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47화
“네, 장인어른.”
“그리고.”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조모 일은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그래서 개명을 하신 거지?”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지난번에 자네 불러올렸을 때부터 알았지. 담은이는 모르고?”
“면목 없습니다.”
정 회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면목이 없기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런 일에 주눅 들지 마시게. 자네가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니, 내 그것도 신경을 쓰도록 하지. 다만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집안에 그런 분이 또 계셨나?”
“아닙니다. 세습은 아니었습니다.”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꽤 이름난 분이었지. 나도 우연히 한 번 뵌 적 있더구먼. 존함이 바뀌어서 대번에 못 알아봤어. 대쪽같은 분이셨어. 말씀을 함부로 하는 법도 없고.”
그 시절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전부 할머니를 찾아왔었다.
할머니는 수년 전 이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이름을 바꾸고 자취를 감추듯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스스로 지워 버리고 싶은 것처럼 치매에 걸려서 기억을 잃어 갔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독실한 크리스천인 정 회장이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야말로 고맙지. 평생을 바쳐서 일군 회사를 내 맏딸이 이끌게 생겼는데. 여기 이렇게 든든한 지원군도 있고. 그러니까 아까 당부했듯이 담은이한테는.”
“담은이한테는, 뭐요?”
그녀가 본부장실 문을 열고 서서 정 회장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민 본부장, 내가 한 말 잘 지킬 거라 믿고 가겠네.”
그녀가 본부장실 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따지듯 말했다.
“정 회장님, 업무 이외의 부탁은 돈 봉투 들고 하셔야죠.”
저럴 때 보면 어릴 때 키우던 몰티즈가 생각난다.
키워 준 은혜는 모르고, 앙앙거리던 작은 털 뭉치.
“용돈 봉투는 법적으로 사위 되면 줄 거다.”
정 회장은 긴말하지 않고 본부장실을 나섰다.
그녀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치뜨고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우리 회장님이 뭐라고 했어요? 용돈 봉투? 법적 사위? 우리 지금 혼인신고 하러 갈래요? 법적 사위 되면 용돈을 얼마나 주시려나 궁금하지 않아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보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도 나를 마주 보며 환히 웃었다.
“아버지가 사위 위신 세워 주려고 여기까지 내려오셨나 보네. 우리 정 회장님 왜 이렇게 예쁜 짓을 하시지?”
그녀도 부모의 긍정적인 반응이 내심 반가운 눈치였다.
“손주가 날 닮으면 인물 하나는 훤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정 회장이 이런 말도 다 하더라며, 기분이 좋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부끄러워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른 색이었다.
“벌써 손주는 무슨.”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내렸다.
“저기 만약에요.”
정담은이 이렇게 주눅이 들 때도 있나?
걱정스러워서 그녀의 어깨를 살짝 그러쥐었다.
“응, 만약에 뭐?”
“만약에 아이가 없다면 어떨 것 같아요? 아이 없이 우리 둘만 산다면요.”
자녀 계획과 관련하여서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없었다.
“우리 이런 이야기 처음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정담은 닮은 딸 하나는 꼭 키워 보고 싶은데.”
그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정담은 닮은 아들도 좋고.”
이제는 어깨까지 축 처진다.
이게 아닌가?
항상 대차게 굴던 그녀가 왜 이렇게 힘이 빠져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담은아.”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이는 없어도 돼. 나는 너 하나로 충분해.”
그러자 그녀가 금세 충전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바짝 들고 환히 웃었다.
정 회장은 그녀를 귀하고 엄하게 키웠다고 말했었다.
몰티즈처럼 앙앙거리며 아버지에게 대들기는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어리광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독차지하겠다는 마음인가.
말했듯이, 그녀가 원한다면 평생을 둘만 살아도 상관없었다.
“나도 서후 씨만 있으면 돼요.”
그녀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여기서 더 많은 것을 바라면 내가 욕심이 과한 거지.
“응, 나도 정담은만 있으면 돼.”
우리는 서로를 따뜻하고 맑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거면 충분했다.
***
엄마와 함께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맡을 디자이너를 만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선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너 진짜 오랜만이다!”
