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57화

    “여보세요?”

    - 어디야, 대체?

    그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잠깐 나왔어요.”

    - 잠깐 어딜 갔다는 거야? 일정도 다 취소하고, 무슨 일인데?

    다정한 물음에 뜨거운 물기가 울컥 치밀었다.

    “그게.”

    - 담은아…….

    눈이 질끈 감겼다.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 내가 지금 거기로 갈까?

    “응…….”

    한없이 믿음직스러운 선한 사람.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와 줄 수 있어요?”

    - 갈게, 담은아. 내가 지금 갈게.

    남편에게 대학병원 이름을 알려 주자,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대학병원, 그는 전화 통화를 마친 지 20분도 되지 않아서 대학병원 본관 건물 로비에 나타났다.

    창가에 걸터앉아 있는 나에게 무작정 달려온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리는 동안,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나를 더욱 꽉 안았다.

    “담은아.”

    안타까운 목소리로 가만히 내 이름만 불러 줄 뿐이었다.

    “친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가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그랬구나.”

    “놀랐죠? 미안해요.”

    회사에서 갑자기 사라진 아내가 대학병원 로비에서 울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어디 안 좋은 건 줄 알고.”

    어깻숨을 크게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걱정했어.”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움켜잡은 그가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큰 걱정은 덜었다는 눈빛으로 그가 나를 따뜻하게 내려다보았다.

    “건강한 분이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 친구도 이런 일에 부를 사람이 마땅치가 않아서……. 저한테 전화를 한 건가 봐요.”

    아무것도 묻지 말고 와 달라는 말에 충실하는 것인지, 그는 어떤 친구인지도 묻지 않고 귀 기울여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놀랐겠다.”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그의 슈트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나왔는지, 재킷 라펠이 뒤집혀서 목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 있었다.

    항상 단정하고 완벽한 모습만을 보이는 남자가 슈트 재킷이 말려 들어간 것도 모르고 달려온 것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러고 달려온 거예요? 내가 걱정돼서?”

    말려 들어간 재킷 라펠을 똑바로 정리해 주며 물었다.

    “이러고 나온 줄도 몰랐네.”

    그가 민망하다는 듯이 연하게 웃었다.

    “이런 적 또 있었던 것 같아요.”

    재킷을 고쳐 입은 그가 눈썹을 치뜨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그다음 날이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퇴근길에 서후 씨가 재킷도 입다 말고, 브리프케이스도 안 잠그고. 나 퇴근하는 길에 따라 나왔었지 않아요?”

    그의 미소가 조금 진해졌다.

    “기억력도 좋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내 뺨을 보드랍게 감싼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맞아……. 그날도 이랬어. 혹시나 강재만이 또 따라붙을까 봐 걱정돼서, 정신없이 따라 나갔어.”

    “그러는 서후 씨도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내 아내랑 관련된 일은 다 기억해.”

    나직한 고백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두근거렸다.

    “그날 네가 무슨 옷을 입었었는지도, 전부 다.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나서, 옷 색깔이 화사해진 것도 알아. 귀고리도 안 하고 다니다가, 딱 붙는 진주 귀고리나 작은 링 귀고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알고.”

    “나에 대해 되게 많이 아네요.”

    감동에 겨워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신중을 기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많이 알아. 그런데 그만큼 알고 싶은 것도 많아.”

    내 머릿속을 헤집어 보고 싶은 눈빛이었지만, 그는 신뢰가 가득 담긴 말로 나를 달랬다.

    “할머니 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묻지 않았었지? 날 기다려 준 거잖아.”

    고개만 살짝 끄덕거렸다.

    “나도 너 믿고 기다릴게. 네가 지금 나한테 다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팔을 뻗어서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발꿈치도 바짝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포옹 때문에 상체가 뒤로 살짝 밀린 그가 낮게 웃었다.

