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68화
“저기, 처제랑 선준이 아냐?”
출산을 앞두고 오랜만에 처가에 방문하는 길이었다.
처가 대문 앞에 익숙한 실루엣의 두 남녀가 서 있었다.
“분위기 묘하네?”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잠깐 저 앞에 차 좀 세워 봐요.”
아내의 말이라면 거역하는 법이 없는 나는 두 사람이 마주 선 곳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뭐 해?”
그녀의 물음에 처제와 선준이 흠칫 놀란 얼굴로 우리 차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운전석에서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만삭인 아내는 내 손을 잡고 조심조심 차에서 내렸다.
“어, 언니 왔어?”
“추운데 여기서 뭐 해? 집에 안 들어가고. 근데 옆엔 누구야?”
그녀의 물음에 선준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은이 친구 문선준입니다. 예전에 한 번 인사드렸던 것 같기도 한데…….”
“너 왜 그래. 우리 언니 결혼식도 왔었잖아.”
처제가 선준에게 어색하게 굴지 말라는 듯이 나무랐다.
“아, 그랬었지.”
선준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그날 이후, 선준은 우리를 찾지 않았다.
아마도 저승과 이승을 가르는 배를 직접 움직였던 선준은 우리와 그 모든 기억을 잊은 듯했다.
“반가워요, 처제 친구. 잘생겼다.”
나는 선준에게 살가운 인사를 하며 알은체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정담은 책임지라고 울며불며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같이 들어가요. 저녁 먹고 가.”
그녀가 선준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냐, 언니. 선준이 집에 가야 해. 선준이 엄마가 기다리셔. 얘 내일 군대 가거든.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야지.”
아이구, 딱해라!
저 녀석이 기억하지 못할 뿐, 선준은 군대를 두 번 가는 거였다.
“날이 점점 풀려서 다행이긴 한데, 군대는 이상하게 더 추워. 처제가 친구 잘 챙겨 줘야겠다.”
순간 처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제가 뭐 특별히 챙길 게 있을까요. 친구 군대 가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선준이 택시 타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나와 그녀는 선준에게 눈인사하고는 도로 차에 올랐다.
차고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 그녀는 차 뒤편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쟤가 이제는 내 비서로 일한다고 하지는 않겠죠? 진짜 일 잘하는 비서였는데……. 착하고, 듬직하고.”
룸미러를 흘끗 보니, 선준이 우는 처제를 달래 주고 있었다.
“비서는 안 될 것 같으면, 제부로는 어때?”
“선준이가요? 우리 여은이를요?”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착하고 듬직하다며? 돌아와서도 너 찾아와서 챙긴 거 보면, 책임감도 있잖아.”
조수석 시트에 몸을 기대앉은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근데 쟤 군대 두 번 가는 거 모르나 봐요. 안쓰러워라.”
동시에 안타까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듯 세상이 평온해지고 있었다.
-작년 봄 음주 운전 뺑소니 사고로 협력업체 대표를 숨지게 한 백헌전자 대표의 아들 강재만 씨가 이번에는 살인 교사 혐의로 검찰이 추가 기소했습니다……. 강 씨는 뺑소니 사고로 복역 중인 상태에서 내연녀의 살인을 교사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라디오 저녁 뉴스에서는 강재만에 관한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주 운전으로 사람을 죽인 것도 모자라서, 내연녀를 살해하려고 일을 꾸몄다가 이제야 덜미를 잡힌 것이다.
할머니는 그가 평생 벌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죗값을 전부 치르기 전에는 쉽게 죽을 수도 없을 것이며, 죽더라도 사후가 평탄치 않을 거라고.
“오늘은 엄마가 서후 씨 좋아하는 도미찜 해 놨대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다른 세상에서 떠드는 소리인 듯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사위 보고 나서 요리에 취미를 붙일 줄은 몰랐어.”
그러고는 약간은 질투가 난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나는 내 아내가 만삭이 되어서도 이렇게 예쁠 줄 몰랐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조수석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발그레한 뺨에 보드랍게 입을 맞추자, 작은 손이 얼굴을 덥석 잡는다.
입술이 속절없이 빨려들어 갔다. 매끄러운 입안을 헤집을 때마다, 그녀의 가쁜 숨결이 뺨 위에서 부서졌다.
숨결이 아슬아슬하게 섞이는 곳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우리 저녁만 먹고 빨리 집에 가요.”
임신 초기를 지난 이후로 우리는 서로를 아낌없이 안았다.
“아빠랑 더 가까이에서 인사하고 싶대, 오늘은.”
야릇한 말을 건네는 아내는 여전히 사람 미치게 할 만큼 관능적이다.
***
“후우, 이제, 후우, 조금, 후우, 괜찮아요!”
그녀는 가족 분만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숨을 골랐다.
커다란 짐볼에 앉았다가, 벽을 잡고 진통했다가, 다시 숨을 골랐다가, 침대 헤드를 잡고 진통했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 내 손 잡고 있어. 놓지 말고.”
