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40화

    “나, 너 부른 적 없다!”

    정 회장이 딸을 외면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우리 아버지 왜 토라지셨을까? 딸이 아버지 좀 자주 찾아뵈면 안 돼요? 나는 반가워하실 줄 알았는데.”

    그녀가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머금으며 귀염을 떨었다.

    퍼터를 지팡이처럼 짚고 있는 정 회장에게 다가간 그녀는 무뚝뚝하게 구는 아버지에게 팔짱을 끼며 웃었다.

    “저 내쫓으실 거예요? 진짜?”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정 회장을 바라보는 그녀에게선 여유가 묻어났다.

    반면 정 회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흐음. 아비가 왜 딸을 쫓아내. 하지만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여긴 엄연히 회사다. 약속도 없이 이렇게 불쑥 회장실에 들어오고 그러면 안 돼.”

    딸을 다그치는 모습이 제법 인자해 보이기는 했다.

    “아! 죄송해요! 회장실에 막 들어오고 그러면 안 되는 거구나? 저는 대리에서 이사까지 단숨에 승진시켜 주셔서, 우리 회사는 이래도 되는 줄 알았죠?”

    그녀가 무구한 미소를 머금으며 아버지에게 어퍼컷을 날렸다.

    “그만들 가 봐! 나도 일정이 있으니까!”

    당황한 정 회장은 퍼터를 휘두르며 나와 정담은을 회장실 밖으로 몰아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런 소리를 듣고 서 있어요? 속상하게.”

    “그럼, 가만히 듣고 있지, 말대꾸라도 할까요?”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와서 일러야죠. 정담은 씨 아버지가 개소리합니다. 와서 좀 혼내 줘요, 하고.”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개소리’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사님 되시더니 좀 거칠어지셨습니다?”

    “뭘 이 정도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그녀가 사뭇 고압적인 목소리를 냈다.

    “앞으로 정 회장이 호출하면, 바로 올라가지 말고. 나한테 보고하세요. 나는 민서후 본부장 보고를 받아야 하는 책임자니까요.”

    만화 속 악당 부하 놀이가 아직 안 끝났는지, 그녀가 센 척을 해 댔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비상 정지 버튼을 우아하게 눌렀다.

    아래로 향하던 엘리베이터가 덜컹 멈춰 섰다.

    그녀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뭐 하는 짓입니까?”

    기세에 눌려서 뒷걸음질 치던 나는 엘리베이터 구석에 몰렸다.

    그녀가 양손을 뻗어서 엘리베이터 벽을 짚었다.

    불량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를 제 품에 가둔 그녀에게서 달콤한 프리지아 향기가 느껴졌다.

    “여전히 이 관계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물었다.

    팔랑거리는 속눈썹이 살갗을 간지럽히는 듯한 착각이 인다.

    “뭐?”

    “지난번에 여기서 나한테 그렇게 물었잖아요. 여전히 이 관계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그랬었다. 그리고 나는 없다고 여겼다.

    “나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매혹적인 입술로 내뱉는 목소리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실려 있었다.

    “떨려요?”

    긴장감을 털어 내려 어색하게 웃었다.

    연애하던 시절에는 단 하루도 서로를 보듬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그녀가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떨리지 않을 리가.

    만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서, 바르르 떨리는 손끝을 그러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안 떨리나 보네……. 이래도?”

    그녀가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휘감아 안았다.

    불시에 입술이 맞물렸다.

    밀어낼 수가 없었다. 잇새를 벌리고 녹진하게 밀려들어 오는 감각에 눈이 질끈 감겼다.

    충동을 이겨 내지 못하고 가느다란 허리를 당겨 안았다. 말랑한 여체가 단단한 몸에 눌려서 매혹적으로 뭉개졌다.

    오랜만에 품에 안은 그녀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녀가 내뱉은 가쁜 숨결이 뺨 위에서 달콤하게 부서졌다.

    “하아.”

    잠시 입술이 떨어졌고, 호흡을 고르기가 무섭게 다시금 달라붙었다.

    그녀가 매달리는 힘보다, 내가 몰아붙이는 힘이 더 거세어 지고 있었다.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몸을 돌렸다.

    이제 엘리베이터 구석에 몰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허리를 바짝 안아 올리며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녀가 목덜미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더 깊이 탐하고 싶은 욕구가 무섭게 치솟았다.

    아래로 찍어누르듯 그녀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게걸스럽게 빨아들일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목을 한계까지 꺾은 상태로 거친 키스를 받아 내느라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으으음.”

    입안으로 넘어오는 신음조차도 달콤했다.

    정지된 엘리베이터는 마치 바깥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느껴졌다.

    허리춤을 주무르던 손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갔다.

