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44화

    “다 온 것 같네.”

    그의 차가 정웅그룹 회장의 저택 앞, 즉 내가 사는 집 앞에서 멈춰 섰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가 오른손을 뻗어서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얼른 들어가.”

    “응, 운전 조심해서 가요.”

    나는 인사를 건네 놓고도 아쉬워서 차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여기서 밤새울 거야?”

    나직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연한 웃음기가 배어났다.

    “그럴까요?”

    나는 운전석 쪽으로 몸을 홱 돌리며 활짝 웃었다.

    “헤어지기 싫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그가 조수석 쪽으로 상체를 불쑥 기울였다.

    쭉 내민 입술에 그의 입술이 아쉽도록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얼른 들어가.”

    운전석으로 멀어지려는 그의 넥타이를 잡는다는 게, 멱살을 움켜쥐고 말았다.

    “넥타이가, 없네요?”

    힘없는 손에 멱살이 잡힌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다가와서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나, 물어볼 거 있어요.”

    멀어지는 그가 아쉬워서 얼른 말을 걸었다.

    그가 숨결이 섞일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정 보도, 내보내도 돼요?”

    세상은 내가 백헌전자 사장의 아들 강재만과 결혼하는 줄 알고 있었다.

    “대신 서후 씨 개인 정보는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할게요. 특히 할머니요. 할머니한테 기자들이 찾아가고 그러면 놀라실 수도 있으니까요.”

    “정정 보도.”

    그가 단어의 뜻을 음미하듯 가만히 읊조렸다.

    잘생긴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내키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니.”

    그가 고개를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강재만이랑 결혼하지 않는다는 정정 보도 말하는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 하고 싶은 만큼.”

    의외로 시원스러운 반응이었다.

    “진짜요? 진짜로 해도 돼요?”

    그가 어금니를 꾹 물고 잇새로 대답했다.

    “응. 해도 돼.”

    그윽한 눈동자에는 분노가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근데 화난 것 같은데요?”

    “아, 아니!”

    “화가 났는데, 아닌 척하는 것 같은데요?”

    “아니야, 그런 거.”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정정 보도 이야기를 내가 너무 빨리 꺼낸 거죠? 미안해요. 나는 마음이 급해서.”

    “그게 아니라.”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던 그가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숨을 골랐다.

    “아까 오후에 강 과장을 잠깐 봤거든.”

    “강재만을요? 어디서요? 감히 강재만 과장이 서후 씨를 찾아갔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혹시 그 새끼……. 아니 강 과장이 서후 씨한테 해코지라도 했어요?”

    나는 운전석으로 넘어갈 듯이 상체를 기울였다.

    “강 과장이 무슨 짓 안 했어요? 혹시 다친 거 아녜요?”

    그제야 그의 손등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왜 그래요? 여기 왜 이래요? 강재만이 이랬어요? 내가 진짜 이 새끼를 가만두나 봐! 가만 안 둬, 강재만!”

    내내 조용하던 그가 한쪽 입꼬리를 씩 들어 올리며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손은 왜 이래요?”

    겁 없는 새끼가 감히 우리 왕자님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내가 때려 줬어.”

    우리 얌전한 왕자님께서 지금 저 고운 입으로 뭐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고개를 가볍게 털어냈다.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내가 강재만 두들겨 팼다고. 손은 그래서 이래.”

    발갛게 까진 손등과 그의 반듯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왜 때렸어요? 아니야, 아니지. 서후 씨 손이 이렇게까지 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강재만이 맞을 짓을 했겠지.”

    “맞을 짓이 아니라, 죽을 짓을 했지.”

    그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린다는 듯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내 남자, 이렇게 거친 모습은 또 처음이다.

    세상 자상한 줄로만 알았던 왕자님께서 주먹을 휘두르셨다니…….

    우리 왕자님은 문무를 겸비한 분이셨다!

    “너, 눈이 또 몽롱하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나를 향해 웃었다.

    “거칠어서…….”

    무슨 말이 이어질지 궁금하다는 듯이 그가 눈썹을 치떴다.

    “섹시해요.”

    핸들에 고개를 박은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직설적인 표현이 쑥스러운지 귀까지 빨개졌다.

    순진하시기는, 귀여워 가지고.

    “너는 왜 그런 말을 필터링 없이 해?”

    “애정 표현에 굳이 필터를 달 필요가 있을까요? 필터는 정수기나 공기청정기에 필요한 거죠. 더러운 물을 거를 때나, 더러운 공기를 거를 때.”

    그러니까 이 남자는 지금.

    “내 말이 더럽다는 말인가요?”

    무구하게 던진 질문에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아니야. 안 더러워.”

    “그럼, 애정 표현은 계속 솔직하게 해도 되는 거네요?”

