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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54화

집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조수석 차창 밖만 내다보았다.

자꾸만 민망해져서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래?”

그가 내 손을 끌어다 잡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에요.”

“다른 걱정 있어?”

내가 말해 주지 않으면, 머릿속을 해부하기라도 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니이…….”

“그럼 왜 나를 쳐다보지도 않아. 걱정되게.”

그의 목소리에 배어나는 우려가 짙어지고 있었다.

“지금 창피해서 그런 거니까 그냥 좀 넘어가 줄래요?”

나는 상체를 조수석 차창 쪽으로 완전히 돌리고 앉은 상태였다.

“뭐가 그렇게 창피한데.”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진지하게 해야 했던 이야기인데…….”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살짝 기대며 읊조리듯 말을 이어 나갔다.

“홀딱 벗고 샤워하다가 울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유리창에 콩콩 이마를 찧자, 그가 내 어깨를 잡고는 돌려 앉혔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서 긴 머리를 늘어뜨려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하니까, 그냥 두라고요.”

그는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로, 오른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커튼 걷듯이 했다.

“내 눈엔 사랑스럽기만 해.”

손가락 등으로 내 뺨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정말요?”

“응. 너무 사랑스러워서, 우리 오늘 일찍 잠들기는 글렀다.”

야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남자 때문에 나는 또다시 수줍음에 얼굴을 붉혔다.

우리는 사이 좋은 신혼부부답게 두 손을 꼭 붙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맛있는 거 먹고 오는 거예요?”

집안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께서 우리를 반기며 살갑게 물으셨다.

“갑자기 저녁 먹고 온다고 연락 드려서 죄송해요.”

그의 상냥한 사과에 아주머니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한창 신혼인데, 둘만 있고 싶고 그럴 때지. 가끔 그렇게 둘이 시간 보내고 오고 그래요. 할머니 신경 쓰느라, 예쁜 새댁한테 소홀하지 말고. 앗 참! 할머니도 오래된 친구분이 찾아오셔서, 담소 나누고 계세요.”

미간을 살짝 구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래된 친구요?”

“응, 같이 저녁도 드시고. 오늘 저녁에는 할머님 정신도 맑으셔서 그런지, 오래 이야기하시네.”

거실에서 할머니 물건을 정리하던 요양 보호사가 아직 현관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부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지체 없이 할머니 침실 앞으로 걸어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할머니. 저희 왔습니다.”

그가 침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응, 나가마.”

할머니의 목소리도 평소 정신이 맑으실 때와는 사뭇 달랐다.

침실 문이 열리자, 하얀 한복을 입은 노인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장가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탁하고 묵직한 목소리는 예사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네.”

“네 각시는?”

그는 노인에게 나를 소개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뻔히 내가 뒤에 서 있는 걸 보고 있어서, 인사를 건네지 않을 수도 없었다.

노인이 턱을 쳐들고는 가라뜬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에서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후 군?”

노인은 나를 응시한 채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말씀하세요.”

나직하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분노라고 하기에는 너무 희미한 감정이 묻어났다.

“치매에 걸렸다기에 네 할머니가 진짜 노망이 나서 헛소리를 하나 했지.”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 겁니까?”

날카로운 어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자네는 조만간 나를 찾아오게 될 거야. 내가 꼭 필요한 일이 생길 거거든.”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노인은 유유히 걸어서 현관 앞으로 향했다.

“처 하나는 잘 얻어서, 하직 인사 접어 두고, 천수를 누리게 되었으니. 자네 안사람에게 잘하시게.”

노인이 한마디씩 힘주어 말할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싹 끼쳤다.

“노인네가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는 버릇은 여전하지. 저러니 우리 서후한테 미움을 사지.”

할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는 침실에서 나오셨다.

아무리 저녁 내내 정신이 맑으셨다고 해도, 오늘따라 할머니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랐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대꾸했다.

“내가 자네를 귀하게 여기는 줄 알고, 제 할미를 앗아갈까 봐 시샘이 났던 게지. 이제 고운 색시 얻었으니, 강짜는 접어 두려나?”

“저런 망측한 사람.”

나무라는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는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나, 가네. 또 보세. 떠나기 전에 자주 봐야지.”

“그러세. 또 오시게.”

