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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64화

파르르 떨리는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빼 들어서, 방금 걸려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대표님, 저 지금 강재만 만나러 가야 한다고요. 나중에요.

“문선준 씨, 강재만이 뭐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했습니까?”

- 본부장님? 강재만이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어요. 부탁할 게 있다고요.

제 편을 모두 잃은 강재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잘 들어요. 전화 끊지 말고, 강재만 만나러 들어가요. 작은 아버님께는 연락했어요?”

- 아니요. 그럴 필요까지는…….

“작은 아버님 전화번호 불러 봐요. 강재만 뺑소니범이야. 알죠?”

선준은 순순히 작은아버지의 휴대전화 번호를 불러 주었다.

“강재만이 하는 말은 같이 들읍시다. 약속 장소는? 거기로 지금 바로 사람 보낼게요.”

- 강재만이 알려 준 사무실이에요. 광화문 근처 주유소 2층이요. 지금 종로구청 앞 지나가는 중이고요. 택시 안이에요.

옆에서 그녀가 절대로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가지 말라고 해요, 네? 선준이 거기 가면 위험해질 수 있어요!”

- 옆에 대표님도 계신 거죠?

“그래요. 옆에 있어요.”

-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나는 손을 뻗어서 그녀의 어깨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괜찮을 거야.”

- 대표님께 죄송하다고도 전해 주시고요. 강재만 그 자식이 만나자고 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문선준 씨, 지금 바로 들어가지 말고. 우리가 보내는 사람 도착하면 그때 들어가요. 만약을 대비해서, 응? 그렇게 할 수 있지?”

흥분해 봐야 좋을 게 없는 상황이다.

침착한 목소리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선준을 설득했다.

- 그럴게요.

문선준과 통화 중인 그녀의 전화기를 왼손에 들고, 주머니에서 내 휴대전화를 꺼냈다.

문선준 작은아버지에게 강재만과의 약속 내용과 장소를 먼저 알렸다.

“강재만 도발하려고 하지 말고. 절대 화내지 말아요. 이성적으로 굴어야 해요.”

그러고는 유사시를 대비해서 결혼 직후 정 회장으로부터 소개받았던 보안팀장에게도 연락했다.

그녀가 대학교 때까지 정 회장의 과잉보호를 받았다는 말이 사실인 듯, 오너 패밀리를 향한 보안 체계는 꽤 자세한 매뉴얼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보안팀장에게 문선준의 연락처와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보안팀은 10분 안에 목적지로 향하겠다는 답을 금방 보내 왔다.

“문선준 씨, 10분 안에 우리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할 겁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면, 10분만 시간을 끌었다가 갈 수 있겠어요?”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왔다고는 하지만, 내 눈에 선준은 혈기만 왕성한 어린 친구였다.

- 그사이에 강재만이 사라지면요? 강재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 봐야 해요! 그 자식이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아내야 한다고요!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아버지를 두 번이나 죽게 만든 놈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왔다는 건, 그만큼 강재만이 몸이 달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로써 확실해졌네요? 강재만은 지금 문선준 씨를 몰라야 정상이잖아. 안 그래요?”

- 단순히 우리 아버지의 아들로 알고 있는 거 아닐까요?

“뺑소니범이 죽은 피해자의 아들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하는 게, 상식적이진 않은 것 같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입니다만……. 사고에 대해서 떠볼 수도 있겠네요. 모른 척해요. 알겠죠?”

- 민서후 본부장님.

선준이 사뭇 진지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 이제 저랑 대표님이 한 말 전부 믿으세요?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검게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내 아내를 믿고, 문선준 씨가 한 말을 믿어요.”

그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으려 애썼다.

내 허리를 꼭 끌어안은 아내가 왼쪽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아내의 뒷머리를 손으로 감싸고는 이마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을 맞췄다.

- 고마워요. 방금 메시지 들어왔어요. 본부장님이 보낸 사람들 도착했대요.

휴대전화 너머에서 선준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 민서후 본부장님.

생경한 목소리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보안 팀원이라 소개한 남자는 간략한 경호 목적을 물어 왔다.

“지금 백헌전자 강재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정웅하고 등지고 나서, 백헌 협력업체에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 서 있는 청년은 해당 협력업체 중에서 정웅이 기업 상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투자한 기업 대표의 아드님이고요.”

- 어려움 없도록 잘 모시겠습니다.

휴대전화가 금세 선준에게로 다시 넘어갔다.

- 이제 들어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요.

교활한 인간이 만나자고 한다고 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간 놈이 어리석지 않기는.

나는 휴대전화에서 송화음 차단과 녹음 기능을 활성화하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

“실례합니다. 강재만 씨, 계신가요?”

호랑이 굴에 기어들어 오면서도 목소리가 명랑하기만 한 새끼 때문에 웃음이 났다.

“어, 문선준 씨? 반가워요. 내가 강재만이야.”

내 소개를 건네자 문선준이 상기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순해 빠진 새끼. 제 아비 죽인 뺑소니범인 줄도 모르고 여길 기어와?

“아버지 일로 힘들죠? 나도 문 사장이 그렇게 갈 줄은 몰랐어. 조문도 못 가고, 미안합니다.”

