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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8/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48화

    “아, 아니거든! 좋아하기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본 적 없어서……. 그래서 궁금해서!”

    “여은이 고등학교 졸업한 지 일주일도 안 된 것 같은데?”

    “아, 몰라! 됐어!”

    선준이 버럭 화를 내고는 아파트 안쪽으로 슬금슬금 도망을 치려고 했다.

    나는 선준의 후드 점퍼를 덥석 붙잡았다.

    “어딜 도망가? 나 택시 타는 거 보고 가. 나 혼자 택시 기다리다가, 강재만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

    “앞으로는 기사 달고 다녀.”

    “기사를 달고 어떻게 너를 만나러 와?”

    우리는 나란히 서서 어플로 호출한 택시를 기다렸다.

    “그래도 혼자 다니고 그러지 마. 강재만 그놈 지금 아마 칼을 갈고 있을 거야.”

    “알지, 알아. 근데 예전에 강재만이 갖고 있던 칼이 잘 벼린 검이었다면, 지금 강재만이 들고 있는 칼은 녹슨 과도 정도?”

    “녹슨 과도로도 사람을 해칠 수는 있어.”

    선준의 걱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선준아. 우리가 지난 삶처럼 멍청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잖아? 변화하고, 진화했지!”

    “우리만 변화하고 진화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쁜 놈도 더 악랄하게 진화할 수 있는 법이야. 원래 영화에서도 악당이 소멸하기 전까지는 긴장의 끈을 늦추면 안 되는 거야.”

    “그럼 영웅이 더 진화하고 발전해야겠네!”

    나는 허공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타도! 악당!

    “지금 본인이 영웅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아니야? 내가 민서후도 살리고, 너희 집도 구해 주고. 강재만도 물리칠 건데?”

    커다란 손이 내 정수리를 헝클이듯 쓰다듬었다.

    “어? 이제 내 몸에 손댈 수 있는 사람은 민서후 하나다. 너 조심해. 손모가지를 확!”

    “말버릇 보면 영웅보다는 악당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정 이사님.”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웃었다.

    “아무튼, 강재만은 내가 예의주시할 거야. 그놈 미쳐 날뛸 걸 고려해서 백헌 쪽에 사람도 심어 놨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뭐냐? 그런 감동하는 표정은. 강재만 손에 한 번 죽었으면 됐지. 두 번 죽을까?”

    올려다본 앳된 얼굴에는 부드러운 신뢰감이 넘쳐흘렀다.

    “예전에는 뭐 하나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사람 불안하게 하더니……. 좀 멋있다?”

    “됐다. 결혼식 날 와서 우리 여은이 잘 챙겨 줘라. 여은이 옆에 날파리 붙지 않게, 알았지?”

    선준이 괜히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악惡은 더 악랄하게 진화한다는 말도 맞다.

    하지만 선善도 얼마든지 진화할 수 있다.

    선하다는 말과 멍청하게 당한다는 말은 동의어가 아니다.

    나는 선하게 내가 아는 이들을 지켜 낼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선이 악을 이기는 삶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또 그런 히어로물 표정.”

    이제 기분이 제법 풀렸는지 선준이 슬슬 시비를 걸어왔다.

    “택시 왔다! 나 간다!”

    “응. 결혼식 날 봐, 누나.”

    친근한 부름에 나는 택시 뒷좌석 문을 붙잡은 채로 돌아섰다.

    “여은이 언니니까. 내가 누나라고 불러도 되지, 뭐.”

    자식 귀엽게 수줍어하기는.

    “누가 뭐랬냐? 들어가라. 아직 춥다.”

    집으로 향하는 길, 앙상한 가지에서는 새순이 움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내 인생에 없었던, 새로운 봄이 오는 중이었다.

    ***

    “신부 입장!”

    얼마 전 프리 선언을 한 남자 아나운서의 또렷한 목소리가 나의 등장을 알렸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웨딩 로드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직계가족과 가까운 지인만 부른 소규모 결혼식이었다.

    규모가 작을지라도, 맏딸의 결혼식이 초라할 수는 없다며 어머니는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었다.

    의외로 아버지는 그를 사위로 쉽게 인정하는 듯했지만, 어머니는 아직 마음을 덜 연 상태였다.

    딸의 결혼식에 돈을 퍼붓는 것으로 어머니의 아쉬움이 풀린다면, 그쯤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와, 대박 예뻐.”

    웨딩 로드를 걸어 들어가는 나를 보고 수아가 호들갑을 떨어 댔다.

    나는 수아를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내 남편이 될 남자, 민서후가 서 있었다.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보우 타이를 맨 남자는 동화를 찢고 나온 왕자님보다도 더 근사했다.

