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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41화

선준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정담은 착해요.”

“그래, 착한 거 알아.”

“예쁘고요.”

“예쁘지, 예뻐.”

“돈도 많아요.”

“돈……. 재벌이니까 많겠지.”

나는 선준의 이야기를 왜 들어주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디서 맞고 와서 처량하게 구는 꼴이 안쓰러워서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할머님이 치매 앓고 계신다고요? 정담은은 분명히 할머님한테도 잘했을 거예요. 그쵸?”

나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거 알아요? 요즘 병수발은 정성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성에 돈을 들여서 하는 거예요. 정담은이 가진 재력이면 능력 좋은 요양 보호사 서넛은 밤낮으로 고용할 수 있어요. 치매 할머니 모셔야 한다는 말은 핑계죠!”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선준은 나이에 비해 염세적인 녀석이었다.

“너는 애늙은이 같은 소리에 특화되어 있구나?”

대답하기 곤란해서 둘러댄 말에, 선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 티 나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선준이 허둥댔다.

“나 늙은이 같은 거 티 나요? 진짜요? 나 신체적 나이는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몇 살처럼 보이는데요? 나 진짜 늙은이 같아요?”

“아니.”

왜 저렇게 넋이 빠져서 난리인지 모르겠다.

“정신 좀 차려! 대체 어디서 맞은 거야?”

선준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아버지한테 맞았어요. 백헌전자가 하는 투자 받지 말라고 대들었다가. 결국, 우리 집도 백헌에 넘어갈 건가 봐요. 미래는 바뀌지 않나 봐요.”

이상한 기시감이 엄습했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최근에 누군가 했었다.

그게 누구였더라?

불현듯 그녀가 술에 취했던 밤이 떠올랐다.

‘선준아, 미안해. 미래는 바뀌지 않나 봐.’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대체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리야?”

선준이 흠칫하는 듯했지만, 찰나였다.

“아니에요. 그냥 신세 한탄인 거죠.”

두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부탁이니까. 제발 정담은 버리지 말아요.”

“가라, 늦었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선준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약속해요! 정담은 안 버린다고 약속하고 가요.”

눈이 질끈 감겼다.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훅 날리고는 대꾸했다.

“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하자! 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선준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얼마나요? 하루? 나흘? 일주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신 여기 찾아오지 마. 너 근데 대체 정담은이랑 무슨 사이야?”

선준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못 들은 척 옷을 털어 냈다.

“야, 너 내 말 못 들은 척하지 마. 정담은이랑 사촌도 아니라며? 대체 무슨 사이냐고! 무슨 사인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헤어지지 말라고 난리인데?”

“그게요…….”

선준이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안녕히 계세요!”

냅다 튀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진짜.”

잡으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선준을 잡아서 또 말도 안 되는 승강이를 이어 나갈 생각을 하니 피곤해졌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자, 할머니께서 사탕이 반쯤 남은 유리병을 들고 나를 맞았다.

“오빠, 언니는 오늘도 늦어?”

“어. 늦어.”

할머니는 사탕을 건네주며 한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언니 힘들겠다. 오빠가 빨리 돈을 많이 벌어야 언니가 고생을 안 하지. 아닌가? 언니가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우리 오빠가 고생을 안 하는 건가?”

정말이지, 가끔……. 할머니가 치매 어르신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

새벽녘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또 정담은이 어디서 술을 마시고 전화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전화 걸 사람이 정담은밖에 없나?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정담은일 거라고 생각하는 나를 어쩌면 좋을까?

발신인을 보니 모르는 서울 번호인데, 통신사에서 서비스로 제공하는 번호 정보에 ‘경찰서’라는 글자가 떠 있다.

“여보세요?”

불길함은 느닷없이 찾아오곤 한다.

- 혹시 김인순 할머니 보호자분?

“네, 그런데요.”

- 할머님이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아까 분명히 방에서 잠드는 것을 확인했었다.

새벽 4시, 경찰의 연락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부리나케 집에서 뛰쳐나와 차에 올랐다.

눈과 비가 뒤섞여서 내린 탓에 도로가 엉망이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제복을 입은 경찰 두 사람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할머니께서 이 사탕 병을 들고 택시를 잡으셨대요. 여기 병에 적힌 공장으로 가자고요. 이미 택시에 오르실 때부터 열이 펄펄 끓었고, 잠옷 차림의 할머니가 아이 말투를 쓰는 게 이상해서 경찰에 연락한 뒤에 이곳 응급실로 모셨다고 합니다.”

“택시 기사님은요?”

“저희가 출동했을 때, 기사님은 안 계셨습니다.”

