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66화

그녀가 까맣게 젖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심장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할머니, 이건 없었던 일로 하죠.”

강재만의 악기와 얽힌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와 아내가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한 것은 강재만과 얽힌 이후이니, 그녀는 나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 날들을.

서로의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며 마음을 확인했던 시간을.

웨딩 로드에서 서서 서로를 평생의 반려로 맞이하던 순간을.

뜨겁고도 다정했던 수많은 밤을.

그녀는 모조리 잊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그렇게는 못 해요. 그만 내려가죠. 문선준. 너도 집으로 돌아가, 이제.”

“본부장님.”

선준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담은이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이해하겠는데, 너는 그럴 자격이 없지. 네가 나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고 해서, 너랑 나 사이에 특별히 문제 될 게 있나? 너는 지금 네 가족과 네 안위만 걱정하는 거잖아.”

선준이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내려가자. 더는 할 이야기 없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1층으로 내려왔다.

한때 할머니의 무업(巫業)을 부끄러워했었다.

부모도 없는데, 부채와 방울을 들고 무서운 소리를 해 대는 할머니가 계신 집에 친구조차 데려오지 못했다.

철이 들고 나서는 당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고달픈 일을 해서 나를 키워 준 할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기억을 잃어 가시는 할머니가 안타까웠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 곁을 충실하게 지키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삶의 모든 조건이 원망스러운 날이 없다.

“서후 씨.”

침실에 들어서자, 그녀가 애원하듯 내 손을 붙들었다.

“안 된다고.”

나는 짧게 읊조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 알기나 해?”

할머니가 나에 대한 기억을 잃을 때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듯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잊는다는 게 얼마나 더 끔찍한 일인지 알아?”

인간이 앓는 질병 중에서도 치매는 가장 극악무도했다.

평생을 쓸모없이 만드는 마음 아픈 병이었다.

“서후 씨를 살릴 수 있잖아요.”

그녀가 납작한 배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그럼 뭐 해? 너는 날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뜨거운 물기가 울컥 치밀었다.

“신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지? 나는 안 믿어!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는데! 만약 신이 있다면 일을 이따위로 엿같이 꼬지는 않았겠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할머니께서 그러셨죠?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고. 그 말씀은……. 기억을 잃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인 거죠?”

“굿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이상해! 그게 말이 돼? 무속은 기복 신앙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럼,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건 말이 되고요?”

말문이 턱 막혔다.

눈앞에 있는 정담은은 진짜인데,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일은 의문투성이였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어요.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녀가 내 손을 끌어다가 그녀의 말랑말랑한 아랫배 위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내 배 속에 우리 아이가 있잖아요. 나는 절대 내 아이와 내 아이의 아빠를 잊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그녀가 손을 뻗어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난 절대 서후 씨 안 잊어요. 내가 고른 내 남편을 어떻게 잊어요? 내가 얼마나 쫓아다녔는데요. 서후 씨랑 결혼하려고,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차갑게 굳었던 마음이 슬슬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절대로 이 여자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나는 그녀의 뜻에 따르며 살아가리란 것을 말이다.

그녀가 나를 완전히 잊는다고 할지라도.

***

예전에는 할머니가 굿을 한다고 하면, 외따로 지어 놓은 굿당으로 향하곤 하셨다.

굿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많이 모여들었고, 1박 2일을 꼬박 매달려야 하는 새남굿의 경우에는 할머니와 인연이 있는 승려가 함께하기도 했었다.

“오늘은 이 제자가 혼자 나서려고 하네.”

2층에 할머니와 나, 아내와 선준, 그리고 만약에 대비해 도곡동 어르신이 함께했다.

할머니의 손에는 언젠가 그녀가 말했던 방울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할머니는 간소하게 차려 놓은 굿상 앞에 서서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칠성이 하날에 닿고,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곳에 귀를 기울이니!”

굵직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2층을 쩌렁쩌렁 울렸다.

강재만의 악기를 떨치기 위한 망자 천도굿을 행하는 할머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죄인 다스리는 소리 육칠월 악마구리 우는 소리느라!”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할머니를 응시하고 있었고, 선준도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줄 무지개 서거늘 그를 타고 가 건너가서 무장승을 보니!”

할머니는 치매를 앓기 시작한 이후로 체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저러다 쓰러지시는 것은 아닐까, 걱정 될 정도로 할머니는 오늘 일에 공을 들이고 계셨다.

