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39화
“연구소 설계부터 다시 했으면 합니다.”
회의 시간에 그녀가 낸 의견에 다들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 설계 단계로 되돌아가면, 연구 착수 시기가 그만큼 늦어집니다.”
경기도 모처에 지어질 연구소의 책임자로 내정된 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시기가 늦어지는 게 두려우신가요? 이대로 연구소를 지으면 곧바로 저비용 고효율 배터리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나 보네요. 본인 능력을 맹신하는 아집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연구 로드맵도 세분화해서 다시 만드세요. 요즘 대학생들 과제보다도 하찮은 로드맵이네요.”
그녀는 순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독설을 퍼부었다.
“아니, 기술 개발이야 우리가 아니라 백헌이 할 테고.”
“백헌과의 협업은 없습니다.”
정담은 이사의 단호한 어조에 연구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 이사, 백헌과 이미 여러 공동 개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실무를 몰라도 이렇게 몰라서야, 원! 그 계약 파기하면 우리가 위약금을 얼마나 물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한두 푼이 아닙니다!”
회의실 분위기는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저들 뜻대로 잘 굴러가던 사업을 회장 딸이 뒤엎으려고 하니 곱게 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그녀가 언쟁을 벌이고 있는 연구소장은 백헌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계약을 파기할 근거, 그게 필요한 것 같네요?”
그녀가 프로젝터에 영문으로 작성된 논문을 하나 띄웠다.
“이 논문은 네덜란드 모 대학 연구진이 수년 전 발표한 것으로 백헌이 상용화하겠다고 시동을 걸고 있는 홈 제어 의료 지원 기술과 동일하며 이미 국제 특허가 존재하는 기술입니다. 특허권도 살아 있고, 백헌이 이 기술을 상용화할 경우 위법입니다. 상용화 직후의 이득은 백헌이 보고, 문제가 불거져 판매가 중단된 후의 책임은 정웅이 뒤집어써야 할까요?”
그녀는 백헌과의 협업 과정에서 정웅에게 불리한 맹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처음부터 부당한 계약이었습니다. 1년 전 회장님 지시로 이루어진 계약 조건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했다는 거 압니다. 늦었지만, 제가 손대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거하고 배터리 기술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연구소장이 따지고 들었다.
“그렇죠. 배터리 기술은 또 별도의 계약이니까요. 하지만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서 신뢰를 저버린 백헌과는 계약 파기를 진행할 겁니다. 연구소장님, 자체 개발로는 영 자신이 없으시면 이번 프로젝트에서 빠지세요.”
“그건 법무팀하고 논의해야지. 신의성실이니 뭐니 들먹거리지 말고. 법이 그렇게 쉬워?”
“법무팀이요? 이 계약에 문제 있다는 건, 로스쿨 1학년생도 알겠는데요?”
저런 기개로 어떻게 대리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사뭇 놀라워서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본부장님, 배터리는 폭발 위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구소 설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주세요.”
그녀는 주위의 우려와 달리 맡은 바 업무를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마치 이 자리를 위해 준비된 사람처럼.
사실 연구소장도 회장에게 아첨을 떨어서 온 낙하산이었고, 그녀 역시 회장 딸이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대리에서 이사로 승진한 케이스였다.
최근 들어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는 정웅그룹의 미래 핵심 투자 사업이라는 명목하에 낙하산들만 모아 놓은 곳이라는 오명을 떠안고 있었다.
대부분이 정담은 이사는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연구소장이 하는 말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애쓸 거라 여겼다.
백헌과의 혼담이 오가는 상황이니 그쪽으로 돈을 퍼주는 데 일조할 거란 추측도 많았다.
그런데 그녀는 모든 예상을 깨부쉈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사업본부장직을 수락한 이후로 업무 방향은 내가 뜻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담은 이사는 정확히 내가 가고 싶었던 방향으로 사업본부의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본부장님, 제가 한 말 중에 틀린 말 있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연구소 설계는 국내 안전 기준보다 더 철저하게 재검토하겠습니다.”
그녀가 제법 사무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사로서 손색이 없는 모습인데, 문제는 그런 모습도 귀엽다는 데 있었다.
내내 당찬 모습을 보였으면서 속으론 많이 떨었는지, 그녀는 책상 아래 왼손을 두고 말랑말랑한 피젯 토이를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귀여워서.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칩니다. 연구소장님은 사흘 안으로 연구 로드맵 초안 제출하시고. 본부장님만 잠시 남아 주세요.”
