역 모의고사 문제도 심심풀이로 풀곤 했었다.

    그런데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그림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라니요!

    내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짓은 못 하겠소만!

    “우아아아앙!”

    세상 서러운 울음을 목청껏 터뜨리자, 이모가 달려왔다.

    “오구. 우리 한아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요? 이모가 안아 줄게.”

    나는 이모의 품에 안기자마자 입술 끝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울음을 삭혔다.

    “우리 한아가 이모를 정말 좋아하네요.”

    노련한 구 실장은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아야. 이모랑 가서 놀자!”

    이모가 나를 안고 간 곳은 피아노 앞이었다.

    예비 이모부는 이모의 곁에 딱 붙어 앉아서 나와 이모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번갈아 보았다.

    “자, 이모 남자 친구가 피아노 쳐 줄 거야. 얼마나 잘 치는지 한번 들어 볼까?”

    “나 피아노 안 친 지 오래됐어.”

    예비 이모부가 부끄럽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 고2 때였나? 음악 수행평가로 네가 연주했던 곡. 나 그거 듣고 싶었는데.”

    이모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예비 이모부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순식간에 역동적인 음악이 실내를 울리기 시작했다.

    빠바 밤밤 빠바 밤밤 빠바 밤밤 빠바밤!

    잭 스패로가 밧줄을 타고 날아다니는 영상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누나, 나는 해적이 될 거야!’

    장난감 칼을 든 아이가 내 눈앞에 아른거린 것도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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