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화
“으아아아!”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분명 나는 죽기 직전에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응애!”
그런데 이게 뭐야?
누군가 나를 안아 들어서 어딘가로 옮기는 듯했다.
넌 또 뭐야? 내려놔, 이 새끼야!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
“으으으애애앵!”
나오라는 말은 튀어나오지 않고 얼빠진 울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예쁜 공주님이네요.”
누가?
나를 안고 있던 여자가 누군가에게 나를 건네주고 있었다.
내가? 예쁜 공주님이라고?
자각할 새도 없이 나는 웬 여자의 품에 폭 안겼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꼬물거려서 힘차게 무언가를 빨기 시작했다.
인간의 무서운 생존 본능이 나를 모유로 이끈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의 젖을……?
내가 갓난아기가 되어서 지금 나를 낳은 여자의 젖을 빨고 있는 거야?
퉤, 하고 뱉어 버리고 싶었지만, 달아도 너무 달아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을 굶은 탓에 몹시도 배가 고팠다.
“서후 씨, 울어요?”
나의 엄마로 추정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전신을 따뜻하게 울렸다.
“아, 아니…….”
아빠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고 지적이었다.
“아가, 아빠가 울어. 널 만나서 감격스러운가 봐.”
“우리 딸, 엄마 아빠한테 와 줘서 고마워.”
눈물겨운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눈꺼풀을 빠끔히 벌렸다.
“어? 우리 아가 눈 떴다.”
나는 홀린 듯이 엄마로 추정되는…….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하는 게 이롭겠지?
이제 그냥 엄마로 부르기로 하자.
아무튼,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친! X나 이뻐! 와! 미쳤다!
우리 엄마는 웬만한 여자 아이돌 그룹에서 확신의 센터 상을 차지하고도 남을 만큼 예뻤다.
자, 그럼 이제 아빠를 확인해 보자.
됐어, 됐다! 돌았네, 이거?
우리 아빠는 웬만한 남자 아이돌 그룹에서 비주얼 탑을 차지하고도 남을 만큼 잘생겼다.
두 사람 다 얼굴에서 광채가 넘쳐흘렀다.
어머니, 아버지, 소녀 오늘부터 부모님께 입덕하겠나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못생겼다는데, 우리 딸은 왜 이렇게 예쁜 거지?”
엄마가 나를 보물 보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쁜 엄마 닮아서 그렇지.”
나는 엄마를 닮은 건가? 너무 좋다.
“콧대는 아빠 닮은 것 같아.”
아빠의 콧날은 베일 것처럼 날렵했다. 좋다, 딱 좋다.
“눈은 엄마 닮았네.”
아몬드형 눈매에 기다란 속눈썹이 아름다운 어머니의 눈매를 닮았다면 저는 절세미인이겠군요?
나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흐뭇해졌다.
“우리 애 천잰가 봐요! 말귀 다 알아듣고 내 얼굴이랑 당신 얼굴 번갈아 보는 것 같지 않아요?”
내가 똘똘하단 소리는 좀 들었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그 똘똘함으로 보육원 비리를 파헤치려다가 열다섯의 나이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어, 우리 딸 천재 맞나 봐.”
아빠가 엄마의 뺨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와! 잘생긴 아빠가 예쁜 엄마한테 입 맞추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다 훈훈해진다.
“내가 잘할게.”
게다가 아빠는 엄마에게 고마워 죽으려고 한다.
내가 그만큼 예쁘다는 거지?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엄마도 만만치 않게 아빠를 아끼는 듯했다.
두 사람은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예쁘게 입을 맞췄다.
왠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엄마 젖을 더욱 힘차게 빨아 넘길 뿐이었다.
***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천재는 아니지만, 눈치가 빠르고 똘똘했던 나는 현실을 빨리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의 중학교 2학년, 나름 학교 공부도 잘했던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구운몽’이었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구운몽에서 주인공 성진은 ‘양소유’라는 이름으로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태어날 때만 해도 전생의 기억이 있던 양소유는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 속에 자라면서 잠시 전생의 기억을 잊게 된다.
그렇다면 나도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 지금의 기억을 잊게 될까?
누워서 엄마 젖을 먹고, 싸고,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갓난아이였지만, 인생을 향한 나의 고찰은 사뭇 진지했다.
“우리 딸은 커서 뭐가 되려고 이렇게 예쁠까?”
엄마가 젖을 다 먹은 나를 아빠에게 넘겨주며 중얼거렸다.
손수건을 어깨에 댄 아빠는 능숙하게 나를 안아 들고는 등을 토닥거렸다.
어머니, 저는 부자가 되고 싶어요!
안타깝게도 나는 재벌 집에서 태어나는 기염을 토해 내지는 못했다.
