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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43화

“자기야.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자기 하나야. 걔 볼 거라고는 돈밖에 없어!”

아무리 회사 직원들이 발길을 끊어 버린 장소라고 할지라도, 이곳은 엄연히 정웅그룹의 사옥이었다.

강재만이 서 있는 곳까지 쉬지 않고 걸어갔다.

“야!”

불시에 목소리를 내자, 강재만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주먹을 날려 본 기억은 없었다.

자각한 순간, 이미 강재만은 내 밑에 깔려서 쥐여 터지고 있었다.

“다시, 말, 해봐. 뭐? 돈밖에, 없는, 멍청한, 년?”

말이 한 번씩 끊길 때마다 주먹이 강재만 얼굴에 내리꽂혔다.

“이, 새끼가, 처, 돌았나.”

- 오빠? 오빠! 무슨 일이야! 왜 말이 없어?

강재만의 휴대전화 너머에서 여자의 앙탈이 들려왔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강재만의 휴대전화를 집어들고는 뇌까렸다.

“그쪽 오빠 바빠요. 나중에 전화해요.”

그대로 몸을 일으킨 나는 휴대전화를 반으로 쪼개듯 우그러뜨린 뒤 근처 연못에 던져 버렸다.

강재만이 내 눈치를 보며 몸을 일으키려고 해서, 구둣발로 왼쪽 허벅지 안쪽을 세게 밟아 주었다.

“남자 망신 다 시키고 다니는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내가 진짜 쪽팔려서 살 수가 없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모자란 놈은 절대 정담은 곁에 둘 수 없다는 생각.

정담은이 나를 차갑게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

등신 같은 고민은 이제 그만 접어야겠다는 생각.

***

요 며칠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리운 마음을 애써 꾹꾹 누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처로운 남자를, 그러면서 차갑게 굴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남자를 외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외면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누구에게나 보일 수 있는 감정 없는 미소를 머금고,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예의상 고개를 까딱한 뒤, 돌아섰을 뿐이다.

그런데도 가슴 한구석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담은아. 왜 그래? 너 울어?”

카페라테 두 잔을 양손에 나눠 든 수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어설픈 변명에 속아 넘어갈 수아가 아니었다.

“자, 술은 아니지만. 이거라도 마시고 속 풀어.”

수아가 카페라테 한 잔을 내 손에 쥐여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진짜 독하다. 본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아까 일부러 그런 거지?”

카페를 나서며 물은 말에 수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괘씸하잖아. 그런데도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그냥 가는 거 봐. 어쩜 그렇게 차가워?”

그는 돌아보았다. 수아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도 뒤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카페 안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말을 걸지도, 전화를 하지도,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냥 보기만 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안 차가워.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좋아했고. 지금도 많이 좋아하고.”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나려고 해서 얼른 카페라테를 한 모금 머금었다.

수아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요즘 내 주변에는 나를 보고 한숨 쉬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

“아까 한 말, 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야. 나는 진짜 강재만 과장은 반대다! 기계는 고쳐 써도,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랬어.”

“알아.”

“알긴 뭘 알아. 기사 터지고, 찌라시 돌고. 근데 왜 너 가만히 있어?”

수아는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진저리 쳤다.

“기다리는 중이야.”

“뭘?”

“때가 오길.”

지금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해 봐야 에너지만 소모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다.

그 사람 마음이 돌아서기만 한다면, 나는 그동안 준비한 모든 것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그때가 오긴 하는 거고?”

“올 거야. 꼭.”

아까 카페 유리창 너머로 보았던 그의 눈빛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나를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고 해서, 그에게 예전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완벽하게 밀어낼 준비를 하는 남자를 너무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힘에 부쳤다.

오후 업무를 수행하는 중에도 그에게 데면데면했다.

연구소 용지 답사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낼 때는 늘 까불거리며 장난을 쳤었다.

[이번 거는 찍은 거 아니니까, 카운트하지 마요. 내 도끼 아까워요.]

