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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58화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셨다.

“오늘 그이랑 약속한 분들이시구나. 어서 들어와요. 마침 막 차를 내렸는데, 타이밍이 정말 좋네요.”

부잣집에서 어려움 없이 살아온 사모님 특유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우리는 아주머니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들어섰다.

“여보, 손님 오셨어요.”

집안 어딘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하얀 한복을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는 나를 찾아올 일이 있을 거라고, 내가 이야기했었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할머니의 친우라고 했던 할아버지였다.

“뭐야, 아는 사이였어요?”

선준이 이를 악문 채로 조용히 읊조렸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어르신.”

나의 정중한 인사를 받은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앉지. 자네는 차 좀 내주시게.”

“당연히 그래야죠.”

아내를 향해 웃어 보이는 노인은 살인을 저지른 전과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선해 보였다.

집 안에는 화목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하긴 살인자라고 이마에 낙인을 찍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전과가 있는 살인자가 할머니의 친우라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알고 싶어서 왔을까, 아니면 무엇을 알리고 싶어서 왔을까.”

노련한 노인은 아내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여유롭게 웃었다.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가 먼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노인을 찾아 나서자고 할 때는 선준이 더 적극적이었지만, 노인을 마주한 이후로는 달랐다.

“내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남다르다고는 생각했네만.”

노인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엇이, 어디까지 알고 싶은 겐가?”

“40년 전 죽음을 거슬러 돌아오신 이후로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합니다.”

예상외로 노인이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자네, 자리 좀 비켜 주시겠나?”

노인이 아내를 돌아보며 자상하게 물었다.

아내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웃으며 자리를 떴다.

“혹시 옛날 책을 보고 예까지 찾아온 겐가?”

“예, 어르신. 어르신께서 하신 인터뷰를 찾아보았습니다.”

선준이 공손하게 답했고, 노인은 입술을 가늘게 맞물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는 아무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어. 내가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았다는 걸, 아무도 믿어 주질 않았지. 그때 내 인터뷰를 했던 사람도 결국 자기가 원하는 괴담으로 내 삶을 각색해서 책에 실었지.”

우리는 잠자코 노인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나는 전에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거든.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놈들의 미래가 보였네. 잘못을 저지르고도 가벼운 벌을 받고 나와서, 다시 활개 치고 다니는 놈들 말일세. 이유도 없이 부녀자를 살해한 놈들, 어린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금수보다 못한 부모들,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 놓고도 제가 한 짓을 영웅담처럼 떠드는 놈들.”

노인은 마른 손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마치 죄 닦음을 하는 것처럼, 손을 닦는 행위 같아 보였다.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게 버겁기 시작했어. 경찰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놈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경고하러 갔다가 몰매를 맞기도 했지. 피해자는 영원히 고통받는데, 가해자는 잠깐 형을 살고 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걸 생각하면, 복장이 터졌지.”

“그래서 그들을 직접 죽이셨던 건가요?”

노인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허공을 응시했다.

“감히 내가 신의 위치에 있다고 착각했지. 나도 같은 인간인데 말이야. 무려 40년이네. 40년을 그러고 살았어. 그런데 돌이켜 보니……. 나는 그들의 앞날을 내다본 거거든? 결국, 그네들이 저지른 몹쓸 짓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사람을 죽인 몹쓸 놈이 되었지. 그래서 내 목숨조차 내가 심판하려고 했던 게지.”

노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숨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살던 집 마당에서 깨어났어.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르기 전 해였지.”

“그때 그 인터뷰를 하신 거죠?”

선준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번 죽었다 깨어났는데도, 나는 어리석었네. 누구든 내 이야기를 들어 주면, 나를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세상은 나를 한 번 더 비웃더구먼. 정신 나간 소리로 돈푼이나 벌려는 미친놈 취급을 했어.”

화목하고 따스하다고 생각했던 집 안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는 듯했다.

그만큼 노인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기분에 따라 좌중의 분위기를 흔들 수 있는 언변을 지닌 사람이었다.

만신 즉 큰 무당으로 세상을 살아온 직업적 특색 같기도 했다.

그가 우리보다 대화를 이끌어 가는 데 노련하다는 뜻이다.

“다시 사람을 죽이셨던데요?”

나는 그의 트리거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을 건드렸다.

“끔찍한 놈이었어. 부녀자 열댓 명을 죽일 놈이었지. 그놈을 죽이고 간 교도소에서 자네 시조모를 만났네.”

선준이 가라뜬 눈으로 내 얼굴을 슬쩍 살폈다.