아니, 보통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변방 귀족이나, 버림받은 왕족, 혹은 비운의 재벌 2세가 국룰 아닌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에 처음 들어올 때, 속싸개에 꽁꽁 둘러싸여 있던 탓에 집의 외관이나 내부를 잘 살피지는 못했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침실은 몹시도 평범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떡하죠? 수도관이 오래돼서 그런지, 부엌에 물난리가 났어요.”
침실 문 앞에 선 어떤 아주머니께서 난감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래된 수도관이 터졌다는 말에 아빠는 안고 있던 나를 엄마에게 넘겨주고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응? 우리 아가 표정이 왜 이럴까? 어디 불편해요?”
엄마가 내 기저귀를 살피며 물었다.
“여긴 아니네.”
어머니, 제 기저귀가 젖은 게 아니라, 부엌에 물난리가 났다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왜 이렇게 해맑으시죠?
아무래도 예쁜 우리 엄마는 철이 조금 없는 것 같다.
이윽고 내가 잠들락 말락 할 때, 아빠가 침실로 돌아왔다.
“큰일이네. 부엌 공사를 해야 할 것 같아. 하필 이런 때…….”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원래 돈이 많이 들어가는 법이다.
그리고 아이를 키울 때는 돈이 더 많이 들어간다.
이전 생에서 나는 금전적 이유로 버려졌다.
부모는 다시 찾으러 올 것처럼 나를 보육원에 맡겼지만, 끝내 나에 대한 친권을 포기해 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한, 부모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경우는 대부분이 돈 문제였다.
안타깝게도 지금도 그런 것 같고.
“공사가 필요하면 해야죠. 그런데 지금 부엌이 서후 씨 어머님께서 쓰시던 그대로인 거 맞죠?”
엄마가 애틋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아버지가 직접 공사하셨으니까.”
아빠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럼, 아버님이 만드시고, 어머님이 쓰시던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공사하는 거로 해요.”
“새로 싹 고치고 싶지 않아?”
착한 우리 엄마, 철이 없는 건 줄 알았더니 착한 거였나?
새로 인테리어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 것이다.
결국, 돈 문제일 텐데, 엄마는 아빠의 추억을 끌어와서 부드럽게 설득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색이 바랜 원목 싱크대가 너무 좋아요. 나는 그거 계속 쓰고 싶어.”
나를 버렸던 부모와 다른 점이 있다면, 두 사람은 돈 문제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데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나까지 울컥해졌다.
“으응애애!”
그래서 울고 말았다.
어머니, 아버지. 소녀가 분위기를 깨서 죄송합니다.
아직 어려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아서 그러하오니 부디 용서를……!
아빠가 한쪽 팔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근데 아까 엄마가 아빠를 뭐라고 불렀더라? 서후 씨?
서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빠가 등을 토닥거리는 느릿한 박자에 눈이 감겼다.
서후, 내가 아는 이름인데……. 분명히…….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엄마가 나를 내려다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공주님! 목욕해야죠?”
지난 삶에서 나는 단 한 번도 공주님이라 불렸던 적이 없었다.
후원 기업의 빵빵한 지원을 받는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돈이 부모를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엄마는 부드러운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 아기 욕조에 나를 조심스럽게 담갔다.
엄마, 고마워요. 없는 형편에 날 이렇게 정성 들여 키워 준 거 절대 잊지 않을게요.
“으으응.”
긴말을 옹알이로 대신한 순간,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목욕은 같이 시키자니까. 손목 상해!”
아빠가 얼른 엄마 옆으로 쪼그려 앉으며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받쳤다.
“내가 혼자 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딸이랑 오붓하게 보낼 시간이 없네.”
새침하게 웃는 엄마의 뺨에 아빠가 또다시 입을 맞췄다.
사이좋은 부모 아래서 자랄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부엌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해요?”
“당장 내일 사람이 오기로 했어.”
비록 부유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처가에 가 있는 게 어때? 공사하는 동안 시끄러울 텐데. 장모님이랑 장인어른도 애 잠들었을 때만 보고 가셨잖아. 당신 몸조리도 더 하고.”
아빠의 제안에 엄마의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서후 씨도 같이 가면 갈래요. 나 혼자는 가기 싫은데.”
귀여워! 우리 엄마, 귀여워!
엄마, 몇 살이에요?
엄마는 이름이 뭐예요?
나는 본격적으로 엄마를 향한 덕질을 하고 싶어졌다!
“마침 도곡동 어르신께서 애 백일까지는 할머니랑 함께 지내 주신다고 하시니까.”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같이 살아야 하는 증조할머니도 있나 보다!
“당연히 나도 같이 가야지. 내가 어떻게 당신을 혼자 보내.”
아빠가 세상 듬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엄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우리 민서후, 누구 남편인지 참 바람직해!”
엄마가 아빠의 뺨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머릿속에서 섬광이 일었다.
민서후?
그…… 민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