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67화
날이 저물고, 선준이 도곡동 어르신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굿을 준비하신 탓에 피곤하신지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오늘 밤을 조심해야 한다는 할머니 말씀을 주워섬기듯 나와 그녀도 평소보다 일찍 침대에 마주 누웠다.
“괜찮아?”
아직 임신 초기였다. 조심해야 할 일이 많은 시기였다.
“괜찮아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요. 너무 편안해서 이상할 정도로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며 웃었다.
“몸은?”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요.”
그녀가 예쁘게 웃으며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아까 도곡동 할아버지가 저한테만 몰래 말씀해 주셨어요.”
“뭘?”
그 노인네가 또 무슨 소리를 지껄였을까, 싶어서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찌푸린 미간에 그녀의 고운 손길이 닿았다.
“어허. 오늘 밤을 무사히 잘 보내야 한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을텐데요?”
나는 눈썹을 가로로 늘리며 미간을 쭉 폈다.
그러자 그녀가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한 녀석이 나올 거래요. 천하를 호령할 제왕이 될 아이가 내 배 속에 있대요.”
입꼬리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말 들으니까, 서후 씨도 기분이 좋기는 한가 봐요? 굿이니, 뭐니 안 믿는 것처럼 말해 놓고선?”
나는 그녀의 작은 몸을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좋은 말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게 당연하지. 그동안 워낙 그 어르신한테 안 좋은 소리만 들어서.”
“나 궁금한 게 있어요.”
그녀가 품 안에서 고개를 바짝 쳐들며 말했다.
“뭔데?”
“할머니께서 저한테 하신 말씀은 다 알아들었거든요. 그리고 중간에 도곡동 할아버지가 설명해 주시기도 했고요. 근데 서후 씨한테 시간이 멈췄다고 한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나는 그녀의 목을 받치고 있는 왼팔로 마른 등을 바짝 끌어안고는 오른팔을 협탁 쪽으로 뻗었다.
“이거.”
“서후 씨 손목시계?”
“응.”
“내가 예물로 선물한 시계도 안 하고, 맨날 이것만 차더니……. 무슨 사연이 있는 거예요?”
한숨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
“아버지 유품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매일 이걸 차고 다녔어. 너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안타까워서, 아버지의 잃어버린 시간을 내가 보상하고 싶었나 봐.”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이 그녀의 곁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그런데 시계가 고장이 나 버렸어. 아마 내가 요절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즈음인 것 같아.”
“다시 고친 거예요? 지금은 멀쩡하게 잘 가네.”
품에 안긴 그녀가 시계 페이스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러고는 스스로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시계 장인도 여럿 찾아가고, 이 시계를 만든 브랜드에 의뢰해서 본사까지 보냈었는데도 고치지 못했었어. 그런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끝을 따라 했다.
“그런데?”
“정담은이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붙잡았던 날, 그때부터 다시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녀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슬쩍 벌렸다.
“……아! 나 기억나요! 서후 씨가 시간이 맞지 않는 시계를 차고 있어서, 왜 그런지 궁금했었어!”
그녀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으려고 했다.
“진정해.”
나는 그녀의 몸을 당겨 안아서 다시 품 안에 가둬 버렸다.
“아까 할머니께서 그러셨잖아요. 서후 씨 시곗바늘이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일 거라고요!”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다! 시곗바늘이 멈추지 않는다는 건, 서후 씨의 시간이 계속 흘러간다는 거잖아요. 멈추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거란 이야기를 그녀가 에둘러 했다.
그녀가 판판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울먹거렸다.
“이제 된 것 같아요.”
작은 손이 등허리를 조심스럽게 토닥여 주었다.
“잠들기 겁나지는 않아?”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우리 관계를 잊을 리가 있을까요?”
두려움을 숨기려는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고여 있었다.
“그래도 만약에……. 내가 우리 결혼을 잊는다면요. 그래도 나는 서후 씨를 좋아하는 상태일 테니까요. 나는 그 사람하고 엮이기 전부터 서후 씨를 좋아했잖아요.”
천천히 말을 곱씹듯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잠기운이 가득했다.
임신 초기여서 잠이 많아진 데다가 오늘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분주히 움직였으니 고단할 만도 하다.
“서후 씨, 만약 내가 기억을 못 하면, 나랑 처음 연애하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대해 줘요.”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조금 어려 있었다.