응급실 환우용 침대 위에 누운 할머니는 얼마 전 내가 전해 준 사탕 유리병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김인순 환자 보호자분? 아무래도 할머니는 입원하셔야 할 것 같아요. 워낙 고령이신데, 열이 안 떨어지네요.”

눈과 비가 뒤섞여서 내리는 겨울밤에 얇은 잠옷만 입고 헤매고 다녔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으응. 오빠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울먹거렸다.

“정신이 들어?”

이런 상황에도 할머니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해야 하는 일이 버거웠다.

“으응. 예쁜 새언니 다니는 사탕 공장이 우리 집에서 많이 멀어? 아무리 기다려도 언니가 오질 않잖아. 비도 오고, 눈도 오고. 춥고, 깜깜한데……. 언니가 무서워할까 봐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내가 길을 잃었다우. 미안해, 오라버니.”

한숨을 내쉴 수가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나 언니 보고 싶어.”

“응, 그래. 다 나으면, 언니 볼 수 있을 거야.”

“순 거짓말쟁이! 언니 다시는 우리 집에 안 오는 거지? 오빠가 내쫓은 거지? 이깟 사탕도 필요 없어!”

할머니가 사탕이 반쯤 남은 유리병을 응급실 바닥에 내던졌다.

주사약이 담긴 스테인리스 통을 들고 다가오던 간호사의 발치에서 유리병이 산산이 조각났다.

“죄송합니다. 안 다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의료진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고 있을 때, 할머니가 침대를 벗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나 집에 갈 테야!”

“이건 저희가 치울게요. 할머니부터 붙들어 주세요.”

언니를 데리고 오라며 어린아이처럼 울어 대는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언니가 왜 안 오는 줄 알아? 네가 자꾸 울어서 그래. 언니한테 떼쓰고, 못살게 구니까 안 오는 거야!”

이런 식으로밖에 설득할 수 없는 상황이 비참했다.

데리고 온다는 약속은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나는 언니 말 잘 들었어! 언니 힘들지 말라고, 내가 언 개울물 깨서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해 놓고, 마루도 닦아 놓았단 말이야! 사탕도 아껴먹었어! 이거 다 먹어 버리면……. 그러면……. 언니가 나 줄 사탕 만드느라 집에 늦게 올까 봐……. 그럴까 봐…….”

역정을 내던 할머니의 앙상한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쓰러진 할머니를 환우용 침대로 옮겼다.

새벽 5시 반쯤이 되어서야 할머니는 입원실로 이동했다.

다른 환자들을 고려해 할머니는 1인실을 사용해야만 했다.

병실에 단둘만 남겨지고 나자,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할머니를 원망했다.

“할머니, 자꾸 이러시면 나 진짜 아무것도 못 해요.”

약 기운에 깊이 잠든 할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서글픈데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이기적인 그리움으로 자꾸만 이별을 유예하고, 그녀에게 여지를 준 날들이 죄스러웠다.

이제 완전히 정리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요양 보호사에게 할머니를 맡기고, 집에서 겨우 옷을 갈아입은 뒤 회사로 향했다.

“좋은 아침!”

이제 출근하는지 그녀가 활짝 웃으며 본부장실에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그녀는 본체만체하고는 PC 모니터를 응시했다.

“오늘 연구소 용지 답사 가야 하는 거 알죠? 본부장님 차로 가기로 했던 것 같은데, 맞죠?”

환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네.”

짧고 서늘한 대꾸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아침 회의를 간단히 마치고, 그녀와 함께 차에 올랐다.

하필 왜 오늘 같은 날, 그녀와 단둘이 외근을 나가야 하는 건지. 타이밍이 잔인했다.

“이렇게 둘이 교외로 나가니까, 꼭 데이트하는 것 같다. 그쵸?”

그녀가 귀염을 떨며 물었지만, 나는 조수석 쪽으로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데, 얼굴을 마주하면 또 무너질 게 뻔하다.

“오래 걸렸으면 좋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을 설친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조용히 가죠.”

피로감 가득한 목소리는 내 귀에도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네, 이제 조용히 할게요.”

그녀가 조용히 속삭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바람과 달리 평일 오후 경기도 근교로 나가는 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연구소 용지를 샅샅이 훑어본 그녀는 이번에도 안전을 강조하며, 설계도면을 꼼꼼히 살폈다.

“여긴 설계 변경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렇죠?”

눈을 지그시 감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민서후 본부장님? 안색이 안 좋은데요? 어디 아파요?”

막을 틈도 없이 그녀의 보드라운 손길이 이마에 닿았다.

탁, 소리가 나도록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녀가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저몄다.

무안한 듯 손을 맞잡은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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