    서슴없이 더듬거리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녀가 흐느적거렸다.

    떨리냐고 도발해 놓고선 욕망 어린 손길 한 번에, 그녀는 무너지려고 했다.

    “하아.”

    입술을 떼고 잠시 숨을 골랐다.

    “겨우 이 정도로?”

    탁하게 쉰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겨우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은 건 민서후 씨죠.”

    그녀가 젖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몽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섭도록 열기가 치솟았다.

    엘리베이터만 아니면 서로의 옷을 벗기고 더 관능적으로 탐하기 위해 혈안이 됐을지도 모른다.

    가느다란 허리를 그러쥐었던 손에서 힘을 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후우.”

    달아오른 숨을 고르는 게 어려웠다.

    열기를 끝까지 발산할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야속하게도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아는 맛이 무서운 거예요.”

    그녀가 아직 은밀한 온기를 품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고개만 슬쩍 돌려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알잖아요. 내가 얼마나 맛있는지.”

    예전에도 발칙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여자였다.

    “참기 힘들죠?”

    지금은 작정하고 덤비니 돌아 버릴 것 같다.

    “뭐든 너무 참으면 병나요.”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녀가 더욱 진하게 웃었다.

    “이제 내가 몇 번 찍었어요? 한 세 번? 앞으로 일곱 번만 참으면 되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겨우 세 번 찍었다는데, 타격감은 엄청났다.

    ***

    퇴근길, 집 앞에 차를 대놓고 있는데 대문 앞에 검은 인영이 알짱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기, 뭡니까?”

    목소리를 내자, 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어깨를 움찔 떤다.

    “민서후 씨?”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문선준?”

    선준의 눈가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잘 지내시나 보네요. 얼굴이 좋네. 정담은이랑 헤어졌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요?”

    아까도 엘리베이터에서 정담은이 내 혼을 쏙 빼놓았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너는 얼굴이 왜 그래? 누구한테 맞았어?”

    “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그렇고요. 저 앞에 공원 있던데. 거기로 가요.”

    선준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공원 안에 들어선 녀석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서 거친 호흡을 골랐다.

    숨이 차서 그러는 게 아니라, 화를 삭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러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는 건데, 나한테?”

    “정담은이랑 정말 끝낼 겁니까?”

    나는 가로등 불이 비추는 공원 어귀를 바라보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지 마요.”

    “뭐?”

    “사람 하나, 아니 불쌍한 가족 하나 구하는 셈 치고……. 그러지 마요. 제발.”

    선준의 목소리에 난데없이 물기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얜 또 왜 이래?

    “제발요. 형. 네? 우리 정담은 이사님 버리지 마요. 내가 이렇게 빌게요.”

    급기야 선준이 무릎을 꿇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야!”

    공원을 산책하던 사람들이 이쪽을 흘끗거렸다.

    “제발 버리지 마요. 그냥 만나요. 응? 사람 하나 구하는 셈 치고 만나 줘요! 그렇게 사랑하면서, 어떻게 헤어져요! 네? 눈앞에 있으니까 미칠 것 같죠? 형도 계속 만나고 싶잖아!”

    안면이 있는 동네 주민이 나를 알아보고는 남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야, 일어나! 너 왜 이래? 어? 일어나!”

    제 감정에 취한 선준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통곡을 해 댔다.

    “결국, 강재만이 우리 아빠 회사 건드렸다고요. 내가 아버지한테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 새끼한테 홀라당 넘어가서는!”

    선준이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으고는 싹싹 빌었다.

    “내가 이렇게 빌게요. 정담은 이사 강재만하고 결혼하면 진짜 불행해질 거예요.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알잖아요!”

    “세상에 남자가 나랑 강재만 둘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선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요. 세상에는 강재만 같은 나쁜 놈들이랑, 착한 민서후. 이렇게 밖에 없어요.”

    나는 무릎을 굽히며 선준의 앞에 앉았다.

    “정신 차려. 내가 만약에 여동생이 있으면, 나 같은 남자하고는 결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릴 거야. 부모도 없이 자랐지. 치매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책임져야 하지.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야.”

    선준이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치고는 대꾸했다.

    “부모 없어도 반듯한 어른이 되었죠! 치매 할머니 정성으로 모실 만큼 착하죠!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뿐이라는데, 와! 이 몸 좀 봐!”

    선준이 내 팔뚝과 허벅지를 더듬거렸다.

    “징그럽게 왜 이래.”

    손을 홱 뿌리치자, 선준이 결의에 찬 목소리를 냈다.

    “아까 민서후 씨가 안 되는 이유를 말한 거죠? 그럼 이번에는 내가 정담은이 되는 이유를 말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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