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63화

    “괜찮아? 잠을 못 자서 후각이 예민해진 건가?”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손사래를 쳐댔다.

    “좀 저리 가 줄래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이다.

    가슴에 미세한 실금이 그어지는 듯했다.

    그녀가 죽음을 딛고 삶을 거슬러 왔다고 했을 때도.

    다른 남자와 결혼했었다고 했을 때도.

    내가 죽었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 상처받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내가 나에게 독한 냄새가 난다며 저리 가라고 표정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서후 씨, 제발 좀.”

    “어? 어.”

    나는 데스크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회의용 테이블까지 물러났는데도 그녀는 코를 찡긋거리며 중얼거렸다.

    “향수 바꾼 거 아니죠? 오픈 한 지 오래돼서 상한 거 아녜요?”

    급기야 상한 향수를 쓰는 한심한 놈 취급을 하고 있다.

    “아니거든. 잠 못 자서 예민해진 것 같은데? 정 힘들면 오늘 일찍 들어가는 게 어때?”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야겠어요. 일이 손에 안 잡히네요. 어지럽고, 매스껍고. 눈꺼풀도 무겁고요.”

    정담은은 회장 딸이라서 일을 게을리한다는 소리를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어했다.

    그런 그녀가 PC 전원을 끄고,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 가서 영양제라도 하나 맞는 게 어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요즘 여기저기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 기운이 다 빠졌나 봐요.”

    이쯤 되면 품에 안겨서 가슴팍에 턱을 괴고는 어리광을 잔뜩 부려야 정담은답다는 생각이 들 텐데.

    그녀는 마치 냄새나는 쓰레기통을 피해 가는 것처럼 내 주위를 빙 둘러서는 이사실 문 앞으로 향했다.

    “나 먼저 들어갈게요.”

    배웅이라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질색했다.

    “거기 있어요!”

    “나 지금 좀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그러자 그녀가 미간을 팍 구기고는 중얼거렸다.

    “서후 씨가 좀 서운한 게 낫죠. 내가 서후 씨 얼굴에 대고 토하는 것보다.”

    얼굴에 대고 토한다고?

    내게서 풍겨 오는 향수 냄새가……. 그렇게 역겨워?

    언제는 포근한 숲 같다고 했으면서?

    “나 먼저 갈게요!”

    얼굴이 노랗게 뜬 그녀가 후다닥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아나듯 이사실을 빠져나갔던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1시간쯤 지나서였다.

    “어디야? 병원 갔어?”

    - 서후 씨, 흐흑.

    주력 사업의 본부장들이 회장님께 상황 보고를 해야 하는 회의를 앞둔 시점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도 정신없는 일을 많이 겪은 탓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나……. 서후 씨, 나……. 병원 왔는데, 그런데…….

    회장실 앞에 선 나는 오도 가도 못 하고 서서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나 아이 가졌대요.

    길고 긴 복도가 진공관으로 변한 것처럼 멍해졌다.

    “뭐라고?”

    - 우리 아기가 서후 씨 향수 냄새는 안 좋아하나 봐요. 앞으로 우리 아기를 위해서 향수는 뿌리지 말아 줄래요?

    여전히 울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녀의 물음은 깜찍했다.

    “너는……. 이런 걸 왜 전화로 이야기해.”

    팔을 뻗으면 안아 줄 수 있는 곳에서 할 것이지.

    “아까 내가 병원에 같이 갈 걸 그랬다.”

    - 다음부터는 꼭 같이 와 줘요.

    “그럴게. 꼭 같이 갈게.”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무수한 감동의 순간에 우리는 함께할 것이다.

    내가 그녀의 곁을 떠나는 일을 절대로 없을 것이다.

    “민서후 본부장, 잠시 나 좀 보지.”

    본부장들이 전부 모인 회의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정 회장이 핏발 선 눈으로 나를 지목했다.

    다른 본부장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커다란 집무실에 둘만 남게 되자, 정 회장이 버럭 화를 냈다.

    “자네 정신 안 차리나? 부르는 소리도 못 듣질 않나, 질문에 답하면서 버벅거리질 않나! 안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래?”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나는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여기 보는 눈이 몇 갠데! 회장 사위라는 본부장이 그래서야 쓰겠나?”

    하지만 정 회장이 이렇게 역정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회장의 부름에 한 번 대답을 못 했고, 또 회장의 질문에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을 뿐이다.

    “장인어른.”

    “자네 지금 혈연 들먹이면서 빠져나가려는 게야? 그래! 내가 욕심이 좀 많아! 그래서 자네를 대하는 기준이 좀 높을 수도 있지! 근데! 자네 잘했잖아! 흠잡을 데 없이 잘했잖아! 오늘 왜 이래? 걱정되게. 왜 정신이 딴 데 팔려서 그래?”

