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65화
“어머니께서 아슬아슬하신 건 저도 짐작할 수 있는 거고요. 민서후 본부장이 죽는다고 한 건 의외여서요.”
문선준은 예전에도 말을 제법 잘하는 놈이었다.
“근데 말이야. 너 좀 모자라?”
비틀거리며 문선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까지 위험하다는데……. 동요를 안 하네? 감정이란 게 없어?”
“처음 보는 어른 앞에서 제 감정을 드러낼 이유는 없으니까요.”
자꾸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놈 때문에 울화가 치밀었다.
“똑똑한 건지, 허세가 잔뜩 낀 건지. 아니면.”
“아니면요?”
“뭘 아는 건지……. 헷갈리네?”
비척거리다가 소파 테이블에 주저앉았다.
“미래를 보는 내 밑에서 일하면 뭘 가장 하고 싶어?”
“돈이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그래, 돈. 많이 벌게 해 줄게. 근데 네 어머니는 못 살려 줘. 내년에 죽어. 사람 목숨은 어떻게 안 되더라고. 너희 아버지도 내가 이번에는 죽일 생각이 없었거든? 근데 내가 취해서 그만…… 너네 아버지 차랑 부딪쳐 버렸네?”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쏘아보는 문선준을 마주했다.
“나도 어차피 죽어. 내 아들 낳았다는 년 있지? 그년이 내 뒤통수를 때리더라고. 나아쁜 년. 그 아들놈도 내 아들이 아니었지 뭐야? 나중에 전립선암 진단 내린 의사가 그러더라? 무정자증이라고.”
문선준이 상체를 꼿꼿이 세우며 앉았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시려나.
“정담은 대표님이 불임 판정을 받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것도 네놈 수작이었어? 대표님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는지 알아?”
결국 버럭 내지르며 폭발하는 놈의 기세를 마주한 나는 비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역시. 너는 다 알고 있었어. 문선준 실장, 그렇지? 아니, 그년이 얼마나 도도하게 구는지. 그년만 보면 내가 주눅이 들어서 꼴리지가 않는 걸 어째?”
“닥쳐, 미친놈아!”
“내 애를 뱄다는 년은 내가 딴 년이랑 결혼한다고 징징거리지. 내가 또 순정은 있는 놈이거든? 사랑 없이 어떻게 여자를 안겠어?”
“사랑 없이는 여자를 안지도 못하는 새끼가 사람을 그렇게 죽였어?”
“나도 지긋지긋해. 돈맛에 그런 짓 했지. 이제 돈도 없는데 왜 그러고 살아? 내가 순정만 있는 게 아니라, 자존심도 좀 있거든. 어디서 기름 냄새 안 나?”
잃을 게 없었다. 차라리 다 뒈지라지?
“바닥이 좀 미끄럽지 않아? 운동화 바닥에 뭐 달라붙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수작이야?”
“혹시 담배는 아직 안 배웠어? 한 대 피울래?”
“이 미친놈이!”
문선준이 요란하게 달려들었다. 몸이 소파 테이블 뒤로 거칠게 넘어갔다.
***
전화가 뚝 끊겨 버렸다.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전화가 끊긴 것 같아요! 선준이 어떡해요!”
“진정해. 방금 보안팀한테 들어가라고 메시지 보냈어.”
아내를 달래기는 했지만, 불안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
등 뒤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방문이 열렸는지, 기척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
“할머니…….”
꼿꼿이 서 있는 할머니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했다.
“그 아이, 무사할 게다. 여기로 데려오려무나.”
할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고는 돌아섰다.
내가 움직이려고 하자, 그녀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안 갈게. 보안팀한테 이쪽으로 데리고 오라고 할게.”
그녀는 일면 안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안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선준이 집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 무렵이었다.
강재만은 선준의 작은아버지와 함께 출동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선준은 경찰서까지 동행했다고.
“야, 문선준!”
그녀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선준에게 다가섰다.
“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왜 그렇게 생각이 없어! 강재만이 연락을 했으면, 나한테 먼저 알렸어야지!”
“죄송해요.”
“아까 그 미친놈이 라이터에 불이라도 붙였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너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그녀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선준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대표님. 그래도 무사히 잘 살아 돌아왔잖아요.”
“너 내 남편한테 고맙다고 해, 이 멍청아! 이 대책 없는 놈아!”
다 좋은데, 둘이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이 거슬렸다.
“알겠으니까. 둘이 이것 좀 놓고 말하지? 마당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두 사람은 마당 한가운데 서서 울부짖은 게 민망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한 여자는 씩씩거리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고, 한 남자는 애틋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선준. 너 잘한 거 하나도 없어. 눈 깔아.”
저 녀석이 철없이 굴었던 것보다 아내를 소중하게 바라보는 게 더 짜증 났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다 모인 게로구나. 어서들 들어오너라.”
할머니가 흰색 개량 한복을 입고 현관 앞에 서 계셨다.