    두꺼운 팔뚝을 내 등허리에 두르고,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라 다행이라는 의미 같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숲 향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이제 어떡해요,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 치려고 애써도! 우리의 운명이 바뀌지 않는 거라면요!’

    선준이 울부짖던 모습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두 팔에 힘을 주어 남편의 목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우리의 운명은 반드시 바뀔 거야.

    절대 이 남자가 내 곁을 떠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두려움보다 더 큰 신념이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

    [지금 나올 수 있는 거죠?]

    선준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아니라우!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왔다.

    손주 손에 있던 멸치를 빼앗은 그녀는 내장을 떼고는 환히 웃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거라고, 오라버니! 그 손은 곱기만 하지 쓸모가 하나도 없어! 어떻게 멸치 똥도 못 따?”

    “내 손이 왜 쓸모가 없어? 여기저기 쓰이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그는 할머니의 큰오빠 역할에 충실하며 멸치 내장을 제거하는 데 열중했다.

    “저기.”

    식탁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예쁜 언니 어디 가게?”

    할머니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물었다.

    “어.”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멸치를 내려놓고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지난번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친구요. 그 친구를 좀 만나고 와야 할 것 같아요.”

    나이가 달라도 친구라고 칭할 수는 있다. 선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거짓말도 아니다.

    “다녀와. 데려다줄까?”

    그의 자상한 물음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막연한 죽음을 선고받았던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늦지 않을 거예요. 저녁은 집에 와서 먹을게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그는 대문 앞까지 나를 배웅했다.

    “기사님이 약속 장소까지 같이 갈 거예요. 걱정 마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말하고 있었다.

    “담은아.”

    그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당겨 안았다.

    “너 친구 만나러 가는 거잖아. 그 정도는 해도 돼. 왜 그렇게 주눅이 들었어?”

    죽었다가 되살아오기까지,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단 한 번도 거역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고 있다는 처참한 기분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응, 그냥……. 큰일 치른 친구 만날 생각을 하니까.”

    그가 거리를 살짝 벌리며 이마를 맞댔다.

    “기분 좀 풀어 줘야겠다, 그럼.”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 나는 턱을 들어 올리며 다가오는 입술을 깊게 머금었다.

    맞닿은 혀가 부드럽고 녹녹하게 얽혔다. 이런 순간에도 전신에 열기가 돌 만큼 그는 매혹적이었다.

    아쉬운 듯 짧은 키스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나머지는 이따 집에 오면.”

    더운 숨결을 나눠마시며 속삭였다.

    “최대한 빨리 와야겠네요.”

    그가 진하게 웃으며 젖은 입술 근처를 엄지로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언젠가 이토록 다정한 남자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좋겠다.

    ***

    “여기예요.”

    선준의 집 앞에서 기사는 돌려보냈다.

    “여긴 너희 집 앞이잖아.”

    아파트 입구에 선 선준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우습죠? 그 남자, 주민등록상 거주지는 허름한 시골집이었는데……. 실상은 저랑 이웃이더라고요. 여기 살아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 보인 선준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얼른 선준을 뒤따르며 물었다.

    “살인 전과가 있다며?”

    “네, 있어요. 딱 한 번이요.”

    “딱 한 번? 인터뷰에서는 연쇄살인범이라고 했잖아.”

    선준도 그게 의아한 눈치였다.

    “그리고 이전의 삶에서는 살인이 지긋지긋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했어요. 근데 단 한 번의 살인만을 저지른 거죠.”

    그렇다면 남자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뜻인가?

    여전히 남자를 찾아가는 게 맞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우리가 이 남자를 만났다는 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테니까요. 만약 오늘 일을 발설할 경우, 법적 책임을 뒤따른다는 고지도 했어요. 물론 그보다 더 험한 일도 있을 수 있다는 말도 했고요.”

    선량한 비서였던 선준이 새삼 달라 보였다.

    “너 죽었다가 살아나더니, 협박도 제법 한다?”

    “나도 살 방법을 모색해야죠.”

    선준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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