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52화
도대체 찌라시에 떴다는 이야기가 뭘까?
수아의 음흉한 웃음을 보니,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자, 봐 봐.”
종이컵을 입에 물고 휴대전화를 내 눈앞으로 내민 수아가 키득거렸다.
『얼마 전 결혼한 모 그룹 회장 맏딸.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고 하나, 공항과 호텔 로비에서 목격된 게 전부. 결혼이 쇼가 아니냐는 소리가 나돌 정도였음.
늦은 밤 회장 사위로 추측되는 인물이 호텔 지하 아케이드 편의점에 나타남. 캡 모자에 후드티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훈내가 모자를 뚫고 나왔다고.
편의점 야간 알바의 말에 따르면, 매대에 있던 피임 도구를 싹 쓸어갔다고 함. 신혼여행에 대한 준비성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준비했는데 모자랐는지 의견이 분분함.』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이라며 실소했다.
“모자라서 사러 간 거야.”
수아가 종이컵을 입에 문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느릿하게 손뼉을 쳐 댔다.
“왜? 뭐?”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어서 편의점에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는데, 이런 찌라시가 나도는 것을 보니 같이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만약 같이 내려가서 매대를 쓸어 왔으면 어떤 찌라시가 돌았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정담은이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모자라서 갔다고 대답하다니……. 재미가 하나도 없네? 놀려 주려고 했는데.”
“유수아 대리, 이제 우리한테 신경 끄고 일하세요.”
“네, 이사님. 쉬시는 동안 두 분이 마트에서 장도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웅그룹에서 마트 및 유통 사업에 진출하냐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별게 다 사업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네요. 고려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과장된 인사를 나누고는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결혼하고도 한동안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될 거란 예상은 적중했다.
이제 나의 사생활에 쏟아진 관심을 사업적 영역으로 확대할 타이밍이었다.
그 첫 번째는 기업 상생 프로젝트였다.
“대기업이 계열사를 거느리고, 경제 생태계를 독식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자는 일환에서 착수한 프로젝트입니다.”
나는 프로젝터 리모컨 버튼을 한 번 누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보시는 바와 같이, 상생 프로젝트 1차 선발 기업 명단입니다.”
임원들이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본 기업들이 선택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전 나눠드린 자료를 참조 부탁드립니다.”
토를 다는 임원이 하나도 없었다.
‘정담은 이사’는 대중의 주목을 한눈에 받고 있었다.
결혼식이 진행되고 정웅그룹의 전 계열사 주식이 올랐고, 그 덕에 그룹 시가 총액이 증가한 것도 당연한 순서였다.
내가 속한 정웅에너지는 날마다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감히 제동을 걸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본 프로젝트의 기업 명단에는 당연히 선준의 부친 회사가 들어가 있었다.
다 무너져 가는 회사를 무턱대고 살려 줄 수는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해당 회사는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알짜배기 중소기업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나는 선준에게 간단한 문자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선준아. 투자 결정 났어.]
[응, 고마워. 누나.]
[고맙기는. 어려운 조건 아니었어. 너희 아버지가 열심히 일구신 결과야. 앞으로 강재만한테 휘둘리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백헌전자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으니, 당분간 강재만은 거기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일을 일단락 지은 나는 스스로에게 상을 내리기로 했다.
내 남편 얼굴 감상하기!
떠들썩하게 결혼했으니, 이제 자중할 시기가 오고 있었다.
본부장실에 쳐들어가서 데스크 위를 쓸어 버리고, 그 위에 내 남자를 눕히는 것은 상상으로만 끝내야 했다.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민서후는 미간을 살짝 좁힌 채로 PC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와, 대한민국 직장인이 어떻게 거북목도 없어?
항상 반듯한 자세로 우아하게 앉아 있는 남자는 전생에 최소 귀족이었을 것이다.
데스크 위에 놓인 종이를 사르륵 넘기는 기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는데,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저 손가락이 주는 즐거움을 잘 아는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어휴, 주책이야.
나는 불순한 망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내젓고는 이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또 저런다.”
얼마 전 아내는 비장한 얼굴로 선전포고를 하듯 말했었다.