“응, 그럴게.”
그녀의 눈꺼풀이 사르륵 내려앉았다.
앞머리가 흐트러진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매끈한 콧잔등과 눈꺼풀에도 입술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잘자요.”
“그래, 잘자.”
“사랑해요.”
“응, 나도 사랑해.”
눈을 감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내가 우리를 잊더라도, 나는 서후 씨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예쁜 말만 골라서 내뱉는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내리눌렀다.
소란하지 않은 밤이 고요히 지나가기를 바라며.
***
고단한 탓에 일찍 잠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일찍 눈을 뜨고 말았다.
새벽 6시, 늦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다가오면서 해는 더욱 일찍 떠올랐다.
이미 새로운 아침이 왔음에도 아내는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예쁜 입가에는 연한 미소가 걸려있다.
깨워서 그녀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 반, 곤하게 재우고 싶은 마음 반.
이마 위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넘겨주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붉게 마른 입술에 입을 맞추는 일도 조심스러워진다.
1시간이 넘도록 그녀의 잠든 얼굴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물을 수 없는 상태, 무방비한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은 평온하면서도 초조했다.
잠잠하던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반쯤 뜬 그녀가 나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으응?”
어떤 의미의 앓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어?”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왜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보는 건데?
잘 잤어? 라고 물어야 할지, 잘 잤어요? 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민서후 본부장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동자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네, 제가 민서후…….”
“오늘 아침도 내 남편, 민서후 본부장님은 엄청나게 잘생겼네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깜찍한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너 진짜!”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심장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잖아!”
“큰일이네. 그럼 내가 너덜너덜한 심장 얼른 이어 붙여 줘야겠다.”
그녀의 입술이 내 뺨에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지체 없이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으응.”
그녀의 몸 위를 타고 오를 수는 없어서, 가느다란 몸을 가까이 당겨 안았다.
평온한 밤을 보낸 그녀는 아침을 소란하게 하고 싶은 모양인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등허리가 매트리스에 닿는가, 싶더니 그녀가 말랑말랑한 몸으로 위에서 내리 누르듯 했다.
“언제 일어났어요?”
그녀가 입술을 붙인 채로 속삭였다.
오동통한 아랫입술을 쭉 빨아당기고는 대답했다.
“1시간쯤 됐나.”
“그럼, 깨우지 그랬어요.”
그녀 역시 내 입술을 물고 당겼다.
“너무 곤히 자서.”
입술을 물린 채로 어설프게 대꾸했다.
“겁이 났던 건 아니고?”
장난스러운 물음에 약이 바짝 올라서 그녀의 등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겁은 무슨.”
“내가 우리를 잊었을까 봐, 겁나서 못 깨운 거 아녜요?”
나는 여유롭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랑말랑한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만약 잊어버렸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 주려고 했지.”
“어떤 것부터?”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요염하게 흘러나왔다.
“이런 것부터.”
조잘거리는 입안을 매끄럽게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혀를 휘감아 빨며, 그녀의 뒷머리를 내리누르듯이 했다.
“으음.”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을 더욱 크게 벌리고 다가왔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매혹은 짙어졌다. 불꽃이 만개하듯 몸이 달아올랐다.
“하아.”
그녀가 입술을 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겁이 나는 게 하나 있기는 해.”
멀어지려는 입술을 다시 머금으려 다가가며 속삭였다.
“그게 뭔데요?”
입을 맞출 수 없도록 그녀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들고는 물었다.
남편이 겁이 난다고 해서, 잔뜩 걱정하는 얼굴이다.
“앞으로 많이 참아야 하니까.”
“뭘?”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얇은 실크 잠옷 위로 말랑말랑한 살갗을 어루만졌다.
지난 며칠, 굿이니 악기니 시끄러웠던 탓에 오붓이 분위기를 잡을 겨를도 없었다.
“초기에만 조심하면 된다고 했어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초기가 언제까진데?”
“글쎄요. 한 4개월?”
한숨을 집어삼키자, 그녀가 새삼 어른스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이런 데서 어리광을 부리면, 내 마음이 약해진다고요.”
“마음이 약해져도 어쩔 수 없지. 아기를 놀라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아쉬운 듯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우리 아기는 대단한 녀석이니까, 아마 금방 아빠를 받아들일 거예요.”
임신한 몸으로 야한 말을 깜찍하게 내뱉는 아내는 무한히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