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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2/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42화

“서울 갈 때, 운전은 제가 할게요. 본부장님, 지금 쉬셔야 할 것 같아요. 몸이 이렇게 안 좋으신 거면,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배어났다.

짜증스럽게 손을 쳐낸 게 후회됐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영영 그녀를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죠.”

승강이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차갑게 대꾸했다.

답사는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그녀에게 차 키를 넘기고, 조수석에 오르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병원 들를까요?”

운전대를 잡은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그냥 갑시다.”

“그래도 열이 많이 나는데요. 집에 가면 할머니도 돌보셔야 하고.”

보란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무슨 상관입니까?”

“네?”

하찮은 물건을 보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뺨이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무슨 상관이냐고요.”

이렇게 날카로운 반응은 처음이어서 그런지 그녀가 허둥지둥 시선을 피했다.

“일단 출발할게요.”

그녀가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엔진 소음과 푹신한 시트, 따뜻한 히터 바람에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눈꺼풀은 점점 내려앉았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본부장님! 본부장님?”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간신히 뜨기는 했지만, 몸을 일으킬 기운이 없었다.

한숨을 내뱉는데, 입술을 스치고 흘러 나가는 호흡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회사, 도착했습니까?”

“여기 본부장님 집 앞이에요.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그녀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키 주고, 가요.”

자그마한 손에 들린 차 키를 빼앗듯 건네받았다.

조수석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데, 몸이 갸우뚱 기울었다.

“서후 씨!”

놀란 그녀가 달려와 내 겨드랑이 아래를 작은 어깨로 받치며 부축했다.

“나한테 기대서 걸어요.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열이 펄펄 끓어요. 병원부터 가자니까.”

“조용. 머리 울려요.”

나는 그녀에게 떠들지 말라며 주의를 시켰다.

천치같이 혼자 걸음조차 옮기지 못하는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서 간신히 집 안까지 들어왔다.

그녀가 침대 위에 나를 눕히다가, 함께 몸이 고꾸라졌다.

단단한 몸 위를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살짝 덮였다.

아픈데도 그녀를 안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미친놈.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내치듯 밀어냈다. 순간 끌어당겨 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약 사 올게요.”

“신경 쓰지 말고 가요.”

울먹이는 그녀에게서 돌아누웠다.

완전히 끝내기로 마음먹었을 뿐인데,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양새가 초라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더운 숨이 힘겹게 흘러나왔다. 약을 챙겨 먹어야 빨리 낫는다는 걸 아는데, 요양 보호사님께 연락도 해야 하는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네, 서후 씨도 지금 링거 맞고 있어요. 아, 제가 아는 의사 선생님께 부탁드려서, 집에서요. 네, 할머님 잘 부탁드립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담은의 다정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침실 천장이 머리 위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듯했다.

“어? 일어났어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밤 9시가 넘었다.

그녀는 몇 시간 새에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리고 내 팔뚝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열이 높아서, 아는 의사한테 부탁했어요.”

그럴 필요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목이 따끔거려서 입을 여는 것조차 힘들었다.

“할머니께서 입원하셨다고요? 요양 보호사님께서 서후 씨 휴대전화로 계속 전화를 하더라고요. 할머니는 집에 안 계시고……. 꼭 받아야 하는 전화 같아서 제가 대신 받았어요. 보호사님이 병원에 계셔 주신댔어요.”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쓸데없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팔뚝에 꽂힌 바늘을 우악스럽게 쥐어뜯었다.

그녀가 놀라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링거 바늘이 뽑혀 나간 후였다.

“그만 가요. 정담은 이사가 내 집에서 이러고 있는 거, 정말 불편합니다.”

집 안 공기는 따뜻했지만, 두 사람을 에워싼 분위기는 살얼음이라도 낀 듯 아슬아슬했다.

“……죄송합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그녀의 눈동자에 절망이 가득했다.

“가요, 어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다. 아픈 나를 챙겨 준 것도, 요양 보호사의 전화를 대신 받아 준 것도, 할머니에 대한 걱정을 해 주는 것도.

가슴이 답답한 게 감기 기운 탓인지, 아니면 벗어날 수 없는 거지 같은 현실 때문인지 모르겠다.

“식탁 위에 약이랑 죽 있어요.”

그녀는 내가 또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 서둘러 침실을 떠났다.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다.

나도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해 보고 싶었다.

열나는 이마에 손을 대 준 사람도 오랜만이었고, 아픈 나를 걱정하며 돌봐준 사람도 오랜만이었다.

할머니가 치매를 앓기 시작한 이후로 함부로 감기조차 걸릴 수 없었다.