회의실에 모여 있던 스무 명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임원들까지 전부 자리를 뜨자, 그녀가 한숨을 몰아쉬며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깊숙이 기댔다.
“나 혹시 떨었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이사님, 처음 주관한 회의치고 잘하셨습니다. 그 밑에 쥐고 있는 말랑이도 티 하나도 안 났고요.”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회의실 테이블 위에 분홍색 복숭아 모양 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이거 한번 만져 볼래요? 완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요!”
웃음기 어린 그녀의 볼이 예쁘게 솟아올랐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것 중에 제일 예쁜 건 정담은일 것이다.
“하실 말씀 더 없으시면,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막 돌아섰을 때였다.
“연구소 안전 문제요.”
“네?”
“신중히 검토해 주세요. 불미스러운 사고가 생기지 않게.”
그녀는 마치 끔찍한 사고를 목격한 사람처럼 겁먹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서는 길, 정담은과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마음을 완전히 걷어 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매일 마주하면서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 내가 서 있는 세상의 차이는 확연했다.
왕위를 이을 세자는 어릴 때부터 군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그녀는 정웅그룹을 이끌기 위해 준비된 경영인처럼 보였다.
괜히 걱정했네. 저렇게 잘하는데, 정담은.
본부장실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회의를 마치면 회장실로 오라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복잡한 생각은 모두 접어 두고, 일단 회장실로 향했다.
“어, 민서후 본부장.”
정 회장은 퍼팅 기계 앞에 서 있었다.
골프공 하나가 천천히 위로 솟구치자, 자세를 잡은 정 회장이 퍼터로 공을 툭 쳤다.
“자네, 골프 치나?”
“아니요. 안 칩니다.”
“골프부터 배워야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골프도 안 배워 놓고 여태 뭐 했어?”
나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린 채 듣기만 했다.
“하긴 할머니 모시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을 테지.”
서슴없이 개인사를 들추는 정 회장이 공을 한 번 더 쳤다.
하얗고 작은 공이 도르륵 굴러가 홀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오늘 정 이사가 처음 회의를 주재했다지? 자네가 보기엔 어떻던가?”
“그 자리를 위해 준비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맹점을 짚어내고, 사업 방향을 손보는 판단력이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정 회장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한테 내 딸 평가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죄송합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을 때였다.
“죄송할 것까지야. 여태 사업본부장으로 일했는데, 그 정도 말은 얹을 수도 있지. 그런데 백헌과의 계약을 전부 파기하자고 했다지?”
정 회장은 여전히 백헌전자에 미련이 많아 보였다.
“네.”
“그거 혹시 자네가 일러 준 건가? 논문이니, 특허니……. 그런 거?”
“아닙니다. 정 이사가 찾아낸 겁니다.”
정 회장은 영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내 딸을 모를까. 걔는 경영하고는 거리가 멀어. 곱게만 자라서 세상을 잘 몰라. 그런 아이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됐지 뭔가? 정혼자랑 결혼도 안 하겠다, 회사는 지가 맡겠다…….”
잠시 뜸을 들인 정 회장이 퍼터를 들어 올려서 내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닌가, 생각했지.”
퍼터를 천천히 내린 정 회장이 같잖다는 듯이 덧붙였다.
“자네 같은 사람이 참 불쌍한 사람이야. 머리는 좋은데, 가진 게 없어서 빛을 못 봐.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소리도 옛말이지. 가진 게 없으면 그냥 개천에 사는 용일 뿐이야.”
정 회장의 독설은 대놓고 자존심을 건드려 댔다.
“어리숙한 여자 하나 꼬셔서 홀랑 집어삼키고 싶었던 겐가? 우리 담은이가 착해서 저 좋다는 사람한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아이지.”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홀로 고생하며 키워 주신 할머니 생각해서라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야지, 그럼 쓰나?”
집안 사정까지 전부 알아봤겠지.
“저를 키워 주신 할머니께 부끄러운 짓은 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담은 이사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건네려고 했다.
“어리숙한 여자 하나 꼬셔서 정웅을 홀라당 집어삼키려고 하는 건, 민서후 본부장이 아니라 강재만이죠.”
그녀가 회장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있는 집에서 멍청하게 자라서 더 가져 보려고 헛된 욕심부리는 놈보다, 화목한 가정에서 올바르게 자란 똑똑한 인재가, 우리 정웅에 꼭 필요한 사람 아닌가요?”
예쁜 얼굴엔 당찬 미소가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