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6화

    이 할머니 뭐야?

    나는 뜨악한 눈으로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이 할미에 대해서도 궁금한 모양이지? 차차 알게 될 게다.”

    옹알이조차 내뱉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이전 생에서 야간괴담회의 애청자였던 나는 기기괴괴한 할머니의 눈빛에 심장이 멎는 듯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촛불 50개는 거뜬하다!

    괴기스러운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첫째, 나의 가족이길 바랐던 민서후의 딸로 환생했다.

    둘째, 예비 이모부가 시간을 거슬러 왔고, 그걸 우리 엄마 아빠는 알고 있다.

    셋째, 나를 애틋하게 부르는 남자아이의 환청이 들린다.

    넷째, 이 모든 걸 증조할머니가 꿰뚫어 보고 있다?

    뭐 이렇게 흥미진진한 집안이 다 있지? 어둑시니들 보고 있나?

    나는 옹알이로서 적절한 의사 표현을 하기 위해 미간에 힘을 빡 주었다.

    “우아우우앙.”

    할머니, 그 남자아이는 누구입니까?

    할머니가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아아아!”

    혹시 저를 데려가려는 저승사자일까요?

    저승사자가 까만 도포 자락을 휘날리고 다닌다는 이미지는 오래된 드라마의 산물이었다.

    공포물 덕후였던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저승사자는 데리고 가야 할 사람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낄 대상으로 둔갑하여 나타난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남자아이가 나의 저승사자일까?

    “어찌 생각하는 게 제 어미랑 똑같을꼬.”

    할머니가 귀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를 데려가려는 아이가 아니란다. 그 아이는 무사히 잘 지내고 있을 터이니, 걱정은 내려놓으려무나.”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 그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할머니의 정체였다.

    “우아?”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어찌 저와 대화를 나누실 수 있는 건가요?

    할머니가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할미는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듣지 않은 것에 귀를 기울이는 제자란다.”

    제자? 대체 누구의 제자라는 건지 모르겠다.

    “신을 모셔야 하는 제자 말이다. 허나, 할미는 남들만큼만 보고 싶었고, 남들만큼만 듣고 싶었단다.”

    할머니의 얼굴에 순간 서글픔이 어렸다.

    “내 너의 가련한 삶을 구해 왔으니, 내가 적게 보고 적게 듣는다고 한들……. 이제 나를 벌하시지는 않으시겠지.”

    짐작건대 할머니는 신내림을 받은 무당인 듯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 핏줄을 타고나서, 전생의 기억을 지니게 된 것일까?

    내 물음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할머니가 고개를 내저으셨다.

    “아니, 아니다. 무업이 너에게 세습되는 일은 없을 게다. 지난 삶에 미련이 남아 있어서 생생히 기억하는 듯하나……. 다 잊히는 시간이 올게다.”

    내가 지난 삶에서 버리지 못한 미련이 무엇일까?

    할머니께서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할머니, 물 대신 따뜻한 차로 가져왔어요.”

    엄마가 정갈하게 차린 찻상을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기특하고 어여쁘다는 듯이 엄마를 바라보았다.

    예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나는 저항 없이 옹알이를 터뜨렸다.

    “우아아아!”

    우리 엄마 너무 예쁘다!

    “그렇지? 어린 네가 보기에도 네 어미가 참 곱지?”

    할머니가 나를 엄마에게 넘겨주며 웃었다.

    “할머니, 우리 한아가 저 예쁘대요?”

    그래, 한아라는 이름!

    단순히 발음이 비슷한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까 할머니는 분명히 나의 가련한 삶을 이곳으로 불러왔다고 하셨다!

    “응. 녀석이 어찌나 영특한지!”

    할머니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나에게 눈을 찡긋하셨다.

    지난 생에서 못다 한 삶을 살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일까?

    하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나는 열다섯에 죽었고, 당시 서후 삼촌 역시 30대 중반을 넘긴 상태에서 숨을 거뒀었다.

    그런데 아빠는 아직 그 나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민하나는 보육원에 살아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계산해도 시간이 꼬이고 꼬였다.

    “아가, 차가 너무 뜨겁구나. 차가운 물 좀 가져다주련?”

    “네, 할머니!”

    할머니는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모양인지, 엄마에게 또 심부름을 시켰다.

    엄마는 나를 아기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고는 또다시 침실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 뭔가 알려 주시는 건 좋은데요! 우리 엄마 좀 그만 부려 먹어요!

    “오냐, 요 녀석아! 벌써 제 어미를 끔찍이 챙기는 마음이 아주 기특하구나!”

    할머니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상체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이셨다.

    “너를 점지해 줄 삼신할미한테 빌고 또 빌었다. 하늘의 너그러움으로 삶을 보장받은 내 손주가 어미에게 버려질 운명인 가련한 아이를 거둘 수 있게 해 달라고. 여기서는 네 이전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단다.”

    뭐야, 민하나는 태어나지 않은 거야?

