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46화

    “강재만 씨?”

    - 내 목소리도 알아봐 주시고,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혀가 꼬이는 것을 보니 대낮부터 술이 과한 듯했다.

    “앞으로 백헌전자에서 승승장구하시길 바랍니다.”

    전화 통화를 끝내려던 순간이었다.

    - 정담은이 왜 너랑 결혼하려고 하는지 알아?

    어떻게든 심기를 거스르려고 하는 꼴이 안쓰러울 정도다.

    강재만이 비열한 놈이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저놈만 얽히면 이성을 잃고 어떻게든 밟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긴 내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날뛰던 놈이니, 죽이고 싶은 게 당연할지도.

    이제껏 살면서 누군가를 병적으로 증오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강재만만 보면 적개심 때문에 피가 들끓을 정도다.

    아마도 정담은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던 그날, 그 저녁부터일 거다.

    “아니요. 잘 모르겠는데요. 물어본 적이 없어서요.”

    그리고 빈정거리며 변죽을 올리는 짓은 강재만처럼 비열한 놈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강재만 씨처럼 돈 많은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강재만 씨처럼 사업적 트레이드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강재만 씨처럼 회장님 총애를 받았던 것도 아닌데, 왜 아무것도 없는 나를 선택한 건지……. 나도 도무지 모르겠네요.”

    담백한 목소리로 건넨 말에 강재만은 화가 많이 난 듯했다.

    - 야! 너 나이도 어린 새끼가!

    “아, 내가 강재만 씨보다 나이가 어리군요? 그거 하나 장점이 될 수도 있겠네요. 또 뭐더라? 돈은 강재만 씨 부모가 많은 거지, 강재만 씨는 개털이죠? 사업적 트레이드, 그건 사기였고. 정 회장님께서 지금도 총애하실지는 확신할 수가 없네요.”

    - 너 이 XX 새끼야! 너 내가 가만 안 둬. 네가 지금 정담은, 그년이랑 결혼하니까 세상 다 얻은 것 같지? 눈에 뵈는 게 없지? 아주 기고만장해서.

    나를 향한 개소리는 들어 줄 수 있어도, 감히 정담은을 가지고 욕지거리를 내뱉는 건 용서할 수가 없다.

    “강재만.”

    조용히 이름을 읊조리자, 술 취한 음성이 잦아들었다.

    “너 그때 덜 맞았구나.”

    - 너, 너! 내가 폭행죄로 고소할 거야!

    “하세요, 제발. 나도 그날 댁이 떠든 이야기 공개하고 싶어서 죽겠네요. 내 아내가 될 사람을 뭐라고 모욕했더라? 한 번만 그 더러운 주둥이 놀려 봐. 어디든 쫓아가서 가랑이 사이가 터지도록 밟아 줄 테니까. 이제 구실은 할 수 있나 몰라?”

    - 야, 이 개새끼야!

    한번은 이런 행패를 부릴 거라고 예상했었다.

    또 처맞을까 봐 눈앞에 나타날 용기는 나지 않았는지, 전화로 발악하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누가 감히 우리 딸을 모욕했다는 겐가?”

    통화를 마치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정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입구를 등지고 전화를 받은 탓에 그녀의 아버지가 본부장실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그는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됐다며 손사래를 치고는 회의용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서 앉지.”

    나는 항상 열려 있는 본부장실 문을 닫고, 정 회장과 마주 앉았다.

    “정 이사는 지금 회의 들어갔다고 해서. 민 본부장한테 올라오라고 할까 하다가. 이 녀석이 또 제 남편을 오라고 했네, 어쩌네! 난리를 칠까 봐.”

    정 회장이 혀를 끌끌 차고는 웃었다.

    “차라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됐어. 차는 회장실에 더 좋은 게 많아.”

    결혼을 앞두고 정 회장과 독대를 했던 적은 없었다.

    긴장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녀는 나와 함께 결혼하겠다는 말을 통보하듯 집에 알렸고, 그녀와 함께 회장실에서 회장 내외와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내가 요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군 줄 아나?”

    “모르겠습니다.”

    “자네 아내 될 사람.”

    정 회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두 딸을 참 귀하고, 엄하게 키웠어. 대학교 때까지 사람을 붙였으니, 답답하기도 했을 텐데……. 담은이 그 아이는 내 말에 토 한 번 달지 않았던 순한 딸이었지.”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던 놈을 만나서 딸이 변했다고, 돈 봉투라도 건넬 셈이신가?

    할머니와 일일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에 망상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근데 이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들고 일어서더라고. 결혼도 제 뜻대로 하겠다, 사업도 제가 물려받겠다. 하도 어이없는 소리를 해서, 기가 다 막히더라니까?”

    정 회장이 또다시 혀를 끌끌 차며 웃었다.