며칠 전 보낸 메시지가 저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벼운 장난도 어렵다.

그가 나를 거칠게 밀어내는 순간은 꽤 큰 상처가 되었다.

이별을 이야기할 때도 그는 이렇게까지 나를 거칠게 내치지는 않았었다.

할머님께서 편찮으시고, 여러 일이 겹친 탓에 그는 고단해 보였다.

그가 나를 카페 유리창 밖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것처럼, 나도 잠시 떨어져서 그를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솔직히 겁도 난다. 그가 나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영영 떠나 버릴까 봐.

나는 어떤 매듭도 짓지 않은 미완의 상태를 아슬아슬하게 이어 나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헤매고 있는 사이, 부서 직원 하나가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이사님, 아까 환영 회식 이메일 보냈었는데요. 회신을 안 주셔서요.”

나를 아랫사람 대하듯 하다가 이제 윗사람 모시듯 해야 하는 게 영 어색한 모양이다.

“미안해요. 내가 회신했다고 생각했는데, 메일이 임시보관함에 들어가 있네요. 지금 바로 회신할게요.”

다시 보니 이메일에 날짜도 이상하게 적어 놨다.

[1월 121일, 221일 됩니다.]

숫자를 21일과 22일로 정정해서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러니 복잡한 사업 분석 보고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결국, 부서원들이 전부 퇴근하고,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사무실에 홀로 남았다.

내일 예비 연구소장과 회의를 하려면, 오후에 받은 개발 로드맵도 완벽히 숙지해야 했다.

할 일은 많은데, 집중이 되지 않아서 커피를 한 잔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이사실 문가에 민서후가 서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넥타이는 어디에 풀어놨는지 없었고, 하얀 드레스 셔츠 단추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팔뚝까지 걷어 올린 소맷단 때문에 단단한 팔뚝이 도드라졌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잠재우려 시선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왜 맨발입니까?”

발이 아파서 구두를 벗어 둔 것도 깜빡했다.

얼른 허리를 숙여서 구두를 집어 들려는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음을 묻어 둔 그리운 숲의 향기가 가슴을 흠뻑 적셨다.

크리스털 버클이 달린 하이힐을 손에 들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의 구둣발이 스타킹만 신은 내 발 앞까지 와 있었다.

눈앞에 그의 너른 가슴팍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신데요?”

당황해서 조용히 물었다.

“열 번 다 찍은 건가?”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살짝 내렸다.

“이제 나, 포기한 겁니까?”

“아니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저의를 읽을 수가 없어서 심장이 쿵쿵 날뛰었다.

그가 한 발짝 움직였고, 나는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내가 물러서자, 그는 한숨을 몰아쉬며 데스크에 걸터앉았다.

숨 막히는 대치 상태.

감정이 읽히지 않았던 그의 얼굴에 미묘한 여유가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떨리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요즘 도끼 안 가지고 다녀요? 왜 찍다가 말아?”

그가 건넨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정담은.”

이름을 불린 순간,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

“담은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 목소리에 홀린 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움켜쥐듯 감쌌다.

“미안해.”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당장은 그가 내 앞에서 있다는 사실이 더 기꺼웠다.

“아직 열 번 안 찍혔지만……. 안 되겠다. 이제 버틸 여유가 없네, 내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입술과 입술이 급하게 먹혀들어 갔다.

순식간에 열기가 치솟았다. 그가 몸을 조금 뒤로 물렸고, 나는 그의 다리 위를 타고 올랐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좋아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고개를 비틀어 간신히 입술을 떼어 내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관능에 휩싸인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처 많이 줘서 미안해.”

그가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코끝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는 아까……. 네가 카페에서 나한테 고개만 까딱했을 때…….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

안쓰럽게 중얼거리는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내가 너 많이 아프게 했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아프게 안 할게. 내가 부족해도, 네 곁에 있을게.”

이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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