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49화
신혼 여행을 통해 나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나의 적성과 흥미를 찾게 되었다.
나의 적성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거였고, 나의 흥미는 나를 덮치는 민서후에게 집중되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적성에 맞는 흥미로운 일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제주도의 푸른 바다?
호텔 방에서 실컷 보았다.
제주도의 푸른 밤?
호텔 방에 누워서 보냈다.
호텔 38층 라운지에서 보는 야경이 근사하다던데, 36층 객실 침대 위에서 보는 야경도 충분히 근사했다.
벚꽃이 흩날리는 언덕에서 입으려고 준비한 하얀색 원피스도, 해변을 거닐며 쓰려고 했던 밀짚모자도 전부 빛을 보지 못했다.
“배가 좀 고픈 것 같은데요.”
침대 위를 뒹굴뒹굴하던 나는 그의 두툼한 가슴팍을 턱을 대고 엎드렸다.
“뭐 먹고 싶어?”
“수플레 팬케이크에 시럽 잔뜩 뿌려서, 딸기랑 먹고 싶어요.”
그는 대단한 사명감에 젖은 눈빛을 빛내고는 침대 옆 협탁에 자리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내가 말한 대로 룸서비스를 주문한 그를 바라보는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쁨이 차오른다.
“30분 정도 걸릴 것 같다는데?”
통화를 마친 그가 내 옆구리 아래로 손을 넣어서 당겨 안았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몸 위로 올라탄 상태였다.
“30분 동안 뭘 할까요?”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긴 머리카락이 그의 목 안쪽으로 쏟아졌다.
간지러운지 미간을 살짝 찡그리는 남자는 미치도록 섹시했다.
“글쎄.”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그의 손이 옆구리를 타고 천천히 올라왔다.
우리는 수플레 팬케이크가 도착할 때까지 서로를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침대 시트가 엉망이야. 갈아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쓰레기장에서 그와 뒹군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았다.
“나는 괜찮은데.”
하지만 그는 망가진 침대 시트 위에 나를 눕힐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 우리 침대 시트 바꾸는 동안 밖에 나가 있어야 해요?”
그도 밖에 나가는 건 원치 않는 눈치였다.
신혼여행에 임하는 자세가 아주 바람직한 남편이다.
“잠깐만, 기다려 봐.”
그길로 욕실에 들어가 버린 그는 커다란 원형 욕조에 거품이 보글보글 차오르도록 물을 가득 받았다.
“객실 전용 버틀러한테 침대만 다시 정리해 달라고 했어. 우리는 그동안 욕조에 있자.”
나는 알몸에 이불을 둘둘 만 채로 욕실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뭐야, 이건. 거추장스럽게.”
그가 이불을 홱 잡아끌어서 침대 위로 던지고 두꺼운 팔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꺄악!”
무섭지도 않으면서 나는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제주도까지 와서 바닷물에 발 한 번 못 담가서 아쉽지? 내가 욕조에 퐁당 빠뜨려 줄게.”
그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얌전히 내려놔요! 확 놓기만 해 봐, 진짜!”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겁을 준 것도 아닌데, 나는 그의 목에 매달려서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욕조 앞에 선 그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진짜 하기만 해 봐!”
나는 거대한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처럼 그의 목에 팔을 친친 감았다.
“두울!”
“진짜로?”
다리를 버둥거리며 그의 몸에 어떻게든 달라붙으려고 애를 썼다.
“셋!”
“하지…….”
말을 채 내뱉기 전에 두 다리가 타일 바닥에 닿았다.
그때 객실 주 출입구를 통해 버틀러가 들어왔다는 알람이 욕실에 설치된 스마트 패드에 나타났다.
“이제 소리 내지 말고. 조용.”
워낙 규모가 큰 객실이고, 방음이 잘되어 있는 스위트룸이었다. 욕실에서 좀 떠든다고 해도 밖에까지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숨어서 못된 짓을 하는 남자처럼 짓궂게 웃었다.
“어차피 밖에 안 들릴 텐데요.”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어 대꾸하자, 그가 내 허리를 홱 돌려세웠다.
거울 속에 그와 내가 포개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쥐고는 거울로 나를 바라보며 맨어깨에 입을 맞췄다.
녹진하게 닿은 것도 아닌데, 발끝이 말릴 정도로 열기가 치솟는다.
그의 입술이 살갗 위에서 미끄러지자,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눈꺼풀이 살짝 내려앉았지만, 눈을 완전히 감을 수는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그와 나의 관능적인 반사체에 완벽하게 매혹된 나는 목소리를 죽이고, 숨을 헐떡였다.
