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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45화

“안녕하세요, 민서후 본부장님!”

“네, 안녕하세요?”

벌써 열 번째.

일면식도 없는 정웅그룹 직원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우호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맞지? 어! 맞는 것 같아!”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내내 따끔따끔한 눈길이 쉴 새 없이 따라붙었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이제는 등 뒤에서도 인사를 건넨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한결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들의 인사에 적당히 응답해 주었다.

“대박! 완전 잘생겼잖아!”

“그러니까 정웅 공주가 낚아챘지. 그 언니가 빠지는 게 뭐가 있냐? 돈이 없어, 능력이 부족해! 남자 얼굴만 본 거야. 분명해.”

나도 ‘귀’라는 신체 기관이 있습니다만?

나름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춘 여자들의 대화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입을 꾹 다물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대화가 저한테도 다 들려서요. 조금 민망하네요.”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건넨 말에 그들의 얼굴에 고여 있던 일말의 적개심이 사라지는 게 눈에 보였다.

“죄송합니다! 소문보다 훨씬 잘생기셔서요!”

“네네! 그리고 아무리 본부장님이 잘생기셨어도, 정 이사님이 얼굴만 보셨을까요! 최연소 본부장 승진! 능력도 좋으시니까.”

애써 수습해 보려는 그들에게 나는 또 상냥한 눈인사를 건네고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만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손을 뻗어서 열림 버튼을 누르자, 빠끔히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정담은의 얼굴이 보였다.

“어?”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고 웃었다.

정담은은 입에만 필터가 없는 게 아니라, 눈빛과 표정에도 필터가 없다.

지금 그녀의 눈동자에는 연분홍색 하트가 하나씩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출근해요?”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지금 출근합니다.”

주위 시선을 한껏 의식한 나는 이사인 그녀에게 말을 높였다.

“오오, 존댓말남.”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소리 없이 웃는다.

아, 정말……. 정담은한테 정정 보도를 원하는 만큼 내보내라고 말했던 순간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금 열렸고, 직원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녀와 나는 마주 선 자세가 되어 버렸다.

품에 안기듯 붙어선 게 민망한지,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순진한 얼굴로 그렇게 엄청난 일을 벌이다니.

그녀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우리의 결혼 소식을 세상에 알렸다.

신기하게도 나의 개인적인 정보가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저 정웅에너지 소속의 민서후 본부장이라는 간략한 프로필만 알려졌을 뿐이다.

“오늘 늦게 퇴근해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모든 임직원의 귀가 이쪽으로 열리는 게 느껴졌다.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사무실 가 봐야 알죠.”

“오늘 퇴근하고는 못 만날 것 같아요.”

왜 우리가 오늘 못 만나는지, 또다시 엘리베이터에 탄 모든 임직원이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 오늘 웨딩드레스 보러 가거든요.”

아, 정말이지 깜찍한 정담은.

아마 오늘 점심이 되기 전에 정담은이 웨딩드레스를 고르러 간다는 소문이 회사 전체에 퍼질 것이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그녀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빨리 보고 싶네, 웨딩드레스 입은 거.”

다들 내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서 미치려고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자 그녀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결혼식 때까지만 참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주위에 서 있는 이들에게는 들릴 만큼 컸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사무실이 자리한 층에서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가 짜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제법 장단을 잘 맞춰 주십니다, 예비 남편님?”

그녀가 무슨 의도로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부러 말을 거는지 뻔히 알았다.

“그걸 바란 거 아니셨습니까?”

재벌가의 맏딸과 평사원으로 입사한 나의 결혼은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들기 좋은 소재였다.

결혼 전까지, 혹은 결혼 이후에도 한동안은 소문이 무성할 것이다.

“어차피 도마 위에 오를 거라면, 나랑 부둥켜안은 채로 올라가겠다. 뭐 그런 거?”