“할머님을 교도소에서 만나셨다고요?”

“응. 그이는 봉사활동을 왔고, 나는 재소자였고. 모범수로 7년을 살고 나와서 자네 시조모를 다시 찾았지. 자네 시조모가 팔도강산에 이름난 만신이었다는 사실은 아는가?”

“대충은 들었습니다.”

노인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저희가 궁금한 건, 출소한 이후입니다. 이전 삶에서 죽인 사람들을 모두 다시 죽이지 않으신 거죠?”

“몹쓸 짓을 한 놈들을 참아 줄 수가 없었어.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내 이 머릿속에 가득 찼었지. 이전 생의 악기(惡氣)가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끈 게야. 그러니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거지. 그러려고 다시 돌아온 거니까. 더 많은 미래의 죄인들을, 더 많이 벌하고 싶어서.”

힘에 겨운지 노인이 이마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그래 봤자 살인자일 뿐이지. 악기(惡氣)를 쫓고, 내가 무업(巫業)에 들어설 수 있도록 도운 이가 자네 시조모일세.”

“어떤 방법으로 도왔다는 말씀이죠?”

“자네 새남굿이라고 들어봤나?”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새남굿은 신에게 소원 성취를 비는 천신굿과 망자를 극락으로 이끄는 진오기굿 즉 망자 천도굿을 함께하는 걸 말한다네.”

노인은 이제 거의 다 왔다는 듯이 다시 여유로운 웃음을 되찾은 듯했다.

“새남굿에서는 자네 시조모를 따라올 자가 없었어. 내가 미래를 본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해 달라고 비는 천신굿과 내 이전 삶에서 따라온 악기(巫業)를 천도하는 진오기굿을 하느라, 이틀 내내 진을 다 뺐지.”

“그래서 그 굿을 하고 나서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선준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묻자, 노인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단지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해 왔을 뿐이야. 그게 굿 때문이라고 믿는다면, 그럴 것이고. 내가 교도소 가는 게 겁이 나서,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지.”

노인은 모호한 답변으로 노련하게 핵심을 피해 갔다.

“자, 이제 내가 물을 차례네. 자네들은 무엇 때문에 이 이야기가 궁금해서 나를 찾아온 게지? 내가 신력(神力)이 다한 지 오래라 자네들의 속이 잘 보이지 않네. 다만 귀하고 선한 사람들이라는 건 알겠는데…….”

노인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짓 같았다.

“제 남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있다고 들었어요.”

노인이 입술을 가늘게 맞물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서후 그 착한 아이를 괴롭히려는 몹쓸 놈이 하나 보였었지.”

눈을 가늘게 뜨고 소파 테이블 중간을 응시하는 노인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그놈이 지른 불구덩이 속에서 서후 그 녀석이 빠져나오질 못하고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소리를 질러 대는 게 보였어.”

나와 선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놈이라뇨?”

선준의 물음에 노인이 멍한 시선을 들어올렸다.

“자네들은 나를 참 헷갈리게 하는구먼.”

그때, 노인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뵈질 않던 놈이 왜 다시 보이는고! 어디서 감히 누굴 넘보고! 자네 덕에 서후 그 아이가 천수를 누릴 거라 봤거늘! 이 어찌 다시 불구덩이가 보이는가!”

우레와 같이 역정을 내는 바람에 아주머니께서 방에서 뛰어나오셨다.

“진정해요, 여보! 이러다 또 쓰러지겠어요!”

아주머니가 대로한 노인을 데리고 방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서 그들이 사라진 방문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노인의 아내가 사색이 된 얼굴로 나타났다.

“인제 그만 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 양반 기력이 쇠해서 손님 안 받은 지 꽤 됐어요. 오늘은 귀한 분이 오신다고 꼭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할 수 없이 문을 열어 드린 겁니다.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저 이가 여기 있다는 것도, 어디에 말씀 마시고요.”

아주머니는 우리를 집 밖으로 내쫓듯 했다.

“자네 아비는!”

문밖으로 나선 우리의 등에 대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노인이 소리쳤다.

“그놈 때문에 억울해서 눈을 못 감고 있구먼!”

“아유, 참. 들어가시라니까요!”

눈앞에서 현관문이 닫혔다.

선준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려다 말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우리는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짐작하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가정을 떠올리면서.

강재만도 돌아온 것 같다는 끔찍한 가정을…….

아파트 입구로 향하는 길, 선준이 절망에 휩싸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이제 어떡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울음기 섞인 질문이 날아든 순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왜 내 아내한테 묻는 거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남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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