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38화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엔 내 삶의 자취는 변변치 못했다.
누구보다 건실한 인생을 살아 보려고 애썼다.
살면서 선택을 후회한 적 없었고,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은 적 없었다.
하지만 삶의 주체성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왔다는 사실과 세상이 나를 판단하는 가치는 다르다.
그녀가 타고난 배경과 내가 가진 배경이 달랐고, 그녀가 살아갈 세상과 내가 책임져야 할 세상이 달랐다.
사랑이라는 감상적인 감정으로 메우기엔 너무 거대한 틈이었다.
“지금 집에 들러야 옷이라도 갈아입고 출근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매서운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녀는 침실에 없었다.
아마도 집에 갔겠지.
그렇게 차갑게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후회하며 침실을 나섰을 때였다.
“진짜 맛있어요! 콩나물국이 너무 시원해요!”
“아니야, 언니! 어떻게 국이 시원해? 국은 뜨거운 거라우.”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 서후 군도 밥 한술 뜨고 가요. 응?”
아주머니께서 먼저 나를 알은체했다.
“오빠 얼른 앉아! 얼른! 밥 먹고 일 가야지! 응?”
뭉그적거리고 서 있자, 할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 팔을 끌어다가 그녀 옆에 앉혔다.
“다 같이 밥 먹으니까 좋다! 엄마랑, 나랑, 오빠랑, 예쁜 언니랑.”
“여기서 나만 예쁜가 보네. 나만 예쁜 언니라고 하는 거 보니까!”
그녀가 귀엽게 떠들어 대며 콩나물국을 퍼먹었다.
“아니다! 나도 예쁘다고 했다우! 우리 큰오빠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어! 그치, 오빠? 내가 예뻐? 언니가 예뻐?”
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 역시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내린 머리는 여전히 부스스했고, 늦은 밤까지 오열한 탓에 눈은 퉁퉁 부어 있었으며, 숙취 때문에 얼굴이 까칠한데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허공에서 마주한 시선이 미묘한 온도로 얽히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그녀와 마주한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아휴, 당연히 각시가 더 예쁘지. 여기서 여동생이 더 예쁘다고 하면, 오빠 큰일 나는 거예요. 그러다 언니 도망가. 각시가 더 예쁜 거 맞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아주머니께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언니가 더 예쁜 거 해. 나는 언니가 도망가는 거 싫으니까. 언니, 어디 도망가지 말고. 우리 오빠랑 살아야 한다우.”
“응, 나는 어디 도망 안 가고 오빠랑 살 거야. 꼭 여기서 오빠랑 같이 살 거야.”
그녀를 저지해 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서 괜한 말을 얹었다가 할머니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보다야, 순간의 거짓을 택하는 편이 더 수월했다.
모래성 위에 쌓아 올린 행복처럼 불안해야 하는데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는 상황이 물색없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나란히 차에 올랐다.
할머니는 손자 내외의 출근길을 배웅하는 것처럼 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드셨다.
“할머니 비위 맞춰 줘서 고마워.”
늘 웃는 낯으로 할머니를 대해 주는 그녀의 선한 마음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래서 욕심냈었다.
어쩌면 이 여자와는 고단한 삶을 함께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내가 특별히 맞출 게 있나요? 저렇게 좋은 분인데.”
그녀는 조수석 차창을 열고 외쳤다.
“추워요! 얼른 들어가세요! 그러다 감기 걸리셔!”
“응, 응! 언니, 일 끝나고 바로 집으로 와!”
할머니는 차가 골목을 빠져나와 사라질 때까지 대문 앞을 지키고 서 계셨다.
기분이 묘했다. 분명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인데, 정담은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것 같다.
“그러고 출근해도 되겠어?”
“왜 안 돼요?”
그녀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옷이 어제랑 같잖아.”
“무슨 상관이실까요.”
삐딱하게 말하는 태도는 불량스러웠지만, 귀여워서 웃음이 나려고 했다.
아랫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아, 내가 이틀이나 민서후 씨 집에서 잤으니까, 상관이 없는 건 아니구나.”
그녀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로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계속 그렇게 나한테 차갑게 말할 거죠?”
그녀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인상 이렇게 쓰고?”
검지로 미간을 과장되게 좁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눈은 퉁퉁 부어 가지고.
“근데 나……. 그래도 상처 안 받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노선인지 모르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그녀가 튀어 오를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열심히 철벽 치세요! 저는 열심히 부딪힐게요! 제가 가진 모든 재력과 능력과 미모와…… 그러니까!”
