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61화

    규칙을 정하기로 했다.

    만약 문선준을 만나야 한다면, 그 자리에는 남편 민서후가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는 규칙.

    침대 위에서 달콤한 고문을 당하고 있던 나는 남편의 제안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었다.

    작금의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민서후가 야한 몸으로 꼬셨기 때문에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 아니, 그냥 내 불찰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나누도록 해.”

    그는 마치 저승사자와 같은 얼굴로 내 옆에 앉아서 문선준을 노려보았다.

    “서후 씨, 눈에 힘 좀 풀어.”

    “응, 자기야. 나 지금 눈에 힘 하나도 안 줬어.”

    눈으로 레이저를 쏘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가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나를 ‘자기야’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나는 감격하고 말았다!

    “응, 여보! 우리 여보는 원래 눈에서 카리스마가 넘쳐흐르지!”

    선준이 카페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으며 실소했다.

    “저 비서였다는 건방진 청년은 원래 저렇게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나?”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히는 순간,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어린 친구가 눈에 힘을 너무 주네.”

    “내가 이전 생에서 40년을 넘게 살았거든요? 마흔셋에 죽었던가? 근데 지금 내 나이가 스물이야. 그럼, 63년을 살아 있는 셈인데. 누가 버릇이 없는 건지 모르겠네.”

    오늘따라 선준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철이 들지 않는다더니, 초고속 승진에 빛나는 우리 본부장님이나, 63년 살았다고 떠드는 문선준이나.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나는 쉰하나에 죽었고, 지금 스물일곱이야. 78년 산 누나한테 까불래, 니들……? 이라고 말하면 나도 함께 유치해지는 거니까.

    “기 싸움이나 하자고 모인 거 아니잖아요.”

    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오늘 만나자고 한 용건이 뭐야?”

    그가 선준을 향해 물었다.

    선준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더 있는 거, 맞죠?”

    사실 그를 곁에 두고는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선준은 강재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

    “어떻게 된 걸까요?”

    퍼즐을 완성하기에는 손에 쥐고 있는 조각의 수가 너무 적었다.

    “무슨 소리야? 두 사람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 것 같다니?”

    그가 미간을 구기며 심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믿지도 않으면서! 끼어들지 말고 잠자코 계시죠!”

    선준이 그를 무시하듯 읊조렸다.

    “누군지 정체를 아는 거야? 두 사람한테 우호적인 사람이야, 아니면.”

    민서후는 남다른 통찰력으로 본부장 자리를 거머쥔 명석한 사람이었다.

    “혹시 두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거야?”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진중한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리곤, 그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우호적인 쪽은 아닌 것 같네.”

    그는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는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문선준은 마흔셋에 죽었다고 했고, 담은이 너는 쉰하나에 죽었다고 했지? 기대 수명이 83.5세야. 그런데 두 사람은 거기에 한참 못 미치는 나이에 죽었네? 정웅에너지 대표에까지 올랐던 정담은, 그 비서실장 문선준.”

    그는 이지적인 목소리로 물음을 이어 나갔다.

    “두 사람, 어떻게 죽었어?”

    셋이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선준과 나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렇게 된 이상 숨길 이유가 없다는 결론은 빠르게 내려졌다.

    “나는 교통사고였어요.”

    선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산한 어조였다.

    “리조트 담, 아시죠?”

    “알아요. 정웅그룹 계열사 중 하나죠. 이 사람 이름을 딴 리조트이기도 하고.”

    그가 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한 번 보고는 이내 선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서, 사고를 당했고요.”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사고는 맞아요?”

    이 남자 촉이 꽤 좋다.

    나는 약간 감탄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또, 우리 자기 나한테 새삼 반했어?”

    내 시선을 느낀 그가 근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응, 멋있어!”

    우리는 서로를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나 얘기해요, 말아요?”

    선준이 고까운 듯 물었다.

    “계속해 봐요. 사고는 맞아요?”

    그는 언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냐는 듯이 얼굴을 굳히며 선준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누군가 차 브레이크 패드에 손을 댔더라고요.”