세 사람은 조용히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
언젠가부터 드나들 일이 없던 2층 거실에 할머니와 우리 부부, 그리고 선준이 마주 앉았다.
2층은 할머니의 법당이 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평범한 응접실처럼 보였다.
“할머니께서 도곡동 어르신을 위해 새남굿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둘러 가는 법이 없는 선준이 먼저 입을 뗐다.
“맹랑하기도 하지. 제 소개를 하기 전에 본론부터 꺼내 놓는구나.”
“제가 누군지 아시는 것 같아서요.”
할머니가 인자한 웃음을 머금으셨다.
“나는 신의 제자일 뿐, 신이 아니라네.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렇지만 자네들이 왜 여기까지 거슬러 왔는지, 내 이제 알겠네.”
그녀와 선준의 시선이 허공에서 조심스럽게 맞닿았다.
“저희가 왜 돌아왔을까요?”
나는 손을 뻗어 파르르 떨리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할미가 옛날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
“네, 어르신. 새겨듣겠습니다.”
할머니는 선준의 공손한 태도가 흡족한 모양이었다.
“옛날 옛적에 한 부부가 하늘의 뜻을 무시하고 혼례를 치렀어. 그러다 공주만 일곱을 생산했다네. 후계로 삼을 아들이 태어나지 않은 것에 분노한 아비는 일곱 번째로 태어난 공주를 옥함에 가둬서 버렸지. 석가세존이 이를 발견하고는 공주를 거둬 키웠어.”
어렸을 때 할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종종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병이 든 공주의 부모가 염치도 없이 이 공주를 찾은 게야. 일곱 번째 딸만이 부모의 병을 낫게 할 거라는 하늘의 뜻을 이번에는 믿은 게지.”
할머니가 어떤 의도로 옛날이야기를 꺼내신 것인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려고 했다.
“착한 공주는 아비를 구하기 위해서 저승으로 향한다네. 부모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려수를 구한다는 말에 무상신선(無上神仙)은 9년 동안 저승에 봉사할 것을 청하지. 공주는 지극정성으로 물을 긷고, 불을 때고, 나무를 하면서 9년을 보낸다네. 아니, 그런데 이 공주가 여자인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무상신선이 청혼을 하지 뭔가!”
“염치없는 남자네요. 9년 동안 일을 시켜 놓고선.”
선준이 읊조린 말에 할머니가 무엄하다는 듯이 얼굴을 굳혔다.
“떽!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못쓰지. 공주와 무상신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딱 일곱이었어. 공주는 일곱 아들과 낭군이 된 무상신선과 함께 약려수를 들고 부모를 찾는다네. 결국, 공주의 부모는 공주의 효성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지. 이후 그 공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상을 받고 나라를 다스렸을까요?”
그녀의 질문이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고개를 천천히 내저으셨다.
“그분은 만신(萬神)의 인위왕(人爲王)이 되셨다네. 우리 같은 이들의 몸주가 되신 게지.”
“할머니 같은 만신이 모시는 신이 되었다는 뜻이야. 우리나라 무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신이 바리공주거든. 이 이야기는 바리공주의 이야기야. 칠성장군은 바리공주의 일곱 아들이고.”
그녀는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주님께서 제일로 치는 게, 자네들은 뭔지 아는가?”
할머니의 질문에 세 사람은 대답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효심일세. 기꺼이 저를 희생하면서 부모를 살리고자 하는 효심. 자네들은 하나같이 효심이 지극한 이들이지.”
할머니의 눈빛이 순간 변화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는 할머니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게 넓게 보면 인간을 위하는 일이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저를 희생할 줄 아는 이들을 귀히 여긴다네. 내가 아까 그 공주가 무슨 일을 자처했다고 했지?”
“만신의 인위왕이요.”
“그래. 인간이 행하는 일을 위해 몸주가 되신 분이시니, 그들이 행하는 일이 선할수록 복을 내리시는 게지. 자네들은 그 복을 따라 예까지 온 것이고.”
할머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인위로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 나는 내 손으로 손주를 구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일곱 번째 딸을 버린 어비대왕 부부처럼 나는 내 자식을 저버리는 게 두려워서 신을 버렸지. 그 벌로 나도 잃었고.”
“할머니! 한 번만요. 딱 한 번만 도곡동 어르신한테 했던 걸, 저희한테도 해 주세요. 네?”
선준의 애절한 부탁에 할머니는 안타까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천도해야 할 악기(惡氣)는 자네들이 아니야. 버리지 못한 탐욕과 그에 대한 집착으로 자네들에게 들러붙은 그놈이지. 그놈 정체가 여태껏 보이지 않아서 내 찾기가 어려웠던 거야. 이제 놈을 찾았으니, 굿은 어렵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요?”
그녀가 되물었다.
“그놈의 악기를 저승으로 이끌려다가 자네들마저 딸려 갈 수도 있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선준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악기와 얽혔던 기운이 사라지고,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안 하는 편이 낫겠네요.”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낮게 속삭였다.
“내 기억과 서후 씨 목숨.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서후 씨를 선택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