“으응.”
아침 8시에 병원에 도착했으니, 그녀는 꼬박 6시간째 진통 중이었다.
진통 간격이 좁혀지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어서 아이를 맞이하고 싶다며, 그녀는 출산 교실에서 가르쳐 준 대로 착실하게 움직였다.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죠?”
“당연하지. 내가 어딜 가.”
“으응.”
이미 여러번 했던 질문을 또 하는 것을 보니, 아내도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흐읏.”
내내 서 있던 그녀가 내 손을 꽉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나, 이제 누울게요.”
“그래. 눕자, 이제.”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아내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가 대신 아플 수 있으면 좋겠다.”
진땀을 흘리며 진통을 견뎌 내는 아내를 위해 손을 잡아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괜찮, 아요. 애 낳고, 나면, 내가, 서후 씨, 괴롭혀, 줄 거야.”
그녀는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남편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한 예쁜 배려라는 것을 내가 모를 리가 있나.
“응, 맘껏 괴롭혀도 돼. 얼마든지.”
제 살과 피를 내어 주어 소중한 아이를 낳고 있는 아내가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에 애가 깨면 내가 다 볼게. 기저귀도 내가 다 갈아 주고. 이유식도 전부 내가 만들게. 젖이 안 나와서 수유는 못 하겠네, 내가.”
고통 속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나 상상했어! 그런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요.”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나무랐다.
“진짜 둘째는 꿈도 꾸지 말아야겠어. 이렇게 아픈 걸 또 어떻게 해. 차라리 둘째를 낳을 거면 내가 낳아야지.”
“그만!”
그녀가 조용히 하라며 미간을 팍 구겼다.
“그것도 상상했어! 제발 그만!”
나의 진심을 그녀는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가, 빨리 나와라. 엄마 너무 힘들다.”
예쁜 얼굴이 진통으로 일그러질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이제 숨을 고르는 시간보다, 쉴 새 없이 아파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어졌다.
“분만 준비할게요!”
가족분만실 안으로 의료진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제 힘만 주면 나오겠어요! 엄마, 준비됐죠?”
그녀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이가, 이제 곧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아빠, 정신 차리시고! 엄마 도와주세요!”
넋 나간 예비 아빠를 많이 보았다는 듯이 수간호사가 나를 타일렀다.
뒤에서 포옹하듯 아내의 몸을 받쳐 안았다.
그녀는 내 가슴에 뒷머리를 기대고, 무릎을 움켜잡은 채로 힘을 주었다.
“머리 보인다!”
아이의 머리가 보인다는 말에 나는 아내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다 왔어, 담은아. 조금만 더 힘내.”
새빨갛게 물든 얼굴이 땀에 흠씬 젖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달라붙어서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경외심이 일만큼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움이었다.
“흐으읏!”
비명을 삼키듯 내뱉은 신음 끝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아내의 몸이 축 처졌다.
“잘했어. 고생했어, 담은아.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아내를 품에 안고 젖은 뺨에 쉼 없이 입을 맞췄다.
“예쁜 공주님이네요!”
간호사가 아이를 안아서 아내의 품에 안겨 주었다.
아이는 눈을 감은 채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을 물었다.
꼬물꼬물 입을 움직이다가 힘차게 젖을 빠는 모습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서후 씨, 울어요?”
“아, 아니…….”
그녀가 연하게 웃으며 아이를 향해 말했다.
“아가, 아빠가 울어. 널 만나서 감격스러운가 봐.”
“우리 딸, 엄마 아빠한테 와 줘서 고마워.”
나는 격한 감정을 토해 내며 아내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어? 우리 아가 눈 떴다.”
조가비 같은 눈꺼풀이 벌어지고, 새까만 눈동자가 나타났다.
엄마, 아빠에게 첫인사를 건네는 아이의 눈빛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못생겼다는데, 우리 딸은 왜 이렇게 예쁜 거지?”
그녀가 아이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예쁜 엄마 닮아서 그렇지.”
“콧대는 아빠 닮은 것 같아.”
“눈은 엄마 닮았네.”
아이가 마치 제 얼굴을 가늠하듯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애 천잰가 봐요! 말귀 다 알아듣고 내 얼굴이랑 당신 얼굴 번갈아 보는 것 같지 않아요?”
갓난아이가 초점을 맞추고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온전한 시력을 갖췄을 리가 없다.
하지만 출산의 기쁨에 사로잡힌 나와 아내에게 그런 생물학적 지식 따위는 소용이 없었다.
“어, 우리 딸 천재 맞나 봐.”
의료진이 왔다 갔다 하거나 말거나, 아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족이 생겼다.
할머니를 모실 때와는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겪은 믿기 힘든 일들보다, 더 신비로운 가족의 탄생이었다.
“내가 잘할게.”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입술을 맞댄 채로 조용히 사랑을 속삭였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행복이 움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