굿상을 바라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그녀를 향해 대뜸 돌아섰다.

“바다 위에 홀로 배를 띄우고 예까지 무사히 잘 왔구나. 착한 것이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가, 억울하게 갔다고 할머니가 가엽게 여기셨거늘. 돌아와도 네 뜻을 반기는 이가 없었으니!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육신이 혼동하여 깜빡깜빡 쓰러졌을 테지!”

그녀가 약간은 놀란 듯한 얼굴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도곡동 어르신이 아내를 보며 물었다.

“꼭 방전되는 것처럼 자주 쓰러졌었나?”

“네, 이 사람하고 결혼하기 전에요.”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젊은 육신을 찾아는 왔지만, 자네 뜻을 반기는 이가 없으니……. 여기 있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게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빈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었어?”

미안하다는 듯이 연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꼭 잡은 낭군 손을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게다. 자네의 순한 기쁨을 빌어 주던 낭군의 뜻으로 여기 계속 머물 수 있게 되었으니. 낭군이 고집이 세고, 어리광을 부려도 자네가 고운 심성으로 받아 주시게.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지 못해서 그래. 그래도 책임감 있고, 믿음직한 낭군을 얻었구먼.”

그녀는 ‘낭군이 고집이 세고, 어리광을 부린다’는 부분에서 연하게 웃었다.

그러다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지 못해서 그런다는 말에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하얀 종이로 만든 종이꽃인 무화(巫花)를 나와 그녀 사이에 놓으셨다.

“그리고 자네는…….”

할머니는 손주인 나를 생판 모르는 타인 보듯이 내려다보셨다.

“멈췄던 생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구먼.”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닌 가련한 팔자였거늘.”

혀를 끌끌 차시며 고개를 내저으시던 할머니가 내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셨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유품인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앞으로 자네 시곗바늘은 멈추지 않고 움직일 걸세.”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져서 아버지의 유품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쭉 이 시계를 차고 다녔었다.

시계가 고장 난 후로도 계속.

그러다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가 나에게 처음 고백했던 날이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선준에게로 향했다.

“자네는 윗사람을 잘 섬겨서, 그 공덕으로 예까지 딸려 왔구먼?”

도곡동 어르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튼 생각을 하는 이였으면, 금세 화를 입었겠으나……. 성정이 올곧고, 본심이 선하여, 부모부터 위했으니……. 하늘이 감복하여 자네를 여기 둔 것이지. 자네 부친은 극락왕생하실 터이니, 무거운 마음은 떨치시게. 아비의 죽음이 자네 탓은 아니지 않은가?”

할머니 말씀에 선준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자, 일어나시게.”

울음을 참는 선준을 할머니가 일으켜 세웠다.

할머니와 도곡동 어르신이 하얀 삼베 천을 길게 펼쳤다.

천의 한쪽 가장자리에 흰 종이로 만든 배가 올려졌다.

선준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길게 펼쳐진 삼베 천 위로 배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천이 이쪽과 저쪽,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배를 타고 망자가 천도함을 의미하는 의식이었다.

“그자는 극락왕생할 수는 없을 게다. 여기 남은 육신으로 죄닦음을 위해 평생 벌을 받아야 할 게야.”

인자한 목소리를 내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평생을 함께 살아왔지만, 지금처럼 평온한 할머니의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일생의 과업을 내려놓은 할머니는 이제야 후련해졌다는 듯이 온화하게 웃었다.

굿이 모두 끝나고, 우리는 할머니가 직접 차려 주신 밥상 앞에 앉았다.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마법봉이라도 휘두르고, 악당을 물리치는 줄 알았나?”

선준의 시무룩한 발언에 도곡동 어르신이 핀잔을 주었다.

“괜찮아?”

내 물음에 그녀는 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음기(陰氣)가 세지고, 귀기(鬼氣)가 횡행하는 밤을 조심해야 할 게다.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 육신을 정제한 뒤 잠자리에 들 거라.”

할머니께서 다정하지만 엄정하게 말씀하셨고, 성격이 가장 급한 선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이 되면요……. 제가 모든 걸 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까불까불하는 녀석이 총명하기는 해서 말귀는 잘 알아듣는구나.”

*발췌문헌: 서울 새우젖집본 – 바리공주전집1, 홍태한, 민속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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