    “와, 예쁜 언니! 언니 예쁘다!”

    요양 보호사와 함께 신랑 측 혼주석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쳐 댔다.

    나는 할머니를 향해서도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제 아버지의 손을 놓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순간에 코끝이 찡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전 삶에서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강재만에게 갔었다.

    오래전의 나쁜 기억이 나의 신성한 결혼식에서 되살아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애틋함에 가슴이 꽉 죄었다.

    “아버지.”

    물기 어린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저 잘 살게요. 진짜 잘 할게요.”

    “우리 딸, 지금까지 충분히 잘했다. 앞으로도 잘할 거고.”

    아버지에게 이런 칭찬을 받아 보는 것도 평생 처음이었다.

    눈물이 핑 돌아서 시야가 흐려졌다.

    “울지 말고. 벌써 이렇게 아비한테 어리광을 부리면, 결혼해서 어떡하려고 그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도 상호 작용이라는 게 존재한다.

    어릴 때는 부모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만, 자식이 자라면서 힘의 비율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어른이 되지 못한 채로 부모의 영향력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었다.

    내가 스스로 변화하고 나니, 아버지와의 관계도 달라졌다.

    가부장적이고 독단적인 사람이라고 치부했던 아버지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 딸이 최고지. 잘 살 거야. 잘 살 거다. 아버지가 우리 딸 열심히 응원하마.”

    결국, 눈가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쪼르륵 흘러내렸다.

    “고마워요. 저 진짜 잘 살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를 벌린 아버지의 눈시울도 붉었다.

    아버지는 어깨가 들썩거리도록 깊은숨을 몰아쉬고는 잡고 있던 딸의 손을 사위가 될 남자에게 넘겨주셨다.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 여자의 운명이 넘어가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새로운 가정을 이룰 남자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가족이 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혼주석으로 가시고 우리는 주례 앞에 나란히 섰다.

    그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내 눈가를 살짝 닦아 주었다.

    “울었구나.”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가 안쓰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나를 아끼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외롭고 고단했던 삶은 이제 끝이다.

    이제는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내 곁을 채우고 있었다.

    “예쁜 언니! 오늘 더 예쁘다.”

    결혼식이 끝난 후, 할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함박웃음 지어 보였다.

    “근데 나도 예쁘지? 이것 봐라! 언니가 사 준 한복 입었다우.”

    연미색 저고리에 쪽빛 치마를 입은 백발의 할머니는 그 어느 날보다 고왔다.

    “응, 너무 곱다.”

    “이제 세 밤만 자면 우리 집에 오는 거지?”

    “응. 딱 세 밤만 자고, 올게!”

    할머니 곁을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어서 우리는 3박 4일간의 짧은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곁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무슨 일 생기면, 엄마한테 바로 전화하고. 알았지?”

    “아휴, 이 사람이. 신혼여행 간 딸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민 서방이 알아서 챙기겠지.”

    어머니가 걱정을 늘어놓자, 아버지가 그러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엄마.”

    나는 돌아서려는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슨 일 생기면, 꼭 엄마한테 연락할게.”

    자식 걱정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아니었고, 그 손에 내가 목숨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나도 한때 한 아이의 엄마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잘 살아라. 내 딸.”

    시간을 더 지체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얼른 손을 흔들고는 공항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함께 오른 남자, 이제는 나의 남편이 된 그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많이 서운해? 내가 잘 할게.”

    나를 한없이 보듬어 주려고 애쓰는 남자의 존재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던 순간이었다.

    막 출발하려는 차의 뒷좌석 유리창을 누군가 똑똑 두드렸다.

    돌아보니 여동생 여은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응, 여은아.”

    “언니 그리고 혀, 형부.”

    예전의 나보다도 더 순했던 여은이 형부 소리를 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응, 처제.”

    “이거 결혼 선물이요. 이런 거는 친한 친구가 챙겨 주는 거라는데, 우리 언니 친구 없는 거 제가 알거든요. 그럼.”

    야, 나도 친구 있거든! 유수아가 나 대박 예쁘다고 했거든!

    여은은 연분홍색 종이봉투를 건네주고는 사람들 틈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여은이 사라진 곳에서 선준이 티 나지 않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식, 귀엽기는.

    차가 출발한 뒤, 그가 종이봉투 안에서 진주색 상자를 꺼냈다.

    “처제가 우리 결혼 선물로 뭘 챙겨 준 건지, 궁금하네.”

    상자 뚜껑을 연 그의 뺨이 순식간에 빨갛게 익었다.

    며칠 전 수아가 나한테 건넨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야한 속옷이 상자 안을 다소곳이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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