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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50화

    늦은 밤, 그의 집 아니 이제 우리의 신혼집이 된 집 앞에 도착한 우리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서후 건강하고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춘 기도 소리가 마당을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나무 테이블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 중이었다.

    “할머니.”

    그가 할머니를 일깨우듯 고요한 목소리를 냈다.

    손자의 목소리에 할머니가 퍼뜩 돌아보았다.

    “아이구! 우리 서후 왔구나! 잘 다녀왔어?”

    한달음에 우리 곁으로 달려온 할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그의 얼굴을 보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좋은 데서 자면서, 좋은 것만 먹었을 텐데.”

    할머니, 그게요. 좋은 데서 잠은 안 자고 딴짓하고, 룸서비스만 죽지 않을 만큼 먹었거든요.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요.

    나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만 떠들어 댔다.

    “저녁 아직이지?”

    할머니가 내게 손을 뻗으셨다. 나는 얼른 할머니의 손을 잡고 웃었다.

    “네, 공항에서 바로 오느라 아직 안 먹었어요.”

    “저런, 배 많이 고프겠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내내 할머니 뒤에 서 있던 요양 보호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어르신도 여태 손주 내외 기다리시느라 식사 못 하셨어.”

    할머니는 내 손을 꼭 붙들고는 집 안으로 이끄셨다.

    “어서 들어가자. 내 새끼들 밥부터 먹어야지.”

    할머니는 나에게 부엌에 얼씬도 하지 말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부엌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두 사람 있었고, 할머니를 전담으로 돌볼 요양 보호사도 두 사람 더 고용했다.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요양 보호사가 지쳐서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일정 배치에도 신경을 썼다.

    “저희 없는 동안 할머님 어떠셨어요?”

    그동안 할머니를 전담으로 돌봐주셨던 요양 보호사에게 물었다.

    “어제까지는 평소하고 비슷하셨는데, 오늘은 놀랍도록 정신이 맑으셨어. 내내 우리 서후랑 담은이는 언제 오나, 하고 마당을 왔다 갔다 하셨어.”

    “할머니께서 저도 찾으셨어요?”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치매 노인이 정신이 돌아와서 나를 찾았다는 말에 괜히 기분이 울컥해졌다.

    “응. 할머니가 새댁을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마당에 계시다가, 부엌에 오셔서 저녁 준비하셨다가……. 할머니 오늘 고단하실 거야.”

    할머니가 준비한 저녁상은 잔칫상이 따로 없었다.

    “와, 할머니! 잔치해도 되겠어요! 잘 먹겠습니다!”

    “이 정도로, 뭘. 나중에 진짜 잔칫상을 한번 보여 줘야겠구먼.”

    인자한 웃음을 짓는 할머니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고단한 나머지 곧장 침실로 향했다.

    무채색으로 건조해 보였던 그의 침실은 내가 고른 따스한 색감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하얀색 가죽 헤드 보드와 파란색 사각 체크 패턴 침대, 하얀색 시폰 커튼, 작고 아담한 화이트 오크 원목 화장대, 노란색 협탁 등의 조화가 사랑스러웠다.

    그의 방은 두 사람이 멀리 떨어질 수 있을 만큼 크지도 않았고, 너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지도 않았다.

    신혼 생활을 시작하기에 딱 알맞은 크기의 침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내가 침실을 둘러보고 감탄하는 동안, 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무 좋다!”

    나는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폴짝폴짝 뛰어 댔다.

    “마음에 들어?”

    “다 내가 좋아하는 거로만 골랐는데요? 침대도, 커튼도, 화장대도……. 그리고 무엇보다 내 남편도.”

    그는 연하게 웃으며 내 등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이 방에 방음 장치는 없으니까. 호텔에 있을 때처럼 막 소리 지르고 그러면 곤란해.”

    “내가 언제 소리를 질렀다고 그래요?”

    시치미를 뚝 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또다시 짓궂게 변하기 시작했다.

    음란한 민서후로 돌변하기 직전의 눈빛이었다.

    “샤워해야지.”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서 열기가 돋아났다. 갑자기 숨이 막힐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응.”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가 손가락 등으로 내 뺨을 보드랍게 쓸어내렸다.

    “피곤할 텐데……. 씻겨 줄까?”

    “얌전히 씻겨 주기만 한다고 약속하면요.”

    다행스럽게도 그의 침실에는 작은 욕실이 딸려 있었다.

    “그럼, 얌전히 씻어야지. 요란하게 씻을까?”