- 잘 지냈어요?
선준의 목소리가 사뭇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이 자식이 갑자기 고난 패치를 단 것도 아닐 테고?
“어, 나야 잘 지냈지. 너는 어떻게 지내?”
-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어요?
엄마가 눈치를 주었다.
결혼 전에 바깥으로 나돌지 말라며 잔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선준이 만나자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준은 꼭 만나야 했다.
결국, 중간에 차를 세워 버렸다.
“어휴, 저 고집을 누가 꺾어! 사춘기 때도 말대꾸 한 번 않더니. 너 여은이 앞에서는 그러지 마! 여은이 보고 배울까 무섭다.”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차에서 내린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선준의 집 근처로 향했다.
허구한 날 밥 사 달라, 고기 사 달라 난리를 치던 선준이 오늘따라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자는 말을 했다.
“문선준!”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쓴 선준의 분위기가 심각해 보였다.
“너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결혼 축하해요.”
선준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래, 고마워. 그런데 너 안색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선준이 한숨을 훅 몰아쉬고는 대꾸했다.
“우리 아버지 회사가 좀 힘들어요, 요즘.”
“아…….”
매번 직설적인 말을 서슴지 않던 선준이 오늘따라 내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버지 회사가 백헌전자에 납품하는 회사였잖아요. 백헌이 정웅이랑 소송 걸리고 나서, 여기저기서 줄소송이 벌어지고 있나 봐요. 문 닫는 거 시간문제라고 하더니…….”
선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여파가 우리 아버지 회사까지 왔어요. 기존 납품 건에 대한 자금도 회수가 안 되어서……. 지금 직원들 월급도 간신히 나갔어요. 직원 고생시킬 수는 없다고, 사는 집도 부동산에 내놨고요. 돈 될 만한 건 지금 다 정리 중이신가 봐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백헌과의 계약 파기가 이런 식으로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미안해, 선준아. 내가 내 결혼에만 정신이 팔려서, 너희 집이 백헌하고 연관이 있다는 걸 생각 못 했어. 내가 알아볼게. 응?”
“그래 줄래요?”
선준의 얼굴에 일순간 화색이 돌았다.
“응, 백헌하고 연관되어 있는 다른 회사들도 구제할 방안이 있는지 알아볼게.”
“고마워요.”
선준이 고개를 푹 숙이며 작게 읊조렸다.
어른스러운 척해도, 선준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나이였다.
이전 삶에서도 선준은 나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자존심도 셌다.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 알았지? 너 혼자 견디지 말고.”
“네, 근데…… 이사님.”
선준이 호흡을 한번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죽음을 피하려고 내린 우리의 결정이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게 아니라면요? 우린 어떻게 해야 해요?”
선준이 걱정하는 바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겁먹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언제든 선택의 순간이 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어떤 선택이든 결과가 긍정적일 수만은 없어. 부정적인 결과도 있을 수 있고.”
나는 담대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부정적인 결과만 걱정한다면, 우리는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어. 선택하는 순간의 나를 신뢰해야 해.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불행을 알잖아? 그러니까 피할 수도 있지.”
“선택과 신뢰요…….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살았더라도 새겨들어야 할 말인 것 같네요.”
선준이 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날 도왔듯이, 나도 널 도울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면 돼.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뭐가 문제야?”
“오, 이제 제법 어른 티가 나네요, 정 이사?”
기분이 좀 나아진 선준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까분다. 감히 정 이사? 나 너 비서로 채용 안 한다?”
“그쪽 비서로 일 안 할 거거든요? 그리고.”
“그리고 뭐?”
“나는 왜 청첩장 안 줘? 나 결혼식 가지 마?”
선준이 귀염을 떨어 댔다.
“모바일로 보내 줄게. 와라, 꼭!”
그러자 덩치가 커다란 놈이 쭈뼛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모바일 청첩장이 얼굴 붉힐 일이야?
“결혼식 날, 정여은도 와?”
나는 눈썹을 치뜨며 모자 아래로 고래를 불쑥 들이밀었다.
“너 우리 여은이 좋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