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7화

    한아를 낳고 나서 처음으로 남편과 단둘이 외출하는 길이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늘 곁에 두던 딸 아이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지 않자, 괜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어떤데?”

    운전대를 잡고 있던 그가 오른손을 뻗어서 내 손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뭔가 되게 소중한 걸 빼앗긴 느낌이랄까, 뭘 잃어버린 기분이랄까?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걸 까먹은 기분이요.”

    남편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조수석에 앉은 나를 흘끗 보았다.

    “한아 낳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거든요. 늘 배 속에 있는 아이한테 말을 걸었었는데, 이제 한아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우울하더라고요.”

    아이를 낳고 이제 6개월이 지났다.

    “밤낮으로 한아랑 붙어 있다가 떨어져 있으려니까, 너무 허전해.”

    오랜만에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마음이 영 불편했다.

    “흐음.”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가만가만 어루만지던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한아 생각 안 나게 해 줘야겠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다정한 열기가 묻어났다.

    “어떻게?”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남편이 관능적인 뉘앙스를 풍길 때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목적지인 미술관을 앞에 두고, 그가 운전대를 틀었다.

    “응? 미술관은?”

    나는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미술관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유럽에서 왔다는 헐벗은 그림보다, 다른 게 더 보고 싶어서.”

    오랜만에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자며, 고르고 고른 장소가 미술관이었다.

    낭만주의 회화 초대전을 진행하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한강 근처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기로 했었다.

    “뭐가 더 보고 싶은데요?”

    뻔히 알면서도 새침하게 물었다.

    “헐벗은 그림 말고, 너.”

    “뭘 또, 그렇게 단도직입적이실까.”

    수줍어진 나는 딴청을 피우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뭘 또, 그렇게 부끄럼을 타실까.”

    웃음기가 밴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가 내 말투를 똑같이 따라 했다.

    결혼 전에는 머릿속에서 터진 쓰레기 봉지를 수습하지 못해서 난감했는데, 이상하게 아이를 낳고 나서는 수줍어졌다.

    한아를 곁에 두고, 아이 눈치를 보다 보니 키스하는 것도 녹록하지 않았다. 그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도.

    그의 차는 우리가 결혼 전에 자주 들락거리던 호텔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 되게 오랜만이네.”

    그가 발렛 라인에 맞추어 차를 멈추며 중얼거렸다.

    나, 오늘 속옷 뭐 입었지?

    순간 당황스러워진 나는 운전석에서 내리려는 남편의 팔뚝을 다급하게 붙들었다.

    “왜?”

    “그게…….”

    “그게 뭐?”

    출산 이후 야릇한 속옷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오늘 무슨 속옷을 입었는지조차 떠오르질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다른 데 갈까?”

    내가 울상을 짓고 망설이자, 그가 다정한 눈길로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이든 계속해 보라는 듯이 그가 눈썹을 치떴다.

    “오늘 무슨 속옷을 입었는지, 생각이 안 나서……. 한아 낳고는 그런 데 신경을 못 썼더니…….”

    “난 또 뭐라고.”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벗기고 나면 무슨 속옷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 속옷 신경 쓸 새가 어딨어.”

    기다란 손가락 등으로 내 뺨을 쓸어내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야릇한 장난기가 묻어났다.

    “정 보여 주기 싫으면, 속옷은 안 볼게.”

    “아! 그런 방법이 있구나.”

    내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의 검고 그윽한 눈동자 위로 분홍빛 하트가 동동 떠오르는 듯했다.

    “아, 정담은. 애 낳고도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해? 우리 한아보다 더 깜찍하네!”

    운전석에서 내린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웃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살포시 잡고는 차에서 내렸다.

    “한아 앞에서 그런 소리 하면 절대 안 돼!”

    고개를 단호히 내저으며, 남편을 나무랐다.

    “한아 아직 우리 말귀 못 알아들어.”

    “아니야, 한아 다 알아듣는 것 같단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젖히고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또 시작이네! 팔불출 엄마!”

    “지금 ‘우리 애 천잰가 봐’ 모드 아니거든요? 진짜 가끔 보면 우리 한아는 우리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단 말이야. 특히 당신이 나한테 막 스킨십 할 때, 애 표정이 뭐랄까.”

    나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말끝을 흐렸다.

    “뭐랄까?”