    놀리듯 말하는 그를 따라서 나는 속는 셈 치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읍!”

    그래도 막지 못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조용히.”

    조용히 하라면서 이러는 건 반칙이지!

    항변하듯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손길에 나는 또다시 녹아내리고 말았다.

    ***

    신혼여행은 짧게 다녀왔지만, 일주일간의 휴가를 더 받을 수 있었다.

    휴가 동안 나는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기도 하고, 그와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기도 했으며, 부엌에 서서 어설픈 솜씨로 김치볶음밥을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 여기 뭐 심으시려고요?”

    단독주택의 뒷마당에는 오래전 할머니가 가꾸셨다는 텃밭이 있었다.

    몇 년째 방치된 탓에 텃밭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응, 완두콩이랑, 감자랑 심으려고. 다음 주에는 상추도 심고.”

    “와, 그럼 여기서 콩도 나도, 감자도 나고, 상추도 나는 거예요?”

    내 물음에 할머니는 고운 웃음을 머금으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저 옆에는 나무를 한 그루 심었으면 좋겠구나.”

    “나무요?”

    텅 빈 뒤뜰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장성한 나무 한 그루를 상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후가 태어났을 때도 나무를 한 그루 심어 주고 싶었거든. 서후가 자라면 쉴 그늘이 되어 줄 튼튼한 나무 말이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여유가 없었어. 이제 증손주를 위해서 나무 한 그루 남겨 주고 싶구나.”

    빈 땅을 바라보시던 할머니가 나를 보며 연하게 웃었다.

    “할머니. 증손주 보고 싶으세요?”

    할머니! 제가 예쁜 증손주 꼭 안겨 드릴게요!

    이런 말이 입 밖으로 섣불리 나오질 않았다.

    “아가.”

    자상하게 나를 ‘아가’ 하고 불러 주실 때는 가슴속에 따듯한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기분이 말랑말랑해졌다.

    “네, 할머니.”

    할머니는 맨손으로 흙을 고르고 있었다.

    “예쁜 아이가 태어날 게야. 소나무를 심어야 하나. 오동나무를 심어야 하나.”

    “왜 하필 소나무랑 오동나무예요?”

    아이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든든한 대들보를 세운다는 의미로 소나무를 심고, 딸을 낳으면 나중에 시집갈 때 고운 장을 짜 주려고 오동나무를 심지.”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텃밭의 흙더미를 내려다보았다.

    밭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라지 못한다.

    황무지가 된 듯한 기분을 가눌 수 없어서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아가.”

    “네, 할머니.”

    “소나무, 오동나무……. 골고루 심어야겠다. 나무랑 키 재기 하면서 뛰노는 애들 웃음소리가 듣기 좋구나.”

    할머니는 또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셨다.

    “할머님. 만약 제가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머니의 정신이 가끔 맑아질 때면, 나는 어쩐 일인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생각만 하려무나. 좋은 사람을 곁에 두고,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건 복된 일이잖니. 애석하게도 그 복이 아무한테나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지?”

    할머니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 할머니.”

    고개를 주억거린 할머니는 다시 흙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의 곁에 앉아서 주름진 손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가 내 옆에 다가와 앉으며 자상하게 물었다.

    “밭을 열심히 가꿔야겠어요. 몇 년 내버려 뒀다고 엉망이네.”

    “쉬엄쉬엄해. 힘들어.”

    그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들어가자고 눈치를 주었다.

    “그래. 여기는 내가 있을게. 들어가요. 손님도 왔는데.”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가 할머니 곁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손님이 왔어요?”

    그가 내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꾸했다.

    “응, 손님 왔어. 깜짝 놀랄 손님.”

    나는 그에게 손을 붙들린 채로 집 안으로 향했다.

    현관에는 하얀색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언니!”

    소파에 앉아서 집 안을 둘러보던 여은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응, 엄마가 반찬 좀 갖다 주라고 해서.”

    “엄마가?”

    생전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집안일은 고용된 사람들의 몫이었고, 어머니는 평판을 신경 쓰는 일에만 급급했다.

    “엄마가 반찬을 보냈다고?”

    여은이 금색 보자기로 싼 묵직한 꾸러미를 들어 보였다.

    반찬을 전해 주라는 말은 핑계일 것이다.

    여은을 통해 나의 신혼 생활을 엿보려는 의도가 빤히 읽혔다.

    집 안을 둘러보는 여은의 눈동자에 얽힌 경계심이 그걸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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