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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51화

    “장모님이 귀한 걸 보내 주셨네.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처제.”

    “아, 네. 형부.”

    여은에게서 반찬 꾸러미를 건네받은 그는 눈치껏 부엌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와, 언니 집 전체 다 합쳐도 우리 집 거실보다 작겠다. 그치?”

    여은이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사람을 보내도 될 텐데, 왜 네가 직접 왔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집 안을 샅샅이 둘러보던 여은이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언니 신혼집이 어떤지 궁금해서. 나 구경 좀 시켜 주면 안 돼?”

    하나밖에 없는 언니의 신혼집이 궁금했을 수도 있다.

    “그래.”

    “침실은 어디야?”

    “따라와.”

    여은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 뒤를 쪼르르 따랐다.

    “와,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방 같아.”

    그러니까 얘 말은 앨리스가 커졌을 때, 방이 작게 느껴졌던…… 그걸 말하는 거다.

    여은은 등 뒤로 손을 뻗어 침실 문을 닫고는 나에게 성큼 다가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아직 혼인신고는 안 한 거지?”

    “어.”

    여은이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도 바로 가질 생각은 없는 거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랫입술을 살짝 짓씹은 여은이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언니가 그냥 한번 살아 봤으면 좋겠어. 혼인신고도 당분간 하지 말고, 아이도 갖지 말고. 응? 나중에 마음이 변해서 헤어지는 일이 있어도 복잡해지지 않게.”

    “여은아.”

    내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은이 말을 이었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길어 봐야 2년에서 3년이야. 도파민의 지배력이 겨우 그 정도야. 도파민이 끝나고 나면 뭐가 오는지 알아? 그땐 그냥 삶이야. 언니 삶. 언니가 이런 집에서 신혼을 시작할 줄은 진짜 몰랐어.”

    여은이 방 안을 둘러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런 집? 이런 집이 어떤 집인데?”

    “너무 좁고, 낡았잖아. 차라리 큰 집으로 이사를 하지 그랬어. 우리 집 근처로 오든지. 형부야 그럴 만한 능력이 안 되겠지만, 언니는 재산 꽤 있잖아.”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철없는 동생을 향해 돋아난 분노를 잠시 삭일 필요가 있었다.

    “여은아.”

    “언니 내 말 새겨들어. 진짜 언니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집에서 살아? 살다가 아닌 것 같으면 헤어져.”

    “여은아, 언니가 하는 말 잘 들어.”

    여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침착한 얼굴을 했다.

    “이곳은 언니가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집이기도 하고, 네 형부가 평생을 살아온 곳이기도 해. 형부의 삶이 담긴 집이고, 우리 두 사람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곳이야. 나한테는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소중하고, 안락한 집이라는 뜻이지.”

    동생의 낯빛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너 지금 실수했어. 사과해.”

    “아니, 나는 언니 생각해서…….”

    시선을 피하는 여은이 말끝을 흐렸다.

    “언니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면, 이 집에서 행복하길 빌어 줘야지. 아직 결혼한 지 열흘도 안 된 언니한테 혼인신고 하지 말고, 아이……? 그래, 아이도 낳지 말고, 마음이 변하면 헤어지라고?”

    금이야 옥이야 자란 여은은 남한테 싫은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언니의 꾸지람을 듣는 여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나이만 스물이면 뭐 해, 어리숙해서는.

    “너 선 세게 넘은 거야. 혼인신고나 아이 문제는 나랑 형부가 결정할 문제야. 축복을 빌어 주는 것도 아니고.”

    뒷마당에서 증손주에게 나무를 남겨 주고 싶다고 했던 할머니가 생각나서 울컥했다.

    나를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나의 막연한 행복을 상상하는데, 거의 평생을 함께한 동생이 하는 독설에 가슴이 아팠다.

    “하나밖에 없는 언니가 결혼했는데, 행복을 빌어 주기는커녕……. 신혼 침실에서 그런 말 하는 거, 너 되게 예의 없는 거야.”

    “미안해, 나는 언니를 위해서…….”

    한평생을 살다가 돌아온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여은은 아니었다.

    지금 여은의 모습은 과거의 나를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있는 집에서 귀하게 자란 탓에, 그들이 사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상태.

    그렇게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보았으니, 강재만 같은 놈과 결혼하는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아마 조건을 맞춘 그 결혼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여겼을 테니까.

    “미안하면, 앞으로 조심하면 돼. 이제 너 스무 살이야. 지금까지 하고는 다른 삶을 살아 봐. 엄마, 아빠가 시키는 대로만 살지 말고. 네가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편견도 버려. 아니,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걸 선하게 사용할 궁리를 해 봐.”