“서후 씨.”
“으응.”
그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가 된 것처럼 상냥하게 대꾸했지만, 나를 안는 그의 몸짓은 그렇지 못했다.
옆구리를 더듬거리며 올라온 손길이 물방울 모양으로 흘러내린 살점을 쓸어 담듯 움켜잡았다.
“아아!”
그는 다른 손으로 내 골반을 움켜쥐고는 등 뒤에서 몸을 바짝 붙여 왔다.
“하으읏.”
이런 자세로는 처음이었다. 생경하게 파고드는 감각에 뒷무릎에서 힘이 풀렸다.
밖에 사람이 있으니 소리를 지르지 말라고 해 놓고, 그는 어느 때보다 도발적으로 굴었다.
꽉 다문 잇새로 더운 숨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감각적인 열기가 치솟았다.
“아아. 서후 씨.”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영원히 갇히고도 싶은 광염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듬으며 몸을 떨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한 나를 그가 가볍게 안아서는 욕조 안에 살포시 내려 주었다.
땀에 젖은 살갗에 부드러운 거품이 닿아서 간질간질했다.
“목마르지?”
열기의 잔해가 남아 있는 듯,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노곤한 몸을 욕조에 기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샴페인 잔에 차가운 샴페인을 따라서 건네주었다.
아이스 버킷에 미리 칠링해 둔 샴페인과 잔까지 챙겨서 욕실에 세팅해 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큼한 살구 향과 민트 향이 어우러진 샴페인이 입안까지 즐겁게 했다.
그가 욕조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내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딱딱한 욕조 대신 나에게 꼭 맞도록 부드러운 남자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흐음.”
만족스러운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벌써 마지막 밤이네.”
그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샴페인 때문에 차가워진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아쉬워요?”
“응.”
“그래도 더 있을 수는 없어요.”
두꺼운 팔이 허리를 꽉 당겨 안는다.
“나만 아쉬운 것처럼 들리네.”
“나도 아쉽지.”
나는 욕조 모서리에 샴페인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잔물결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그치만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우리는 진짜 부부가 되는 거니까.”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반듯한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댔다.
“그렇지, 내 아내.”
부드럽게 읊조린 ‘내 아내’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죠. 내 남편.”
옅은 미소를 머금은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어떤 시련과 고난이 불어닥친다고 해도, 이 남자와 함께하면 괜찮을 것 같다.
“이제 다 된 거지? 빠뜨리고 가는 물건 없나 다시 잘 보자. 휴대전화는?”
“여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지갑?”
“핸드백에!”
“핸드백은?”
그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후 씨 어깨에.”
핸드백 따위 무겁지도 않은데, 그는 굳이 내 핸드백을 제 어깨에 메고 있었다.
“됐네, 그럼.”
체크아웃 준비가 다 되었는데도, 우리는 객실을 떠나지 못하고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아쉽다.”
“조금 아쉽네요.”
동시에 같은 말을 해 놓고는 웃음이 터졌다.
그가 어깨에 메고 있던 핸드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나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왜 이렇게 예뻐서.”
기다란 손가락이 내 입술을 가만히 더듬거렸다.
“사람 안달이 나게 해.”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내 뺨에 얌전히 입을 맞췄다.
나는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바짝 다가갔다.
“그럼, 우리 조금만 더 있다가 갈까요?”
조심스러운 물음을 들은 그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하룻밤 더 있을 수는 없지만, 몇 시간만이라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나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그의 키스에 응했다.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버틀러에게 체크아웃 시간을 늦출 거라고 통보했다.
“아니요. 하룻밤 더 있을 건 아니고요. 항공 스케줄 변경도 함께 알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럼.”
한쪽 팔로 나를 안은 채 침대로 걷고 있으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그게 근사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그의 귓불을 혀로 살짝 핥아 올렸다.
통화를 마친 그가 호텔 전화기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정담은.”
으르렁거리듯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거친 눈빛에 심장이 꽉 죄었다.
“응?”
간신히 목소리를 내며 요염하게 굴자, 몸이 순식간에 침대 위로 넘어갔다.
“꺄악!”
즐거운 비명은 금세 그가 집어삼켰다.
공항에서 사진이라도 찍힐까 봐 애써 골라 입은 원피스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그의 아이보리색 니트도 구겨진 채 바닥으로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우리는 검은색 트레이닝 복에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공항으로 향했다.
3박 4일 동안 잠이 부족했던 탓에 비행기 안에서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