    “아니, 글쎄. 나를 뭐라고 협박했는지 아나? 딸이니까 나에 대해 잘 아는 최측근이지 않냐고, 자기가 오너 리스크가 될 수도 있다고! 얘가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몰라요.”

    “걱정 많으셨겠습니다.”

    “걱정만 했게? 자네가 그렇게 시킨 줄 알고! 어디서 굴러먹다가 왔는지도 모르는 놈이 딸 인생 망칠까 봐 속이 다 탈 뻔했지.”

    하소연하면서도 인자한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임원 루트도 빠르게 밟았고, 능력도 출중하니 좋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네만. 요즘 담은이 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네.”

    정 회장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기업을 이끌 만큼 그릇이 커진 건 자네 덕분이겠지.”

    과한 공치사였다.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한 게 왜 없어? 내 딸 욕하고 다니는 강재만이 그 자식 때려눕힌 거, 자네지?”

    제법 흡족하다는 듯이 정 회장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순 사기꾼 같으니라고. 내가 백헌 그놈들한테 속은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감히 그 주제에 내 딸까지 탐내고. 강재만이 여자 문제도 심각했다던데, 소문이 파다했다면서?”

    차마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는 없어서 가만히 시선만 내렸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놈한테 우리 딸을 내주고. 이 큰 회사를 내맡기려고 했으니, 원.”

    속이 터진다는 듯이 한숨을 몰아쉰 정 회장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 딸이지만, 요즘 우리 정 이사가 참 잘해. 신기할 정도로 잘해. 내가 키우고 가르친 것보다 훨씬 잘해.”

    “네, 잘하고 있습니다.”

    “나는 원래 칭찬이 인색한 사람이야. 담은이한테 잘하고 있다는 말도 낯간지러워서 평생 못 할지도 몰라. 그러니 자네가.”

    테이블을 바라보던 시선을 올려 정 회장을 마주 보았다.

    “우리 담은이 많이 보듬어 주시게. 잘한다, 칭찬도 해 주고. 그 아이가 하는 이야기도 잘 귀 기울여 주시고.”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정 이사가 회장님 많이 존경합니다.”

    내심 기분이 좋은지, 짙은 눈썹이 들썩거린다.

    “우리 담은이가 그러던가? 하긴 그 녀석도 날 닮아서 제 식구 좋은 말은 낯간지러워서 못 할 걸세. 티가 나는 거지? 자네가 눈치 좋게 알아차린 거고?”

    “네, 회장님.”

    웃으며 대꾸한 말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 언제까지 내가 회장이야? 장인어른 해야지! 그리고 강재만 그 자식이 또 전화하고 그러면, 장인한테 일러. 어딜 감히.”

    “네, 장인어른.”

    정 회장이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웃었다.

    “아들이 없는 게 평생 한이었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네, 초등학교 입학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친부모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 노력하겠네. 그러니까 자네는 골프부터 배워!”

    “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가진 거 하나 없이 시작해서 정웅 세웠네. 젊은 나이에 가진 게 없는 건 흠이 아니야.”

    지난번에 가진 거 없이 잘난 놈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놈이라고 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고?”

    “송구스럽습니다.”

    “편찮으신 할머니 모시는 게 왜 송구스러운 일인가. 칭찬받을 일이지. 내 신경 쓰겠네.”

    정 회장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은이한테는 나 왔다 갔다고 하지 말어. 걔 또 도끼눈을 뜰 거야. 애가 왜 그렇게 독해졌나, 몰라. 대체 누굴 닮아서.”

    지금 보니 그녀는 안타깝게도 눈이 정 회장과 판박이였다.

    “그래, 나도 아네. 내 딸 나 닮은 거.”

    정 회장은 이제껏 딸을 경영 일선에 세울 생각을 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런데 그녀 스스로 고집 센 정 회장의 뜻을 꺾어 버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정 회장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 내려왔던 거, 어차피 담은이 귀에 들어갈 텐데…….”

    “오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경청하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내가 회장실 층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거든. 아마 여기 한번 내려왔으니, 직원들도 내가 내 사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지.”

    정말이지 부녀가 하는 행동이 똑같았다.

    평범한 연애결혼을 티 내고 싶어 하는 그녀나, 사위를 아끼는 마음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정 회장이나.

    정담은이 누굴 닮아서 그렇게 귀여운가 했더니, 정 회장의 성격과 고집을 빼닮았나 보다.

    “듬직하니 잘생겨서 손주들 인물은 훤하겠어.”

    정 회장이 껄껄 웃으며 내 등을 세게 후려쳤다.

    “결혼 전까지는 집에 잘 들여보내고. 밤에 불러내지 말고. 응? 결혼 전에 외박이 너무 잦아!”

    정담은이 여과 없이 말하는 것도 정 회장을 닮은 게 분명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