    “아니, 그건 안 돼.”

    말이 왜 앞뒤가 달라.

    더럽지 않은데, 필터를 왜 껴야 해?

    나는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응시했다.

    “으이그!”

    그가 조수석 쪽으로 팔을 뻗어서는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앞으로 필터링 없는 애정 표현은.”

    “애정 표현은?”

    뜸을 들이는 그를 채근하기 위해 말끝을 따라 하듯 물었다.

    “침대 위에서만 해.”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소각장으로 가야 할 쓰레기봉투가 터지고 말았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필터링 없는 애정 표현은 너무 자극적이고, 그럴 때마다 욕구를 풀 수는 없으니, 할 수 있을 때 해라……. 뭐 그런 뜻인가요?”

    “너를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가 내 목 안쪽에 입술을 비비며, 나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알았어요. 필터 해제는 침대 위에서만.”

    팔을 뻗어서 그의 등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요.”

    “응.”

    “아까 하던 정정 보도에 관한 말을 이어서 하자면요……. 내가 가진 재력과 능력, 모든 걸 걸고 할머니는 꼭 지켜 드릴게요.”

    “멋있다고 해 줘야 해?”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대신 키스해 주세요.”

    입술이 부드럽게 빨려들어 갔다. 진짜 집 앞에 차를 세우고, 헤어지기 싫어서 달라붙어 있는 연인의 키스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민서후 씨.”

    입술을 붙인 채로 내가 조용히 속삭였다.

    “응.”

    그가 살짝 풀린 눈으로 내 입술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나는 이제 민서후 씨 안 놔줄 거예요. 절대로.”

    “응.”

    “나랑 평생 가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응?”

    내가 너무 비장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나 보다. ‘죽을 때까지’는 뺄걸.

    “나랑 결혼해요.”

    작동이 멈춘 기계처럼 그가 서 버렸다.

    숨도 내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서후 씨? 숨은 쉬어요.”

    “어? 어.”

    “설마 이렇게 된 마당에 나랑 연애만 하고 헤어지려고 했어요? 그렇게 안 될 텐데요. 이를 어쩌나. 나한테 단단히 코 꿰였는데.”

    그가 참고 있던 숨을 터뜨리듯 웃었다.

    “연애하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는 열 번 찍는 거로 끝냈지만, 내 프러포즈 거절하면 나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예요.”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정담은, 네가 멋있는 걸 다 해 버리면……. 나는 대체 뭘 해야 해?”

    “존재 자체로 고마우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결혼 준비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어렵사리 민서후 씨 몸 하나만 준비해 주세요.”

    나는 그가 풀 빌라로 1박 2일 여행 갈 때 했던 멘트를 빌려왔다.

    “내가 평생의 복이라면서요? 맘껏 누려요! 굴러들어온 복을!”

    그의 너른 품을 잽싸게 파고들었다. 그는 나를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

    정웅그룹 계열사 중 한 곳인 JW 매거진에서 취급하는 잡지는 총 다섯 가지였다.

    20, 30대 미혼 여성을 상대로 하는 라이프 스타일 잡지, 20, 30대 미혼 남성을 상대로 하는 잡지, 부모를 위한 육아 잡지, 여행 잡지, 인테리어 잡지 등.

    시작은 20, 30대 미혼 여성을 상대로 하는 라이프 스타일 잡지로 정했다.

    기사를 내보내기에 앞서, 나는 미리 개설해 두고 비공개로만 콘텐츠를 업로드 하던 SNS를 대중에 공개했다.

    팔로워 수는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재벌가 자손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것은 할리우드에서부터였다.

    그들의 파급력은 공들인 브랜드 영향력과 맞먹기도 했다.

    재벌가에서 공주처럼 자란 듯하지만, 능력 있는 여성 경영인의 표본.

    대중은 소통하는 젊은 여성 경영인의 등장에 열광했다.

    나에 대한 검색어 분포가 대부분 긍정적이라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가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대중은 개인 SNS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매체를 통해서도 나에 대한 정보를 소비하길 원하고 있었다.

    “이사님, 오늘 발행된 잡지입니다.”

    새로 고용한 비서가 내 책상 위에 잡지 한 권을 내려놓았다.

    비서의 얼굴을 보니, 새삼 문선준은 잘 살고 있나 궁금해진다.

    녀석과 연락을 주고받은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아무튼, 비서가 건네고 간 잡지는 JW 매거진 소속의 Topic, 이번 달 커버스토리는 나에 관한 것이었다.

    편집장은 후킹이 확실한 기사 제목이라며 셀링 포인트에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 같다고 했었다.

    기사가 실린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기사 제목을 내려다보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

    죽음으로부터 25년을 거슬러 온 내가 드디어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무려 첫사랑, 민서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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