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62화
심장이 끝도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요. 이전 삶에서도 나는 서후 씨를 좋아했어요. 내 결혼식이 있던 날, 웨딩로드를 걸어 들어가다가 서후 씨랑 눈이 마주쳤었는데……. 그 순간을 두고두고 곱씹었었어요.”
그의 눈시울이 붉었다. 서글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색이었다.
“나는 내 남편이었던 남자와 내가 키워서 성인이 된 아이 그리고 남편의 내연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어요. 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대로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다고.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나도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요.”
그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깨어난 날이 10월 1일이었어요. 나 그때 많이 까불었죠? 사실 나는 그때 내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어요. 꿈인 줄 알았거든요.”
진심을 전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또 깨닫는다.
“그래서 원래 정담은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고백도 하고, 서후 씨를 쫓아다녔어요. 그러던 중에 문선준이 내 앞에 나타났고요.”
“그럼 너는 문선준이 나타나고 나서야 꿈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는 거야?”
그가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쩐지 멍청해진 기분이 들어서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일은 나도 처음이니까 그랬던 거거든요!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보지 말죠!”
따지듯 묻자, 그가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슥슥 문지르며 대꾸했다.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낙하했던 심장이 동아줄을 잡고 천천히 올라오는 듯했다.
이런 순간에도 내가 귀엽게 느껴진다면, 이미 게임 끝인데?
“아무튼, 강재만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맞아요. 그런데요. 이번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컸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뜨거운 물기가 울컥울컥 차올랐다.
“내가 의도적으로 서후 씨한테 접근한 게 아니라고요. 서후 씨는 만만하고 쉬운 사람이 아니라, 내가 78년 동안 사랑한 유일한 남자라고요.”
“그 78년 좀…….”
그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서 있던 나는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번 삶에서 내가 이루고자 한 건 딱 하나였어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민서후. 딱 하나요.”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 상황이 너무 비정상적인데……. 그런데도 기분이 좋으면, 나도 미친 거지?”
그가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아까보다는 기분이 제법 풀린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런데요?”
“묻고 싶은 게 있어.”
그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문선준과 너, 두 사람이 기억하는 삶에서 나는 어떻게 살았어? 너는 강재만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키웠는데…… 나는?”
그는 확인하고 싶은 눈치였다.
외롭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말이 사실인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정담은.”
그가 내 이름을 가슴에 꾹꾹 눌러 담는 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서후 씨는…….”
“대표님! 본부장님!”
카페 안에 있던 선준이 황급히 뛰어나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선준이 파들파들 떨며 내 눈앞에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나 대신 그가 선준의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방금 작은아버지가 보내준 사진이에요. 아버지 차 블랙박스 영상이 이제 복구됐다고요.”
선준은 자신의 작은아버지가 경찰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휴대전화로 블랙박스 편집 영상을 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상대 운전자가 강재만하고 많이 닮았네.”
숨이 턱 막혔다.
급기야 이성을 잃은 선준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내가 그랬잖아요!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고요! 아버지는 예전에 강재만 때문에 회사가 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요! 근데 이번에는 역주행하는 강재만 차에 부딪쳐서 돌아가셨잖아요! 결국, 그놈 때문에 한날한시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선준이 내 어깨를 붙잡고 거세게 흔들어 댔다.
“안 바뀌잖아요! 이제 우리 어머니 차례예요! 그리고 나는 개고생 하다가, 개죽음당할 거고! 대표님도 마찬가지라고요! 그 노인이 그랬잖아요! 악기(惡氣) 때문에 돌아온 거라고! 분명해! 그놈도 그런 거라고요!”
“이거 놓고 이야기해! 너 미쳤어?”
말리는 그의 팔을 선준이 확 뿌리치며 화를 냈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야, 문선준!”
난리 통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나는 선준에게 입을 닫으라며 눈을 부라렸다.
“잠깐만. 나도 마찬가지라니?”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선준을 응시했다.
“당신도 가만히 있으면 4년 후에 죽는다고!”
“이건 그거하고 상관없는 일이잖아!”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어떻게, 죽었는데?”
그가 어깻숨을 훅 내쉬며 물었다.
“연구소 폭발 사고였어요. 근데 그런 사고는 이제 안 일어날 거예요.”