그저 우울한 표정만을 보니, 아직 내가 뺑소니범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 한심하기는.

“아닙니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내가 조의금이라도 챙겨 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거 받아요.”

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비명횡사했다. 정웅의 투자를 받았다고는 하나, 당장 수중에 돈은 없을 터.

“조의금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그래, 그래. 내가 부탁할 일이 있다고 그랬었잖아. 내 밑에서 일해 볼래요?”

문선준의 검은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다.

있는 집에서 귀하게 자라서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조무래기, 가지고 놀기 딱 좋은 녀석이다.

“어떤 일이요?”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형편 많이 기울 텐데……. 돈 벌어야지, 안 그래요?”

“네, 안 그래도 일자리 알아보는 중입니다.”

일자리를 구해 봤자, 편히 살지는 못할 텐데?

“정담은.”

이미 한 번을 죽였는데도 분이 풀리지 않는 이름을 내뱉었다.

아직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니, 문선준은 나를 정말 모르나?

“정담은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아! 제 과외선생님이셨어요. 강재만 씨는 담은 쌤을 어떻게 알아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순한 얼굴로 잘도 내뱉네?

“정담은이 과외를 했다고?”

“네, 저만 특별히요. 사정이 있었거든요. 강재만 씨는 어떻게 아시는데요?”

누굴 속이려고 드는 건지 모르겠다.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문선준 실장도 엿 같은 세월을 거슬러 온 게 분명하다.

“걔가 원래 나랑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거든? 근데 이게 약속을 깨고 딴 새끼랑 결혼을 했어. 그러는 바람에 우리 아버지 회사가 얼마나 난처해졌나 몰라요.”

“아, 원래 그 쌤이 좀 자기 생각만 하기는 해요. 정웅 회장님이 워낙 금이야 옥이야 키워서 철이 하나도 없거든요.”

문선준은 정담은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줄 것처럼 굴었던 비서였다.

저렇게 욕을 하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어떻게 알고 과외를 했어? 정담은이 돈이 아쉬운 것도 아니고.”

“결혼 이야기 오고 갔던 거면……. 여은이 아시죠? 걔랑 저랑 중고등학교 내내 친구였어요.”

“아! 우리 처제 될 뻔한 친구! 그랬구나! 그 친구가 나를 참 잘 따랐어. 근데 생각해 보면 말이야. 정담은도 나를 제법 따랐거든?”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정담은은 민서후에게 시집간 후였다. 그년에게 얽힌 돈이 아까워서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분노가 치밀어서인지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근데 이년이 어느 순간부터 돌변했단 말이지. 민서후 그 얼굴만 반지르르한 놈한테 속아서는!”

워낙 성질이 개 같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요즘처럼 조절이 힘든 적은 없었다.

“이년이 감히 나랑 결혼을 깨? 지가 얼마나 한심한 선택을 한지도 모르고. 하! 그거 알아? 민서후 그 새끼 4년 후에 죽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순진한 선준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나는 남들이 모르는 걸 많이 알고 있거든. 자네 어머니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하시지? 그대로 두면 내년에 위험해질 거야. 자네도 그렇게 살다가는 비명횡사할 거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겁에 질린 듯한 문선준의 얼굴이 가관이다.

“지금 방금 축구 대표팀 경기 끝났을걸?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결과 한번 찾아볼래요? 후반 추가 시간 3분, 극적인 동점 골이 터지고 나서. 상대 팀 선수 실책으로 골이 하나 더 터졌어. 그래서 우리가 2:1로 일본을 이겼을 거야.”

문선준이 의심 어린 눈빛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진짜네요! 진짜 이겼어요! 방금 결과 나왔는데?”

“문선준 군, 나는 미래를 봐. 나하고 같이 일하면 꽤 큰돈 모을 수 있어. 어때? 같이 일할래?”

“저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담은 쌤 남편이 4년 후에 왜 죽는다는 거예요?”

“연구소 폭발 사고로. 사실 사고가 아니지. 그 새끼가 내 아들 놈 정체를 밝히려고 들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냥 뒀을 테니까.”

그 새끼가 입양을 방해하려고 들어서 얼마나 애를 먹었었는지.

“아드님, 정체요?”

“어. 남자가 사업하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정담은이랑은 돈만 보고 결혼했는데, 내가 여자가 없었겠어?”

그년을 정말 사랑했던 내가 미친놈이지. 또 다른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바로 입양하면 티 나니까, 정웅이 후원하는 보육원에 집어넣었거든. 근데 민서후 그 새끼가 또 봉사활동 질을 그렇게 하잖아? 그놈이 내 아들 정체를 알아 버린 거지. 어떡하겠어, 죽여야지.”

그런데 문선준은…… 왜 민서후에 대해 궁금해할까.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와중에도 의문은 명확했다.

“근데 문선준. 너도 뭔가 아는 거 아냐? 나 몰라? 정담은이 과외를 했다? 대학교 때까지 정 회장이 싸고돌던 년이 남의 집에 들락거렸다고? 그것도 본인 비서였던 놈을 가르쳐? 그리고 어머니가 위험하다는데…… 넌 왜 민서후에 대해서 먼저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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