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2화

    서후 삼촌! 내가 왜 서후 삼촌을 못 알아봤을까?

    내가 가장 믿고 따르던 어른이었는데!

    나는 존경심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나의 아빠가 된 서후 삼촌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딸, 아빠만 쳐다보네. 엄마 서운하게.”

    애교 많은 엄마가 귀염을 떨어도 소용이 없었다.

    나의 시선은 아빠에게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빠는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서는 광채가 돌았고, 까만 눈동자에는 찬란한 기쁨이 맺혀 있었다.

    예전의 서후 삼촌도 잘생기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빛나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못 알아본 거였어.

    그때는 삶의 슬픔으로 지친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세상 모든 기쁨을 끌어안은 것처럼 행복해 보여서.

    삼촌이 행복해져서 다행이다.

    민서후는 좋은 사람이었다.

    15년의 짧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가족으로 삼고 싶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보육원에서 생활한 지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이건 네 거 아니라고, 민하나! 몇 번을 말해! 같이 쓰는 거라고 했잖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의 부모는 내 이름을 ‘하나’라고 지었다.

    그래 놓고 나를 보육원에 버렸다.

    “아니야. 이건 하나 거야!”

    보육원에 들어오기 전에도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았던 나는 고집이 세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함께 가지고 놀아야 하는 블록 장난감을 품에 안고선 씩씩거렸다.

    나와 같은 방을 쓰던 언니는 선생님들 몰래 내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으앙!”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안녕, 우리 친구는 왜 울어? 무슨 일이야?”

    몸이 두둥실 공중으로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품에 안긴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서 울음을 그쳤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이거 하나 건데, 자꾸 언니가 아니라고.”

    “응, 그래서 하나가 속상했구나. 우리 하나 울음도 뚝 그치는 거 보니까, 진짜 대단하다! 장난감 가지고 사이좋게 노는 건 너무 쉬운 일이겠는데?”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뿌듯해진 나는 남자의 무릎 위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 때까지 블록 놀이를 했다.

    “가지 마요! 가지 마!”

    그날 처음 본 남자의 목에 매달려서, 가지 말라고 울면서 진상도 부렸다.

    “하나가 밥 잘 먹고, 여기 친구들, 언니, 오빠, 동생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면……. 아저씨 또 올게! 금방 올게. 응? 약속!”

    기다란 손가락에 나의 짧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그날 밤, 나를 안아 올려 주던 착한 아저씨 생각에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에 온 신입 직원 중에 건실한 사람이 꽤 있더라고요. 민서후 씨? 사람, 참 좋아 보이더라.”

    “아! 아까 하나랑 놀아 주던 청년이요?”

    보육원 원장님이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방문을 빠끔히 열고선 귀를 기울였다.

    “그 직원 이름이 민서후군요.”

    “정웅그룹 회장님은 인사가 만사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세요. 능력만큼 인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셔서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에 여기 봉사활동을 꼭 넣으시거든요.”

    “그럼, 원장님이 정웅 회장님께 그런 보고도 따로 하시는 거예요?”

    “네, 중요한 일을 맡는 리더 자리에는 선한 사람이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셔서, 직원들 봉사활동 이력도 챙기시죠.”

    어렸던 탓에 그들의 대화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보육원을 후원해 주는 정웅그룹의 회장님이 무척 좋은 분이라는 것만큼은 알아들었다.

    그리고 민서후가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도.

    그로부터 2주쯤 지났을 무렵, 민서후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러 왔다는 듯이 홀로 보육원을 찾았다.

    “하나야, 잘 지냈어?”

    나는 엄마, 아빠가 나를 찾아온 것도 아닌데, 민서후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외딴곳에 혼자 버려진 설움을 그의 가슴에서 토해 내기라도 할 것처럼.

    “아휴, 이렇게 정 붙이면 곤란한데…….”

    원장님은 그의 살가운 태도에 우려를 표했다.

    부모에게 한번 버림받았던 아이들이 봉사자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상처받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육원 아이들은 외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법부터 익힌다.

    “제가 자주 올게요, 원장님.”

    하지만 나는 그런 방법을 익히기도 전에 민서후를 만난 것이다.

    민서후는 원장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그랬던 것인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보육원을 찾았다.

    내가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

    출장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꼬박꼬박 보육원을 찾았었다.

    아이들은 나와 민서후의 각별한 사이를 질투하기도 하고, 나를 비꼬기도 했다.

    “그 아저씨 결혼하고, 자기 애 생기면 이제 안 올 거야.”

