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55화
“날마다 기도하고, 굿을 하고, 치성을 드렸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어. 언제나 내가 할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거란 답을 얻으셨지. 그것도 아주 젊은 나이에 처자식도 없이 홀로 외로이 죽게 될 거라고.”
심장이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른침조차 삼킬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에 뻣뻣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할머니는 그 후로 신을 저버리셨어. 마치 새로 태어나는 것처럼 이름도 바꾸시고, 일을 그만두셨어.”
그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건조했다.
“신이 당신을 찾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지워 버리는 것처럼, 할머니는 기억을 잃어 갔어. 치매를 앓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할머니는 늘 오래전에 머물고 계신 것처럼 행동하시는 걸까요? 신을 받기 전으로 돌아가시고 싶으셔서요?”
미간을 살짝 좁힌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 걸까……. 그래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와 신혼생활을 했던 시점으로 돌아가시는 걸까.”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어떤 말로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할지, 나조차도 막막했다.
“아까 우리 집에 왔던 그 어르신이 내가 죽을 거라고 말했던 할머니의 친우야. 신내림을 같은 스승에게 받았다고 들었어.”
“혹시 집에 그런 분이 또 계셨어요?”
“아니. 없었대. 대를 이어서 신을 모시는 세습무가 있고, 신내림으로 신을 모시는 강신무가 있거든. 할머니는 강신무였어. 집에 그런 이력이 없어서 신내림을 거부했다고도 하셨고.”
원치 않는 삶의 형태를 견뎌 내는 고달픔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손주가 죽을 거라는 신의 목소리를 거부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잃어 가는 할머니를 떠올리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잘 모시고 싶었어. 가족을 전부 잃고도, 나 하나 잘 키우기 위해 무구(巫具)를 드셨고.”
아마도 할머니가 보물처럼 침대 밑에 숨겨둔 칠보 방울 팔찌는 그때 사용하던 무구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세상을 저버릴 수 있다는 말씀에 끝내 힘겹게 그걸 내려놓으셨으니까. 나 때문에 할머니께서 기억을 잃고, 자신도 잃어버리는 벌을 받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눈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일을 그만두시고, 이제 더는 고통받지 않으시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어.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 때문에 현재를 불행하게 사는 일은 이제 없을 거라는 생각도 했고……. 그런 일에 엮이는 일은…….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어르신을 대하던 그의 태도는 방어적이다 못해 공격적이었다.
“다시 할머니와 나를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사람이 집에 와 있는 걸 보니까 화가 나더라고. 게다가 지금은…….”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처럼 보여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 존재가 나라는 것을 아니까.
그는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손에 자랐지만, 할머니마저도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곁에 둔 소중한 이를 잃어 본 경험이 있는 남자다.
그러니 나를 지키고 싶어서 끔찍한 일은 입 밖으로도 내고 싶지 않은 거다.
나는 그저 할머니와 그의 고달픈 삶을 전해 들을 뿐이지만, 이들에게는 살아 있는 역사였다.
“울라고 한 이야기 아니야.”
그가 손을 뻗어서 내 뺨을 보드랍게 어루만져 주었다.
파르르 떨리려는 입술을 꽉 물었다가 놓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서후 씨 곁에 계속 있을 거예요.”
내가 당신을 살려 줄 거예요.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불행하게 살고, 그를 뒤흔들어 놓는 사람이 내가 되면 어쩌지?
아니야, 절대 그럴 일 없어. 지킬거야, 내가 이 남자를.
연구소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설계부터 싹 뜯어고쳤다.
민서후가 젊은 나이에 외롭게 세상을 떠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아까 그 어르신이 그러셨잖아요. 아내 하나는 잘 얻어서 천수를 누리게 될 거라고요.”
내 뺨을 감싸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서 가슴이 품듯이 했다.
그러고는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턱을 살짝 치켜들고는 반쯤 가라뜬 눈으로 나를 그윽하게 응시했다.
“내가 있으니까.”
내내 심각했던 그의 얼굴에 연한 미소가 고이기 시작했다.
“괜찮을 거예요.”