‘우리가 결혼으로 큰 주목을 받았잖아요? 이제는 프로페셔녈 한 모습을 보일 차례예요.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일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회사에서 일을 해야지, 뭘 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심각하게 각오를 다지는 아내에게 저렇게 되물을 수는 없었다.
연애 시절,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이 더러워진다고 깜찍한 고백을 털어놓았던 그녀는 요즘 본부장실 밖에 귀신처럼 나타나곤 한다.
유리 벽 너머에서 녹진한 시선으로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사라진다.
그냥 들어오든지.
이제 와서 임직원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겠다고 노력하려는 자세가 가상하기는 했다.
귀엽기는.
마침 정담은 이사와 논의해야 할 사항이 있어서, 태블릿 PC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일인지 이사실 유리 벽이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다.
“정 이사님, 누구랑 이야기 중인가요?”
이사실 앞 데스크에 앉아 있던 비서가 아니라며 상냥하게 웃었다.
“들어가 보세요. 임원 회의 끝나고 내려오셔서, 잠깐 블라인드 내리셨어요.”
아무리 아내의 집무실이라고 해도, 굳게 닫힌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나무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이지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던 그녀가 문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가운 기색으로 예쁘게 일렁거린다.
“무슨 일인가요, 본부장님?”
시치미를 뚝 떼고 사무적인 척 애쓰는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연구소 설계 완성본 나왔습니다. 함께 보시죠.”
“그래요. 같이 볼까요?”
원형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아서 태블릿 PC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이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전 조항을 더 강화했습니다. 아래 노란 선이 유틸리티 중에서도 고위험 머티리얼이 지나가게 될 배관입니다.”
“고생 많았겠어요. 이거 나한테도 보내 줘요.”
“연구소 설계 공유 폴더에 올려 두었습니다. 공식 브리핑은 내일 오후로 잡겠습니다.”
“그래요.”
복잡한 CAD 도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 모두 태블릿 PC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던 터라 멀지 않은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릴 동안 시선이 얽혔을 뿐인데, 그녀의 광대 언저리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또 무슨 생각으로 머릿속을 더럽히고 있어서?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사님.”
침대 생각을 하고 있냐는 말이었다.
“임원 회의 끝나고 나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조금 고단하네요.”
그녀는 끝까지 선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있는 힘껏 자제력을 발휘하는 귀여운 아내를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긴 웨이브 머리를 올려 묶은 덕에 하얀 목선이 매혹적으로 드러났다.
보드라운 잔머리가 흩어져 있는 뒷목을 왼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으응?”
그녀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이 많이 뭉쳤네요.”
회사에서 다른 직원한테 무턱대고 이런 짓을 하면 잡혀갈 거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며, 이사님의 피로가 걱정되는 본부장처럼 굴었다.
중지와 엄지로 머리카락과 목의 경계에 옴폭 팬 곳을 은근히 누르며 주물러 주었다.
“흐음.”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과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붉어진 뺨이며, 더운 숨을 내뱉는 도톰한 입술, 숨결 사이로 흐르는 억눌린 신음까지.
요즘 그녀가 침대 위에서 보여 주는 얼굴 그대로였다.
“시원해요?”
“으응.”
그녀가 신음인 듯 대꾸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달콤하게 반짝거렸다.
무자비하게 벌리고 들어가서 녹진하게 얽히고 싶은 열망이 무섭도록 빠르게 일어났다.
솜털이 부드럽게 일어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리자, 그녀가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제 남편을 응시했다.
“이사님.”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오후의 햇살이 무색하리만큼 탁했다.
“뭐 필요해요?”
혀를 살짝 내밀어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모이는 지점을 살짝 핥았다.
그녀가 침을 꼴깍 삼켰다.
“필요해요.”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달큼하게 녹아 있었다.
“갈증 나요?”
목이 마른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모습은 참지 못할 만큼 자극적이다.
“목이 마른 것 같기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조금 전까지 민트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는지, 맞닿은 그녀의 혀에서는 레몬민트 향이 전해졌다.
갈증이 난다고 말했던 사람은 그녀인데, 나는 기갈이라도 난 것처럼 그녀를 거세게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