계획된 일에 틈을 만들지 않으려 늘 긴장한 채로 살아야만 했다.

그녀가 떠난 집은 고요했다.

식탁 위에는 그녀가 말한 대로 죽과 약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도로 침실로 돌아왔다.

지지리도 운 없는 놈에게 허락되기엔 너무 과한 애정이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홀로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 하필 정담은과 마주쳤다.

그녀는 부서원인 유수아 대리와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식사하셨어요?”

유 대리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먹었습니다. 그럼.”

두 사람에게 눈인사하고 돌아서서 먼저 회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담은 너어……. 나 진짜 실망했었다. 나한테는 귀띔이라도 해 줄 수 있었잖아.”

“미안해. 입사할 때부터 비밀에 부쳤던 일이라. 쉽지가 않았어.”

정담은이 이사로 승진하고, 정웅그룹의 맏딸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 친했던 두 사람은 조금 서먹해진 듯했었다.

그녀는 유 대리를 유일한 친구처럼 여겼었다.

사귀던 남자한테 차이고, 유일한 친구에게 푸대접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니까 이해해 주는 거야. 내가 너 착한 거 뻔히 아는데.”

“그래, 고마워.”

순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그녀는 아무런 변화도 없던 시절의 정담은처럼 느껴졌다.

나도 저들 사이에 껴서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웃고 싶을 만큼 그리운 목소리였다.

며칠 동안 그녀는 내 곁을 멀리했다.

“어휴, 이렇~게 착한 우리 정담은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그게 밴댕이지, 사람이야?”

졸지에 나는 직립보행 하는 밴댕이가 된 듯했다.

저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이해 못 할 수도 있지.”

그녀가 괜한 역성을 들고 나섰다.

“우리 담은이 착하지, 예쁘지, 가슴도 크지.”

“야!”

유 대리가 키득거렸고, 그녀는 그만하라고 말리는 눈치였다.

“우리 담은이랑 같이 살 남자는 진짜 좋겠다.”

회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재만 과장님이랑은 진짜 결혼하는 거야? 예식장 잡았다는 카더라도 있던데.”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 그렇다, 담은아? 적당히 너 좋다는 남자 만나는 게 더 행복한 거야. 남자가 더 안달이 나야 해. 나 봐? 우리 현욱 씨가 나 더 많이 좋아하는 거 티 나잖아.”

“그래, 보기 좋아. 부러워.”

그녀가 친구를 진심으로 위해 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착해 빠져서.

“사실 놀던 놈이 정신 차리면 결혼해서 더 잘하기도 해. 강재만 과장, 얼굴이 빠져, 집안이 나빠? 우리 회사 공채로 입사할 정도면 능력도 적당하고. 너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너희 아버지도 강 과장 좋게 보시는 것 같던데.”

“어…….”

어?

기분이 이상했다.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아서 뒤를 돌아보았다.

근처 카페로 들어가는 그녀와 유 대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와 오랜만에 마주 웃는 그녀는 눈이 부시도록 예뻤다.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사무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까딱하고는 돌아섰다.

심장에 실금이 가는 듯 미세한 통증이 일었다.

가슴이 갑갑해졌다.

먼저 이별을 통보할 때보다, 그녀의 손을 쳐낼 때보다, 완전히 끝내기로 마음먹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죄였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업무 전화를 걸어오기는 했지만, 태도가 사뭇 딱딱했다.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사옥 중간층에 자리한 정원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공들여 가꾸고 있는 곳이었지만,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 영영 승진을 못 한다는 소리가 돌아서 직원들은 출입을 꺼렸다.

그래서 홀로 시간을 보내기엔 한적하니 좋은 곳이기도 했다.

승진을 못 하기는.

이곳이 승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나는 몸소 증명해 왔다.

사원으로 입사해서 본부장까지 오르는 데 이례적인 루트를 밟아 왔으니까.

말단 직원들이 임원의 휴식을 방해할까 봐 윗선에서 지어낸 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판기에서 뽑은 생수 한 병을 들고 아레카야자와 극락 조화가 우거진 산책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하! 자기야. 나 못 믿어?”

이곳에서 다른 직원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처음이었다.

“아니, 자기야. 끊지 말고 내 얘기 들어 봐.”

여기서 통화 중인 직원도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쩌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회사 정원 소문은 내가 듣는데, 강재만?

“돈밖에 없는 멍청한 년이니까, 내가 결혼해 주는 거지! 아니야. 오빠는 우리 애기만 사랑해요. 그년 보고는 꼴리지도 않아.”

꽉 막혔던 가슴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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