“둘이 좋아 죽더라고 떠들어 대는 게 낫지.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낮게 대꾸한 말에 그녀가 정말이지 좋아 죽겠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정담은이 숨기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녀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평범하게 연애하던 연인이 회사에 청첩장을 돌렸다고 치자.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우리가 속닥거린 대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야.”

언제 퇴근하냐, 오늘은 못 만날 것 같다.

이 정도의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사실 앞에 선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 걸 하고 싶은 거지? 남들 하는 평범한 연애, 평범한 결혼. 다만 사람들이 우리한테 관심이 많은 게 좀 다른 점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라는 걸, 세상 전부가 알면 좋겠어요. 서로 정말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걸요.”

그래서 세상이 함부로 떠드는 말로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알았어. 오늘 수고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다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이사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내 표정을 읽은 그녀가 이사실 안으로 들어오라며 턱짓했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그녀가 사뭇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민서후 본부장님.”

“내 이름하고 소속이 알려졌는데, 언론이 꽤 조용하더라고. 이쯤 되면 무슨 이야기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안 나와서 서운한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만약 나와 결혼하는 남자에 관해서 사전 동의 없이 취재한 결과물을 기사화할 경우, 해당 언론사와 맺은 정웅그룹의 모든 광고 계약을 철회할 것이며.”

그녀가 딱 부러지는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소송을 통해 언론사 폐지까지 각오하라는 상세한 협조문을 보냈죠. 본보기로 너튜브에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냈던 채널 운영자한테는 이미 소장이 날아갔고요. 금융 치료는 빠르고 정확하게 받는 게 좋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연애와 결혼을 꿈꾸던 무구한 여자였는데, 언론사를 상대로 상냥한 협박을 서슴지 않는 배포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그녀가 대뜸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속으로 나 지금 독하다고 욕한 건 아니죠? 아니면 내가 무서운 사람 같다거나?”

나는 악당 놀이에 심취한 정담은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하는 짓을 보니 악당 부하에서 지금쯤 악당으로 승진시켜도 좋을 것 같다.

“퍽도 무섭다.”

꼭 끌어안아 주고 싶은데, 그러지는 못하고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연분홍빛으로 물든다.

“오늘 웨딩드레스 보러 가지 말까요? 우리 퇴근하고 못 만난 지 꽤 됐는데?”

“결혼식 얼마 안 남았어. 웨딩드레스 안 입을 거야?”

“그건 절대 아니죠!”

“아무튼, 오늘도 수고해.”

인사를 건네고 나오려는데, 그녀가 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하며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응?”

“방금 강재만 과장 사표 수리됐대요.”

사실상의 권고사직이었다.

나와 그녀의 결혼이 공식화된 이후로, 인사과에 강재만에 관한 비위 제보가 쏟아졌다.

강재만은 자신이 정담은과의 결혼을 통해 요직에 오르게 될 거라는 소리를 심심찮게 하고 다니며, 온갖 접대를 받고 다녔다고 했다.

강재만과 관련된 귀찮은 일은 일단락된 듯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다.

“왜 그래? 걱정 있는 사람처럼.”

“욕심이 과한 사람이에요.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해서는 미리 걱정하지 마.”

그녀는 강재만과 관련한 일이면 더 심각하게 걱정하는 양상을 보였다.

마치 강재만의 악행을 미리 보기라도 한 것처럼 끔찍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강재만이 죽도록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분노를 드러내서 그녀의 걱정을 가중할 필요는 없다.

“괜찮을 거야. 응?”

사무실 밖을 한번 내다본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안아 주었다.

“고마워요.”

“고맙기는.”

혼자 두기 안쓰러울 정도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를 남겨두고 이사실을 나섰다.

그날 오후, 모르는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아침에 연구소 건설을 담당하는 정웅개발 쪽에서 연락을 주기로 했는데, 그쪽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민서후? 좋아 죽네, 요즘?

휴대전화 너머에서 익숙하고도 비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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