그녀가 제 몸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온몸으로 민서후 씨가 세운 철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노력할 테니까요! 한번 버텨 보세요! 그리고!”
“아이, 깜짝이야.”
다짐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혼잣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겨우 이 정도로 놀랐어요? 설마 벌써 겁먹는 거예요?”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겁은 무슨…….”
“그럼 버텨 보세요!”
지난밤에 오열할 때는 언제고, 아침 댓바람부터 어디서 저런 기운이 뻗쳐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먹은 콩나물국에 누가 약이라도 탄 건 아닌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쉽게 무너지지 마요! 그럼 재미없어! 내가 열 번 찍을 때까지 버텨야 해요!”
“저기, 담은아.”
“어? 벌써 이러기예요? 나한테 정담은 씨라고 차갑게 굴다가 담은아! 하고 다정하게 부르네요?”
그녀가 한쪽 눈썹을 들썩거리며 동화 속 악당 부하처럼 웃었다.
그렇다. 조그맣고 귀여운 정담은은 눈을 씻고 봐도 악당 우두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심해요. 내가 본격적으로 꼬시기 시작하면 버티기 쉽지 않을걸요?”
그러니 이런 경고가 무서울 리가 없다.
“저쪽에 세워 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본부장님 차를 타고 같이 출근하는 건……. 너무 이르잖아요?”
“지금은 이르고, 나중엔 괜찮을 거란 뜻이야?”
이미 그녀의 수에 말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말을 내뱉고 난 후에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다.
“부부가 함께 출근하는 건 괜찮죠.”
“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걸 프러포즈로 받아들이진 마시고요. 그럼 저는 여기서 내릴게요!”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다가 말고, 운전석 쪽으로 상체를 홱 돌렸다.
당황할 틈도 없이 그녀의 입술이 내 인중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런, 조준을 잘못했네.”
그녀는 혼잣말처럼 내뱉고는 유유히 차에서 내렸다.
정신이 쏙 빠진 상태로 조수석 차창 밖에서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별을 부정하는 단계라고 치부하기엔, 그녀의 눈빛이 너무도 비장했다.
어제 입었던 옷을 또 입고 출근길에 서서 해맑게 웃는 여자도, 그런 여자가 여전히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나도, 미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부분이 잘못된 인터넷 신문 기사를 정정하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사실이 아닙니다. 내가 강재만과 연애를 했을 리가 없잖아요? 퇴근 후에 데이트를 즐긴 건 나랑 강재만이 아니라, 나랑 민서후 씨죠.]
[차라리 정정 보도를 내보내는 게 어때? 나한테 이러지 말고.]
그러자 그녀가 대뜸 전화를 걸어왔다.
- 정말 그래도 돼요?
“뭘 말입니까?”
- 정정 보도 내보내라면서요! 나랑 밤마다 데이트한 건 민서후다!
나는 한숨을 집어삼키고, 어금니를 꾹 문 채로 대꾸했다.
“포커스를 거기에 맞추지 말고. 강재만이랑 스캔들 말이야. 나한테 해명하지 말고. 그렇게 억울하면 차라리 정정 보도를 내라고.”
- 아. 나랑 강재만이랑 스캔들 난 거 정정하라는 뜻이구나. 그게 그거지, 뭐.
“마음대로 해라.”
귀찮다는 듯이 전화를 끊어 버렸지만, 하나도 귀찮지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이별을 유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를 무작정 밀어내고, 무작정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퇴근 무렵, 그녀는 업무상 볼일이 있는 것처럼 본부장실 문을 두드렸다.
“뭡니까?”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러자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조그만 사탕 상자를 데스크 위에 내려 두며 말했다.
상자를 한 번,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할머니 갖다 드리세요. 요양 보호사 선생님께서 할머님이 저 자주 찾는다고 그러셨어요. 이거 갖다 드리면서 제 안부 전해 주세요. 새언니는 사탕 공장에 다닌다고요. 일이 많아서 밤늦게 들어오고, 새벽부터 일하러 나온다고요. 그래서 얼굴 보기 힘든 거라고 말해 주세요.”
그녀는 제 할 말만 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사탕 상자에는 회사 로비에 있는 카페 로고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를 위해서 이걸 사고, 핑곗거리를 고심했을 마음은 여전히 선하고 어여쁘다.
“저기 본부장님! 정담은 이사님 환영 회식을 한번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언제가 좋을까요?”
이런 일에는 늘 앞장서는 과장이 본부장실 문을 빠끔히 열고 물었다.
“부서원들 편한 날짜로 투표해서 정하도록 합시다.”
어여쁘고 선한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의 위치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