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56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끗거리는 귀여운 내 남편.
나는 이불을 걷어 낸 뒤,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퉁퉁 쳤다.
“너 지금…….”
손끝으로 나를 가리키는 남편의 볼이 또다시 화르르 타오를 것처럼 붉어졌다.
얼음물을 떠올 정신은 있었어도, 아내에게 옷을 입힐 겨를은 없었나 보다.
“엄마얏!”
나는 흠칫 놀란 척 이불로 몸을 요염하게 감쌌다.
“하아, 정담은.”
이름 석 자에 대단히 많은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으응.”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대꾸하고는 허공으로 두 팔을 뻗었다.
남편이 이마에 드리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내 품에 폭 안겼다.
머리통을 가슴팍으로 당겨 안고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슥슥 넘겨주었다.
남편이 말랑말랑한 여체에 얼굴을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진짜 걱정했다구.”
그랬다구? 아구, 귀여운 내 남편.
정수리에 가만히 입을 맞추려는데,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난기 가득했던 분위기가 어느새 또 녹진녹진해지고 있었다.
“이제 괜찮은 거야?”
나는 속눈썹이 나부끼도록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대꾸했다.
“응, 괜찮아요.”
“그럼, 자자. 내일 아침부터 회의 있잖아.”
이게 아닌데?
그가 벌떡 일어나 내 옆에 다소곳이 누웠다.
이불로 친친 감은 몸을 통째로 당겨 안은 그가 손을 뻗어 협탁 등을 꺼 버렸다.
나는 멀뚱히 눈을 뜬 채로 그의 품에 안겼다.
“얼른 자.”
이럴 거면, 아까 야한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어보지나 말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깜빡했다.
아무 짓도 안 하고 눈만 깜빡였을 뿐인데, 그가 경고하듯 목을 흠 가다듬었다.
“정담은.”
“응?”
“간지러워.”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나 손도 이불 안에 있어.”
이불로 결박하듯 몸을 감싼 뒤 끌어안고 있으면서?
“네 속눈썹, 간지럽다고. 눈 그만 깜빡거려.”
내 속눈썹이 그의 턱 언저리에 닿아서 간지러운 듯했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는 더욱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너 진짜!”
결국, 귀여운 민서후는 내 속눈썹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
“어이, 문선준! 대학 다니는 재미가 좋은가 봐? 연락도 안 하고.”
오랜만에 선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한창 축제 준비로 정신없지 않아? 나 때는 말이야.”
본인이 틀린 수능 문제를 다 기억하고 있다던 선준은 대학 간판을 바꾸는 기염을 토했다.
- 대표니임.
축제의 계절 5월, 대학 생활로 한창 즐거워야 할 선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 저 어떡해요…….
급기야 목을 놓아 통곡을 시작한다.
“야, 너 왜 그래?”
집무실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던 나는 등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관자놀이에서 팔딱팔딱 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선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 우리 아버지가요…….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왜?”
- 돌아가셨어요.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급히 선준과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윤 비서, 나 급한 일 있어서 나가요. 이후 일정은 전부 취소해 줘요.”
자초지종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같은 날이에요. 지난 삶에서 돌아가신 날이랑, 같은 날 돌아가셨어요.’
울부짖었던 선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왕왕 울렸다.
어떻게 된 거야?
그 회사에 분명히 투자금이 들어갔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어졌는데!
서둘러 선준이 알려 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아직 조문객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은 장례식장은 어수선했다.
상복으로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는지, 선준은 과 점퍼를 입고 상조 회사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선준아.”
“대표님!”
선준이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어? 아버지가 갑자기 왜 돌아가셔?”
“사고였대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사고?”
“교통사고요. 상대편 차량이 역주행을 했대요. 그 차랑 부딪히고 아버지 차는 전복이 되었어요. 그놈은 그대로 달아났고요”
사고 현장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같은 날 돌아가실 수가 있냐고요!”
선준이 오열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회사 잘 굴러가고 있다고 했어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다고요. 어버이날에는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께 손편지도 써 드렸어요. 저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 돕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랬는데…….”
이제 좀 철이 들어가고 있는 아들의 곁을 아버지는 떠나 버렸다.
흐느껴 우는 선준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어머님은 어디 계셔?”
“응급실에 계실 거예요. 혼절하셨다가, 깨어나셨다가…….”
선준이 차게 식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안 바뀌나 봐요.”
“뭐가?”
불길함이 온몸을 에워싸고 있는 듯해서 소름이 와락 끼쳤다.
“미래는 바뀌지 않나 봐요.”
나는 고개조차 내젓지 못하고 차디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부모의 죽음을 우연한 사고라고 위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이제 어떡해요,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 치려고 애써도! 우리의 운명이 바뀌지 않는 거라면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일들이 너무 벅찼다. 미약한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일단 아버님 잘 보내 드리는 데, 집중해. 응? 어머님 잘 챙겨 드리고.”
“대표님?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사는 것처럼 까불던 녀석은 이전 생의 비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아. 나도 좀 놀라서 그래.”
선준이 흐느낌을 삼키며 손등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스산한 목소리로 읊조린 순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숨통이 조이는 듯 가슴이 갑갑해졌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듯했다.
돛을 올리고, 키를 움직이는 잔재주로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려는 시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탄 배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만약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면 내 남편 민서후는 지금으로부터 4년 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장례식 끝나고 나서, 우리 그 남자 찾아봐요. 네?”
선준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물었다.
“그 남자?”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퍼뜩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제가 괴담 책에서 찾았던 남자요. 40년을 거슬러 왔다는 남자.”
“맞아, 그런 남자가 있었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요.”
선준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남자요. 벌써 죽어 버렸으면 어쩌죠?”
“뭐?”
“그 남자가 이전 생에서 죽은 나이는 여든이었어요. 올해 여든이 됐을 거예요.”
초조함 때문인지 손끝이 저렸다.
“일단 아버님 장례식에 집중해. 응? 내가 종일 여길 지킬 수는 없어. 알지?”
선준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 보낼게. 장례식 도울 수 있게.”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번 생에서는 아직 선준과 내가 공식적으로 모르는 사이였다. 우리는 만난 적도 없었고, 얽힐 일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준의 장례식장에서 이 아이의 곁을 지키는 모습을 남편에게는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혹시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쯤 지나고 나서요.”
끔찍한 일을 떠올리는 선준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머님은 꼭 오래도록 네 곁에 계실 거야.”
선준을 위로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내 남편 민서후는 오래도록 내 곁에 있을 거라고.
“교통사고였잖아. 사고야, 선준아. 네 말대로 그 남자는 한번 찾아보는 게 좋겠다. 일단 아버님부터 잘 보내 드리고. 응?”
선준이 어깨가 들썩거리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선준을 일으키려는데, 핸드백 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남편이었다.
통곡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남편의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빈소 안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가는 선준을 뒤로하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어디야? 갑자기 사무실에서 나갔다던데, 무슨 일이야? 전화도 안 받고.]
그가 보낸 메시지를 마주하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운명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될 거란 점괘와 할머니의 삶까지,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남편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될까?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데?
4년 후에 당신이 죽을까 봐 겁이 난다고?
지금의 삶에서는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나는 진저리를 쳤다.
또다시 휴대전화가 울려 댔다.
나는 호흡을 여러 번 가다듬고는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