    “민하나, 네가 그 아저씨 딸이라고 착각하지 마. 그 아저씨가 널 입양이라도 해 줄 것 같아? 같은 민 씨라고 좋아하는 것도 웃겨.”

    자존심이 셌던 나는 그런 아이들과의 싸움도 잦았다.

    “나도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했거든! 민서후 아저씨는 워낙 내가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 거야! 아빠는 무슨 아빠야! 나도 아빠 있는데!”

    내 아빠는 나를 버린 후 찾지 않은 지 오래였다.

    “친권 포기한 게 부모냐?”

    “친권 포기했다고 핏줄도 바뀌냐? 나는 민서후 딸 아니고, 우리 아빠 딸이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나를 버린 아빠보다 민서후가 더 좋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민서후를 나쁘게 말하는 게 싫어서 더 자존심을 세우는 척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보다 가깝지만 먼저 다가갈 수 없는 어른 민서후에게 잊힐까 봐 불안해질 무렵, 나는 학교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어휴, 어쩌면 좋아. 하나야, 네 물건 아닌 것에는 손을 대면 안 되는 거야.”

    친구의 스마트폰을 훔쳐서 가지고 놀다가 버린 일로 보육원이 발칵 뒤집혔다.

    그날 밤, 평일에는 좀처럼 보육원을 찾는 일이 없는 민서후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무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민하나. 너 블록 장난감이 전부 네 거라고 우기던 다섯 살 어린애야?”

    원장님과 보육원 선생님들이 혼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나의 미래를 두려워하고, 걱정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었다. 비뚤어진 우월감이었다.

    그런데 비 내리는 보육원 운동장을 등지고 선 남자의 무서운 얼굴은 나를 겁나게 했다.

    “말해 봐, 너 그런 어린애야?”

    “......아니요.”

    나는 보육원 입구에 서서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왜 그런 짓을 했어?”

    화가 난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은 나오질 않았다.

    “잘못했어요.”

    눈물이 뺨을 거치지 않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뭘 잘했다고 울어?”

    무섭게 혼이 나고 있는데도, 마음이 뭉클뭉클 차올랐다.

    비가 많이 오는 늦은 밤인데도, 나를 혼내 주려고 여기까지 온 민서후가 너무도 고마웠다.

    “너 한 번만 더 이런 일 저지르면, 삼촌 여기 다시는 안 와. 알겠어?”

    내내 젖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놀라서 얼굴을 쳐들었다.

    “네?”

    흔들리는 눈으로 그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너 이렇게 사고 치면……. 삼촌, 여기 다시는 안 온다고.”

    내가 민서후를 처음 봤던 나이가 다섯 살, 그리고 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두려워서 사고를 친 게 열다섯 살.

    나는 10년 동안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따랐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삼촌’이라는 호칭을 허락하고 있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나는 손등으로 젖은 뺨을 문질러 닦고는 말했다.

    “정말 다시는 안 그럴게요, 삼촌!”

    씩씩한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혹은 이제 다행이라는 듯이.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날이 아마도 민서후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을 본 날이었을 것이다.

    잠깐만, 우리 아빠가 죽잖아?

    목욕을 마치고,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락 말락 하던 나는 두 눈을 번쩍 뜨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가, 왜 울지?”

    엄마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살폈다.

    “갑자기 울어?”

    수유 중이던 엄마 곁으로 다가온 아빠가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더욱 서럽게 울었다.

    아빠, 죽지 마!

    근데 우리 아빠 몇 살이지?

    민서후는 30대 중반을 넘기고 회사 연구소 폭발 사고로 죽었다.

    지금은 그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데?

    근데 민서후는 그때까지 결혼을 안 했었는데?

    아빠가 내 등을 안정적으로 토닥거려 준 덕분에 가까스로 울음을 멈췄다.

    “신생아 배앓이 같은 건가?”

    엄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우리 아빠 이직부터 해야 해!

    아니지, 혹시 우리 엄마랑 결혼해서 내가 태어남으로써 아빠의 운명이 바뀐 걸까?

    그래도 만약을 위해 아빠는 정웅그룹을 때려치워야 한다!

    이번 생도 참 기구하기 짝이 없다.

    전생에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으면, 이번 생에는 금수저로 태어나서 호의호식해야 하는 거 아닌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아빠를 실업자로 만들 궁리를 해야 한다니!

    엄마와 나는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지?

    예전에 보육원 침대에 누워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재벌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손녀라며 나를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부모가 곁에 있는 이번 생은 그런 망상조차도 불가능해 보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