    하늘의 너그러움으로 삶을 보장받은 손주는 우리 아빠?

    할머니의 대답은 수수께끼 같았다.

    하나의 의문이 해결되면, 또 다른 의문이 솟아났다.

    “우아아아우! 우아우! 아아!”

    답답한 마음에 옹알이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어휴, 이 수다쟁이! 말을 배우면 얼마나 떠들려고 이렇게 옹알이가 많을까요?”

    차가운 물을 들고 침실로 들어온 엄마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 많은 만큼, 궁금한 게 많은 게지. 잘 가르쳐야 할 게다. 똘똘한 녀석이니까.”

    “정말요? 우리 한아가 똘똘해요?”

    귀여운 우리 엄마!

    나를 끌어안은 엄마는 ‘우리 한아가 천재가 맞나 봐!’하고 호들갑스럽게 떠들며 볼을 비볐다.

    그날 밤, 엄마는 아빠를 붙들고 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을 무한정 반복했다.

    “똘똘한 녀석이니까, 잘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서후 씨는 우리 한아가 커서 뭐가 될 것 같아요?”

    “글쎄. 한아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한아 다닐 유치원부터 알아봐야겠어요!”

    “한아 이제 백일 지났어.”

    엄마를 말리는 아빠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그래도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교육열이 활활 타오르는 엄마를 아빠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엄마의 얼굴에는 헐크를 연상케 하는 초록색 팩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데도 말이다.

    “이제 세수해야겠다. 잠시만요!”

    엄마가 욕실로 향하자, 아빠는 나를 안아 든 채로 엄마의 뒤를 따랐다.

    “머리끈이 어디 갔지?”

    세면대 앞에 선 엄마가 한 손으로 머리를 모아 잡은 채 머리끈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래, 엄마. 머리끈은 천 개를 사도 다 없어진다?

    “머리끈은 아무리 많이 사도, 다 없어져 버린다니까요!”

    우리 엄마랑 나는 참 통하는 게 많은 것 같다.

    “내가 잡아 줄게. 세수해.”

    그리고 우리 아빠는 다정함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엄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엄마는 초록색 팩을 얼굴에서 벗겨 내려고 열심히 세수를 해 댔다.

    그 모습을 아빠는 핥듯이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도 혀가 달린 건가, 하는 착각이 일 만큼 달콤한 시선이었다.

    세수를 마친 엄마가 고개를 쳐든 순간이었다.

    아빠가 엄마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아니! 세상 다정한 우리 아빠가 엄마 머리끄덩이를 잡고!

    충격에 입을 쩍 벌렸던 것도 잠시였다.

    아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서 엄마의 젖은 입술을 집어삼켰다.

    거울에 비치는 엄마와 아빠의 키스는 퍽 야릇했다.

    헐크 같은 팩을 거둬 낸 엄마의 얼굴은 말갛게 젖어 있었다.

    아빠는 그 물기를 본인 입술로 닦아 낼 것처럼 엄마의 볼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췄다.

    “으음.”

    이번에는 엄마도 ‘한아가 보고 있어요!’ 라는 말로 아빠를 말리지 않았다.

    아빠는 입을 크게 벌리며 엄마를 잡아먹을 것처럼 덤볐다.

    아, 진짜……. 아무래도 내가 말려야 할 것 같다.

    “으음마아!”

    격렬한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서 입술을 뗐다.

    엄마와 아빠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우리 한아 지금 뭐라고 했어요?”

    “방금 들었어? 한아가 엄마라고 한 거지?”

    두 사람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세상에! 우리 한아가 엄마라고 했어!”

    감격에 겨운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는 배시시 웃었다.

    아니다. 나는 맹세코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음마!”

    음란마귀라고 둘을 말렸을 뿐이다!

    “또 했다! 엄마라고!”

    아니라고요! 내 앞에서 키스 좀 작작 하라고요!

    음마, 음란마귀들아!

    “음마, 음마, 으음마아!”

    “우리 한아 진짜 천잰가 봐!”

    나는 생후 백일이 갓 지난 시점에 음란마귀를 외치는 천재가 되어 있었다.

    ***

    “우리 한아, 이모랑 외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엄마랑 아빠 하룻밤만 자고 올게.”

    엄마와 아빠가 나를 외가댁에 떼어 놓고 사라지려고 했다.

    나는 저항 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기서 하룻밤만 자. 그럼, 엄마랑 아빠가 데리러 올게.’

    나를 보육원에 버리고 간 부모도 저런 말을 했었다.

    그러고는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어휴, 우리 한아 이모랑 놀자! 엄마랑 아빠는 오랜만에 데이트하러 가시는 거야. 진짜 내일이면 오실 거다? 좀 있으면 이모 남자 친구도 올 건데, 계속 울 거야?”

    예비 이모부가 온다고?

    자, 이제 이모와 예비 이모부의 염병 천병 연애질과 엄마 아빠의 데이트를 이원 생중계해야 하는 타이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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