그의 손을 가슴에 품은 채로 단단한 허벅지 위에 살포시 주저앉았다.
그가 가라앉는 눈동자로 내 입술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뭐 하는 거야?”
“기분이 너무 가라앉은 것처럼 보여서요.”
나는 그의 손을 놓아주고는 목덜미에 팔을 걸었다.
그의 손길이 말랑말랑한 몸 선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래서 위로해 주려고?”
그에게 이마를 맞댄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지금 되게 우울한데……. 기분이 쉽게 풀릴지 모르겠네.”
미간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하는 모습이 귀엽다.
턱을 내밀어 그의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마른 입술에서는 벌써 불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한번 열심히 해 볼게요.”
그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뭘 열심히 하겠다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내려 갔다.
순식간에 그의 눈동자가 관능적으로 일렁거렸다.
광대 언저리가 붉었고,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담은아.”
그가 내 이름을 가만히 읊조렸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예쁘게 웃으려고 노력하며 블라우스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의 바지 버클을 푸는 동안, 그는 판판한 가슴이 들썩거리도록 거친 숨을 골랐다.
옷도 다 벗지 않은 채로 주저앉듯이 그를 품었다.
“하아.”
버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허리께를 움켜잡고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위로가, 돼요?”
그의 어깨에 팔을 얹고 지지대로 삼았다.
천천히 그의 몸 위를 맴돌 때마다 숨이 가빠 왔다.
“후우.”
그가 거친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대꾸했다.
“응.”
신음을 내지르지 않으려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그는 짓궂게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흐으.”
숨결과 함께 달뜬 소음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조용.”
속삭이듯 말한 그의 입술이 벌어진 내 입술 새를 파고들었다.
녹진하게 얽히며 짜릿함이 밀려왔다.
옷을 다 벗지 않은 탓에 천끼리 쓸리는 소음조차도 야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입안을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하아, 담은아.”
가까스로 입술을 뗀 그가 내 이름을 한 번 읊조리고는 허리를 안고 단숨에 자세를 바꿨다.
등이 매트리스에 닿자마자 격한 숨결이 터져 나왔다.
부족했던 무언가가 빠르고 강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흐읏. 서후 씨.”
그가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이를 갈 듯 중얼거렸다.
“이게 위로야? 도발이지?”
“그래서, 억울해요?”
“응, 조금.”
전혀 억울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억울하게 당하질 말든지.”
“그만, 까불어.”
평소와 달리 거친 모습에 나는 또다시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기억력이 안 좋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서후 씨 거칠게 굴면, 나 진짜 미칠 것 같아요.”
“진짜 거친 걸 못 봐서 그런 소리가 나오지.”
눈이 질끈 감겼다.
비명 같은 신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얼른 손등이라도 깨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입속으로 그의 검지와 중지가 불쑥 들어왔다.
“우리 신혼인 거 소문 안 내도, 다 알아.”
그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의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신음을 삼켰다.
거칠게 치닫는 통에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눈초리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질서하게 헝클어진 아내를 내려다보는 남편의 얼굴에는 흡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이 질끈 감기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 되었다.
오직 그를 품고, 그를 보듬어 주고 싶다는 바람만이 간절했다.
감당하기 버거운 신열이 올랐다.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고, 흐르지 못한 눈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서 물고 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서후 씨.”
“으응.”
그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응.”
“꼭 지켜 줄게요. 흐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온몸이 녹아내린 것만 같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이마에 닿았다.
“으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이 눈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힘이 쭉 빠진 손으로 그의 커다란 손을 움켰다.
그의 손이 차가웠다.
“뭐 해요?”
“몸이 너무 뜨거워서.”
그는 차가운 얼음물에 제 손을 담갔다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수건을 적셔서 하면 되지.”
“수건이 너무 거칠어서.”
수건이 거칠어 봐야 수건이지.
미련맞게 차가운 손을 끌어다가 가슴에 품었다.
“시원하다.”
“혹시 빈혈 때문에 이래?”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에서 혼절한 아내한테 그런 질문을 하다니. 순진한 거예요, 아니면 무책임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