    정 회장은 걱정이 되면 화가 나는 사람인가 보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회의 직전에 아빠가 된다는 소식을 들어서, 잠시 넋이 나갔었나 봅니다.”

    “아니! 아빠는 자네만 되나? 나도 딸이 둘이나 있어! 여기 모인 본부장 중에 자식 둔 아비가……!”

    한참 소리를 지르다 말고, 정 회장이 입만 뻥긋거렸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 정 회장이 조용히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자네?”

    “제가 아빠가 된답니다.”

    “자네가 아빠가 되면, 내 딸이 엄마가 되고……. 내가 할아버지가 된다는 소린가!”

    귀여운 정 회장, 그녀가 호들갑을 떨 때와 몹시 닮은 모습이다.

    “잘했어! 우리 사위 잘했다! 지금 당장 가서 자네 안사람부터 챙겨!”

    “회장님, 방금 회장 사위라는 본부장이 그러면 못쓴다고…….”

    “그래서 자네가 일찍 퇴근한다고 개소리하는 놈들 있으면, 실적 평가서 들고 와서 떠들라고 해! 자네보다 나은 놈들 있나! 얼른, 썩 들어가!”

    정 회장은 기분이 좋아도 역정을 내는 성격이었다.

    일찍 퇴근한 집은 잔칫집을 방불케 했다.

    “아유, 아기 아빠 왔어요? 오늘 퇴근이 빠르네?”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께서 활짝 웃으시며 나를 반겨 주셨다.

    “먹고 싶은 게 많은가 봐. 지금 부엌에 있어.”

    곧장 부엌으로 향하려다가, 먼저 침실을 찾았다.

    드레스룸에서 옷을 싹 갈아입은 뒤, 향수를 뿌렸던 손목도 물로 깨끗이 닦았다.

    후각이 예민해진 그녀가 향수 냄새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침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할머니와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 중이었다.

    “예쁜 언니, 그러다 돼지 되면 어쩌려고 그러우?”

    “돼지가 되어도 오라버니는 좋아해 줄 거야, 괜찮아.”

    점심도 거른 그녀가 단호박 찰떡을 먹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네 언니는 살이 잔뜩 쪄도 예쁘기만 할걸.”

    나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 왔어요? 옷도 싹 갈아입었네?”

    코를 킁킁거린 그녀가 새삼 감동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향수 냄새도 안 나고.”

    “우리 아기가 안 좋아하니까. 떡은 먹혀?”

    “너무 맛있어요! 떡이란 떡은 다 먹어야지!”

    그녀가 먹던 떡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방에 잠깐 들어갈까?”

    “우리 오라버니는 눈치가 빠르기도 하지.”

    할머니 곁에 앉아 있던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침실로 향하는 우리를 흘끗거렸다.

    침실에 들어서자, 그녀가 예상한 대로 가슴팍을 파고들며 안겼다.

    “이제 된 것 같아요! 됐어요! 바뀌었어!”

    말을 이어 나가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됐다니.”

    가느다랗게 떨리는 어깨를 잡아서 거리를 벌리며 물었다.

    “실은 나……. 이전 삶에서는.”

    “아이를 갖지 못했어?”

    그녀의 눈가가 물기로 일렁거렸다.

    “하여간 내 남편, 눈치는 빨라서…….”

    예쁜 얼굴에 죄책감이 비쳤다.

    “결혼 전에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거요.”

    “지금 가졌잖아. 만약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녀가 팔을 뻗어서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전에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거든요! 근데 아이가 생겼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가 바로 우리 운명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 강재만과의 결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 또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 인간이었나?

    “오해하지 말아요. 그때 나는 결혼 전 부인과 검사에서 불임 판정을 받았었어요. 그리고 그놈은 사랑 없는 결혼인데, 나를 안을 수 없다면서 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어요. 내연녀가 있었다고, 내가 말했었죠?”

    회사 정원에서 그놈을 흠씬 두들겨 패 주었던 날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그놈은 날 죽였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어머니, 좋은 생각!”

    나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그때의 결혼에서 어떤 행복을 느꼈을 거라고 오해하지 말라고요. 그냥 끔찍하기만 했으니까.”

    “알았어.”

    나는 어느새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믿고 있었다.

    “아! 선준이한테 전화해 줘야겠어요!”

    그녀는 운명의 변곡점을 알려야 한다며 휴대전화를 빼 들었다.

    “여보세요? 문 실장! 우리 운명이 바뀌고 있나 봐! 내가 아이를 가졌어.”

    휴대전화 너머에서 뭐라고 한 건지, 그녀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누굴 만나러 갔다고? 야, 문선준!”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 듯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녀가 스산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선준이가 혼자 강재만을 만나러 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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