    “죽었는데, 그건 어떻게 알았지?”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맹점을 짚어 냈다.

    “이제 죽는구나, 싶은 순간……. 목소리가 들렸어요. 사고 처리는 잘 했다는 목소리와 아깝게 됐다는 대답까지.”

    “아깝게 됐다는 건, 문선준 비서실장의 차에 정담은 대표가 타지 않아서?”

    그가 선준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길게 끌어와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선준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맞아요. 정담은 대표를 함께 처리하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말을 했어요.”

    그가 가슴이 들썩이도록 숨을 크게 들이켜며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잠시 정리가 필요한 눈치였다.

    “담은아.”

    그는 테이블을 응시한 채로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너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너는, 어떻게 죽었는데?”

    지금 당장에 일어나는 일도 아닌데, 그의 눈빛에 고통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오늘처럼 그때 일을 떠올리기 싫었던 날도 없다.

    “내가 키운 아이 손에 죽었어요. 그때 내가 쓰러졌던 그 요양원에서요.”

    그가 잠시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선준의 죽음에 관해 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내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꽤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네가 키운 아이? 자식이 죽였다는 거야?”

    “내가 낳은 아이는 아니었고요.”

    그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아이와 문선준 사고를 계획한 사람이 동일인이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의 아버지와 제 사고를 사주한 사람이 동일인물이죠.”

    선준의 말을 들은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형형해졌다.

    “그럼 당신 남편이었던 놈이 당신을 죽였다는 뜻이야?”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살벌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진짜 죽여 버리고 싶네, 그 새끼.”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는 손등으로 입술 끝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팔딱팔딱 맥이 뛰는 게 보였다.

    “우리가 한 말, 이제 다 믿어요?”

    선준이 담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내 아내한테 우리 이제 어떻게 하냐고 한 이유가……. 그놈도 돌아왔을지도 몰라서?”

    “그날 그 어르신이 그러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죽은 게 억울해서 눈을 못 감고 있다고요. 우리 아버지……. 지난 삶에서 돌아가셨던 날과 같은 날에 돌아가셨어요.”

    “똑같은 방법으로?”

    선준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대꾸했다.

    “그땐 스스로 세상을 등지셨고요. 이번엔 역주행하는 차랑 부딪쳐서요. 사실 우리가 운명을 바꿀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어르신을 찾아간 거였어요. 그 어르신의 삶은 바뀌었으니까요.”

    “그 노인네의 삶이 바뀐 게 우리 할머니 도움 덕분이라고 했었지?”

    “할머니께서 굿을 하셨다고 해요.”

    내 조용한 대답에 그는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의 물음에 답한 이야기들로 상황은 더욱 답답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언제 돌아왔는데?”

    “저는 작년 9월이요.”

    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작년 10월 1일.”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사업본부가 공식적인 업무를 시작한 첫날이네.”

    그의 얼굴에 비소가 어리는 듯했다.

    “정담은이 갑자기 나한테 관심을 보이면서 돌변한 날이기도 하고.”

    “그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자리 비켜 줄게. 할 이야기 있으면 해.”

    그가 카페 밖으로 나가 버렸고, 나는 그를 따라나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강재만이 돌아온 건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한 알아볼게요. 어서 가서 본부장님 챙기세요.”

    나는 선준에게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카페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카페 마당에 서서 어깨가 들썩거리도록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서후 씨.”

    “문선준이 나를 찾아온 날이 있었어. 정담은 버리지 말라고, 강재만한테 가면 큰일 난다고 그랬었거든?”

    그가 땅바닥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겁 먹지 마. 아직 너한테 화 안 났어.”

    아직? 그럼 나한테 화를 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문선준을 사고사로 위장해서 죽이고, 너를 죽였다는 놈이……혹시, 강재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가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강재만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선,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필요했겠네, 정담은?”

    아직은 나한테 화가 나지 않았다고 했던 남자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그쪽 삶에서는 어땠어? 내가 그만큼 만만하고 쉬워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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