나는 재빨리 대꾸했다.
“그래서 연구소 설계부터 다시 한 거야? 폭발 위험이 있으니 안전 기준 높이라고 지시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아니! 그게 단순히 사고라는 증거는 있어요? 그때 그 노인이 했던 말 생각나요? 민서후 씨가 그놈이 지른 불구덩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소리 지르고 있다고 했었죠? 근데 마누라 잘 만나서 천수를 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놈이 왜 다시 보이냐고도 했고요!”
말문이 턱 막혔다.
그가 고개를 똑바로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그쪽 삶에서 죽은 연구소 폭발 사고도 사고가 아니었다? 강재만 짓이다?”
이제껏 내가 피하려고 했던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걸 내 할머니와 할머니 친우이신 박 씨 할아버지가 보신 거고, 그걸 당신과 문선준은 그쪽 삶에서 직접 겪었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막아야 해요! 그 어르신이 그랬어요! 민서후 씨 할머니께서 해 주신 새남굿으로!”
“할머니가 치성을 드리지 않은 게 아니야.”
그가 넋이 나간 듯 바닥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내가 죽는 걸 막아 보시겠다고 끝없이 기도하셨어. 그럴 때마다 결론이 늘 같아서, 끝내 무구를 손에서 놓으신 거고.”
선준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때하고는 상황이 다르잖아요! 여러 가지가 변했잖아요!”
“바뀌었다고 해도!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시는 분이야.”
그가 소리쳤다.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초연해질 수 있었다.
나는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우리가 다 알게 되었잖아. 바뀔 거야. 절대 불행이 다시 반복되지는 않을 거야.”
두 남자는 각기 다른 톤의 안쓰러운 낯빛을 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운명인 것 같지 않아요? 왜 하필 나는 민서후 씨를 좋아했을까요? 민서후 씨 할머니는 왜 그런 능력자였을까요? 하필 40년을 거슬러 온 사람은 왜 할머니의 친우였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만나서 행복해질 운명이었던 거예요.”
나는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기 위해 애썼다.
살얼음을 따뜻한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녹아 없어지듯이 그의 눈동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연하게 웃으며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문선준, 너는 빌런이 이기고 끝나는 히어로물 본 적 있어?”
“있어요. 요즘은 빌런한테 서사 부여하는 영화도 많아요.”
아, 문선준은 눈치가 있는 것 같다가도, 가끔 없어서 탈이다.
“나는 그런 영화 싫어해. 무조건 착한 편이 이기는 게 좋아.”
역시 내 남편. 그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선한 사람은 복을 받지만,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게 맞아.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돌아온 걸 거야. 우리가 벌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몫의 복을 챙기기 위해서.”
나는 그의 곁으로 더 바짝 붙어서며 말을 이었다.
“선준아. 방법이 있을 거야.”
선준은 어깨가 들썩거리도록 한숨을 몰아쉬고는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듯했다.
우리가 탄 배는 또 다른 돛을 펼치는 중이었다.
***
“정담은 이사님, 안에 계십니까?”
신경을 쓴 탓인지 어제 밤새 두통이 심하다며, 아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사실 유리 벽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들어가 보세요. 점심도 거르시고, 계속 집무실에만 계셨어요.”
비서의 말에 이사실 나무문을 두드려 보았다.
평소에는 바로 대답이 들려오는데, 오늘따라 묵묵부답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집무실 의자에 기대앉아서 잠든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척을 느낀 그녀가 흠칫 놀라서 눈을 떴다.
“왔어요? 내가 깜빡 잠들었었나 보네요.”
고단한 얼굴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데스크에 걸터앉았다.
“피곤하면 일찍 들어가지. 일이 많아?”
“그래도 퇴근 시간은 지켜야죠. 회장 딸이라고 퇴근하고 싶을 때 해요? 근데…….”
미간을 잔뜩 찡그린 그녀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근데 뭐?”
“서후 씨, 혹시 여기 오기 전에 향수 다시 뿌렸어요?”
“아니. 집에서 나온 그대로인데.”
그녀가 입을 막은 채로 구역질을 해 댔다.
“향수 냄새가 너무 독해. 속이 메스꺼울 정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