    그가 내 말투를 따라 하며 되물었다.

    “못 볼 꼴 보는 것처럼 시선을 피한다고 해야 하나?”

    호텔 로비로 들어서던 그가 우뚝 멈춰 서서 배를 쥐고 웃었다.

    “지금 ‘우리 애 천잰가 봐’ 모드는 아니라며? 이게 아니면, 그 모드 들어가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이래서 아빠의 부성애는 학습되는 것이고, 아이를 낳은 엄마의 모성애는 본능적이라고 하는 걸까?

    남편은 한아 표정의 미묘한 차이를 모르겠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VIP 전용 컨시어지에서 체크인 도움을 받고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밀폐된 엘리베이터에 둘만 남겨지자, 눈을 뾰족하게 만들며 남편을 흘겨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우리 한아 예뻐. 한아가 자꾸 뭘 아는 것처럼 쳐다보니까, 내 아내가 자꾸 내 손길을 피하는 거지?”

    커다란 손이 어깨를 그러쥐었다. 부드럽게 당기는 힘을 느낀 나는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그냥 애 낳고 나니까, 몸 선도 예전 같지 않고.”

    아이를 낳고 나면, 아가씨 때로 몸이 곧장 되돌아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출산하고 난 직후 딱 아기의 몸무게만큼만 살이 빠져서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른다.

    “예전 같지 않기는.”

    나란히 서 있던 그가 몸을 슥 돌려서 나와 마주 보았다. 한 발짝 성큼 다가온 그의 단단한 몸이 바짝 밀착되었다.

    “여전히 나는 정담은만 보면 이렇게 곤두서는데.”

    그의 호흡이 앞머리 위에서 흐트러졌다.

    순식간에 열기가 치솟았다. 얼굴을 붉히며 수줍음을 탈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열감이었다.

    그가 몸을 슬쩍 움직여 존재감을 드러낼 때마다, 아랫배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 간질거렸다.

    그의 마른 입술이 달아오른 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가 정중하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로 한숨을 고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어두운 복도를 흔들림 없이 우아하게 걸었다.

    남편의 금욕적인 태도 때문에 더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호텔 객실 문이 열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 것을 알면서도 절제하는 모습은 퍽 자극적이었다.

    그가 기름한 손가락 사이에 끼운 카드키를 센서에 갖다 댔다.

    육중한 문이 철컥 소리와 함께 열리고, 예상한 대로 그는 두꺼운 팔로 내 허리를 휘감아 안으며 객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흐음.”

    그의 입술이 목 안쪽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하아.”

    후끈거리는 그의 숨결이 살갗을 타고 흘렀다.

    속옷 걱정을 했던 게 무색했다.

    그는 살결 위로 입술을 쉴 새 없이 찍어 누르며 옷을 벗겼다.

    객실 입구에서 전실을 지나고, 침실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옷이 줄지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푹신한 침대에 등이 닿자마자, 위압적인 나신을 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본능적인 지배욕에 휩싸여서 아내를 탐하듯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심장을 녹일 것처럼 맹렬했다.

    “진짜, 큰일이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묵직한 목선이 뒤틀리자, 상체 근육이 올올이 꿈틀대며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뭐가, 큰일인데?”

    나는 팔꿈치로 침대를 짚으며 상체를 슬쩍 들어 올렸다.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물방울이 모이듯 소복하게 고인 상체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갈증이 왈칵 일어났다.

    “한아 태어나고, 내가 집에서 얼마나 조심했는지 알지?”

    조심한다는 사람이 밤마다 욕실로 아내를 끌고 갔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섭게 달아오른 남편을 자극해 봐야 좋을 게 없다.

    “응, 알아.”

    나는 순순히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지금은 집에서처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겠네?”

    그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흐응.”

    그저 서로의 몸이 살짝 맞닿았을 뿐인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벌써 그런 소리를 내는 거냐고 묻듯이 엄지손가락으로 나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나도 집에서처럼 할 필요 없잖아?”

    얼마든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그가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아랫입술을 꾹 누른 그는 천천히 힘주어 손가락을 내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호흡이 왈칵 밀려드는가 싶더니, 입안 가득 물컹한 혀가 들어찼다.

    “우움.”

    단단한 팔뚝과 어깨를 쓸어 올려서 그의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흐음.”

    그의 목울대에서도 아슬아슬하게 앓는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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