    여은이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절 나와 여은에게는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여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까?

    “언니, 멋있다.”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여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까 그런 소리 해서 미안해.”

    “혹시 엄마가 시킨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우리 엄마 은근히 형부 좋아해. 사람 바르고 진중하다고.”

    “의외네.”

    내 반응에 여은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스무 살이면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넓은 세상을 배울 준비가 되었을 뿐. 여전히 어린 나이다.

    여은이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지!

    새로 시작한 삶을 향한 내 다짐이 하나씩 늘어 갔다.

    “이거. 아까 반찬 꾸러미 속에 있던 거야.”

    잠들기 전 그가 나에게 내민 것은 하얀 봉투였다.

    “이게 뭐예요?”

    설마 엄마가 봉투 안에 불미스러운 물건을 넣은 것은 아닌가, 불안해졌다.

    예를 들면 돈이라든가, 돈 같은 거.

    그런데 봉투 안에는 뜻밖에도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내 딸 담은아.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니? 엄마가 이것저것 가르쳐서 결혼시켰어야 했는데……. 엄마도 집안일은 서툴잖아. 네가 좋아하는 반찬도 직접 만들어서 보내 주고 싶었는데, 내가 주방에서 난리를 피우는 걸 보고선 조리장이 나가라고 인상을 쓰지 뭐니. 엄마 노릇 하기가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있나 싶네. 요즘 네 아버지가 종일 네 얘기만 하셔. 우리 담은이가 회의 때 무슨 말을 했다, 우리 담은이가 이렇게 일 처리를 잘한다. 그리고 민 서방 이야기도 자주 하고. 민 서방 평판이 워낙 좋아서, 아버지 면이 선다고 하시더라.

    아버지랑 결혼하고, 너희 둘 낳고 키우면서……. 요즘처럼 우리 가족 이야기만 했던 적도 없는 것 같아.

    아버지가 즐거워하시니까, 엄마도 좋다. 반찬은 또 보내 줄게. 아끼지 말고 많이 먹어. 민 서방이 뭐 좋아하는지도 알려 주고.」

    어느새 눈가가 뜨거워졌다. 어머니의 관심사는 늘 집 밖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사교 모임에서 더 돋보일지 고심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뚝뚝했던 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하면서 어머니에게도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편지였어?”

    편지를 다 읽고 나자, 그가 화장대 의자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서는 물었다.

    “응.”

    “근데 울어? 엄마 보고 싶어서?”

    나는 어린애처럼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말에 뵈러 가기로 했어.”

    이미 어머니와 약속을 잡았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까 반찬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고, 내가 먼저 전화드렸어. 이번에는 담은이가 좋아하는 반찬만 보내셨다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물어보시던데?”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장모에게 감사 전화를 한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리고 전화한 사위에게 어떤 반찬이 좋은지 물었다는 어머니도 감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이 되기 위해서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과정이 이토록 가슴 뭉클한 일인 줄은 몰랐다.

    ***

    “어? 오늘부터 출근하십니까, 정담은 이사님?”

    로비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 수아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서며 웃었다.

    “네, 유수아 대리. 좋은 아침이네요.”

    “야, 너 오늘 점심 나랑 못 먹겠지? 사무실 컴퓨터 켜고, 잠깐 커피 오케이?”

    위치가 달라졌는데도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수아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사실에 도착하자 비서가 따라 들어와 오늘 일정을 브리핑했다.

    컴퓨터 전원은 이미 비서가 켜 둔 상태였고, 바로 업무에 돌입할 수 있도록 시스템에 로그인도 되어 있었다.

    수아가 이사실 유리 벽 밖을 지나가며 발코니 휴게실로 나오라고 손가락질을 해 댔다.

    “저 커피 한 잔만 할게요.”

    “어떤 거로 준비할까요?”

    “아니, 커피는 내가 알아서 마실게요. 나가서 일 봐요.”

    비서를 내보내고, 나는 곧장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

    내가 나가자 휴식을 취하던 직원들이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갔다.

    “와, 정담은 이사님. 청소기가 따로 없네. 평소에는 저 인간들 여기서 30분은 죽치고 있다가 들어가는데.”

    “잘 지냈어? 별일 없었고?”

    “나야, 뭐 똑같지.”

    눈빛이 음흉한 게, 수아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너 찌라시 봤어?”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국내 각종 찌라시에 정통한 대한민국의 대리 아니랄까 봐.

    “찌라시에 너희 부부 이야기 뜬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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