오랜 세월을 함께한 여유가 느껴지는 친우의 작별 인사에서 서글픔이 묻어났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이들의 인사는 그 자체로 기나긴 헤어짐처럼 들렸다.

노인이 집 밖으로 나가고 나자, 그가 할머니를 붙들고는 미간을 잔뜩 구겼다.

“할머니,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해요.”

“해 보아라. 들으마.”

“저분과는 15년 넘게 안 만나셨잖아요. 왜 갑자기 집으로 들이신 거예요?”

할머니가 입술을 가늘게 맞물린 채로 크게 숨을 골랐다.

“서후야.”

“네, 할머니.”

“재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놈이 하는 말에도 가끔 새겨들을 말은 있는 법이다. 저놈이 하는 말이 고까워서,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이른 지가 벌써 15년이구나.”

손주를 바라보던 처연한 시선이 나에게 천천히 옮겨 왔다.

“안사람에게 잘하라는 말. 새겨듣거라.”

검은 우물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한없이 맑았다. 눈동자를 둘러싼 흰자위는 푸른빛이 돌 만큼 투명했다.

할머니의 눈이 이토록 신비로운 빛을 띠었던 적은 없었다.

“할머니, 서후 씨 저한테 정말 잘해 줘요. 정말요.”

나는 빙긋이 웃으며 할머니께 다가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아가, 너는 아까 그이가 하고 간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마치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처럼 할머니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입을 슬쩍 벌린 채로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내 언제 정신을 놓을지 모르니 일러두마.” 

주름진 손으로 내 손등을 덮으시고는 할머니가 먼 곳을 바라보듯 허공을 가늠했다.

“집채만 한 파도가 오고 있구나. 쓸려가지 않도록 손을 꼭 붙들고 있거라.”

할머니는 모호한 말씀을 하시고는 침실로 향하셨다.

그는 낭패감 어린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일하는 사람들은 집 안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서후 씨, 나 할 말 있어요.”

천천히 시선을 든 그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남편의 손을 붙들고 침실로 향했다.

우리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잠시 침묵했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친우인 어르신은 어디까지 볼 수 있는 걸까?

나의 존재도 온전히 알아차린 걸까?

집채만 한 파도가 오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일단 할머니의 일에 관해 내가 미루어 짐작한 것부터 이야기를 꺼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가을에 우리가 이 집 마당에서 소풍 도시락을 먹었던 날이요.”

“음.”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서후 씨가 부엌 정리하는 동안, 내가 할머니 침실에 따라 들어갔던 거 기억나요?”

“응, 기억나.”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 할머니께서 보물 상자라면서 침대 아래서 상자 하나를 꺼내서 보여 주셨어요.”

“침대 아래서?”

그가 미간을 슬쩍 구겼다.

“큰오빠가 알면 화를 낼 거라면서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보물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었는데?”

그는 상자의 정체를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나무 상자 안에 칠보 방울이 달린 가죽 팔찌가 들어 있었어요. 칠보 방울에는 띠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새겨져 있었고요.”

한숨을 몰아쉰 그가 고개를 젖히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에게는 꽤 고단한 이야기인 듯했다.

“그때 그냥 어렴풋이 짐작했어요. 할머니께서 어떤 일을 하셨을지.”

그가 고개를 내려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굳이 할머니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물을 생각도 없었고요. 이제는 그 일을 하시지 않는데, 서후 씨가 나한테 설명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안 물어봤고요.”

“쉬쉬했던 건 맞아. 그런데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야. 나도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 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할머니께서도 그 일을 하는 걸 달갑지 않아 하셨어. 끝내 신을 거부하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중에는 아들 내외가 죽었으니까. 신병이 가족을 못살게 구는 형태로 나타난 거라고 했어. 믿기 힘든 이야기겠지만, 할머니의 삶이 그랬어.”

그는 마치 할머니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처럼 건조하게 말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신이 있다고 믿어?”

그가 물었다.

“나는 있다고 믿어요.”

“네가 믿는 신과 할머니가 모시는 신은 다를 텐데?”

“그래도 신은 있다고 믿어요, 나는.”

내 삶을 되돌린 누군가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모시던 그 신이……. 할머니의 친우를 통해 끔찍한 말씀을 하셨어.”

“뭐라고요?”

그가 나를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죽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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