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37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네가 오해하게 했잖아.

이런 식의 대답도 구차했다.

순전히 정담은이 걱정되어서 온 거니까.

여기서 승강이를 더 해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녀는 출근할 때 입었던 얇은 코트 하나를 걸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일단 점퍼부터 벗어서 그녀의 어깨 위를 덮어 주었다.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있던 여자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어? 민서후다. 우리 민서후다.”

울었는지 눈가는 빨개져서,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지 않은 사람처럼, 그래서 상처 되는 말은 하나도 들은 적 없었던 것처럼 웃었다.

나를 보고 웃어 주는 보드라운 얼굴을 어루만져 주고 싶어서 손끝이 저렸다.

“정담은 씨, 집에 가야지. 여기서 뭐 합니까?”

마음 같지 않게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도로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그사이 문선준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선준아. 나 택시 좀 불러 줘. 나 집에 갈 거야. 나 집에 가야 해. 집에 가서 마저 싸워야지. 내가 취한 김에 다 엎어 버려야지.”

나를 문선준으로 착각하는 그녀를 일단 등에 업었다.

“고맙다. 문선준……. 자식……. 너 향수 뭐 쓰냐? 우리 왕자님이랑 냄새가 똑같네.”

그녀가 내 등에 대고 얼굴을 비비며 훌쩍거렸다.

등에 업혀서 꼼지락거리는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다니, 나도 미친놈이다.

앞 좌석에 태울 수가 없어서 뒷좌석에 그녀를 눕히듯 했다.

“기사님. 정웅그룹 회장 집이요. 거기가 우리 집이거든요. 근데요.”

택시에 올라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주정을 시작했다.

“그 사람은 우리 집 앞에 저를 한 번도 데려다준 적이 없어요. 제가 말을 못 했거든요. 나도 말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차였어요.”

나는 그녀의 주정을 들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정웅그룹 회장 집이 대체 어딘데?

그 동네에 가서 수소문하면 알 수도 있겠지만, 술에 취한 그녀를 데리고 정웅그룹 회장 집을 묻고 다니는 것도 꼴사나웠다.

술 취한 정웅그룹 맏딸이 인사불성이 되어서 남자 차에 실려 다니더란 추문이 도는 것도 싫었다.

그래, 합리화다.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몰라서 그녀를 제집으로 데리고 가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자기 합리화.

그사이 그녀는 가죽 시트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나도 말하고 싶었거든요. 정말 말하고 싶었거든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랑 결혼까지 생각했어! 같은 집, 같은 방에서…….”

노래까지 불러 댄다.

“실컷 사랑하려 했어! 한순간 물거품이 된 꿈! 슬퍼서! 크라이! 크라이! 크라이이이이이!”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기적인 나는, 나와 헤어졌다는 이유로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아무리 울어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집 앞 지정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모두 잠들어서 고요했다. 다행히 그녀도 차에서 부리던 주정을 이어 가지는 않았다.

지난밤, 서로를 부둥켜안았던 내 침대 위에 그녀를 다시 눕혔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졌고, 술에 취한 그녀는 완벽하게 무방비했다.

순간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무서운 욕망이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그녀를 가두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서 단둘이 살아 볼까?

“선준아.”

그녀는 아직 문선준이 곁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지 알아?”

유복한 환경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녀는 언제가 가장 행복했을까.

나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눈을 감고 떠드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를 왜 사랑하는지 물어봤을 때.”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내뱉은 말에 가슴이 죄였다.

“그때 너무 행복했어. 그 사람이 그랬어. 솔직해서. 예뻐서. 선해서. 내 평생의 복 같아! 라고.”

초라한 언어였다. 그녀를 받아들인 내 마음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내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너무 행복했어.”

그런데 그녀는 비루한 말 한마디에도 가장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근데 선준아.”

그녀의 목소리에 사뭇 슬픈 기색이 감돌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게 뭔지 알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옆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잡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가슴에 품고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보물이라도 잡은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슬픈 건 말이야. 나를 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그 답이 너무 잔인할 것 같아서 못 물어보겠어.”

그녀의 말투에서 확연한 울음기가 묻어났다.

“거짓말했어. 안 예뻐. 못됐어. 너는 내 삶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야. 라고 할까 봐…….”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답해 주고 싶지만…….

“내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워.”

웅크린 그녀가 안쓰러웠다. 괜찮다고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절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모든 걸 다 버리고 얻고 싶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선준아. 나 정말 잘하고 싶었어.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렇게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는 아닌가 봐. 그런 삶은 나한테 없나 봐.”

이제 그녀는 주정할 기운도 잃어 가는 듯 보였다.

“나는 그냥 정해진 대로 살아야 하는 건가 봐. 불행하고, 외롭게. 미안해, 선준아. 미래는 안 바뀌어. 안 바뀌는 게 맞나 봐.”

술이 과한 게 맞는지, 그녀는 다소 과장된 비관론자가 되어 버렸다.

“그만 떠들고, 자라. 정담은.”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고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서는 내 허벅지에 머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입가에 고인 미소를 거둘 수가 없었다.

“잘 자요, 서후 씨.”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걸까?

“내 꿈에서라도 자주 봐.”

속삭이듯 중얼거린 그녀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밤이 깊도록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 허벅지를 베고 누운 여자가 행복한 꿈에서 깨어날까 봐.

그녀의 행복한 꿈이라도 지켜 주고 싶었다.

***

“어? 예쁜 언니 일어났다!”

할머니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녀의 곁에 누워 있었다.

잠에서 깬 그녀는 숙취 때문인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큰오빠, 인제 언니도 우리랑 같이 사는 거지? 언니 또 다른 남자한테 가는 거 아니지?”

가끔은 할머니가 뭘 알고 저러시는 건가 싶다.

“아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저랑 같이 나가요. 네?”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께서 할머니를 부축해 나가셨다.

“우리 아침은 뭘 먹어? 나 콩나물국 먹고 싶다우.”

할머니는 아주머니를 모친 대하듯 했다.

“그래. 우리 아침은 콩나물국 먹자. 해장해야 할 사람도 있으니까.”

그녀가 귀신처럼 일어나서 침대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제 그렇게 주정을 부리더니, 목소리가 살짝 쉬어 있다.

“어제 문선준이랑 저녁 먹으면서 술 마셨어? 문선준이 나한테 전화했어.”

“그렇다고 여길 데려와요?”

그녀의 물음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아.”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요? 차인 남자 집에서 술 취한 다음 날 일어나는 게 얼마나…….”

그녀가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자존심도 없나 봐요. 이렇게 다시 보니까 좋아요.”

심장이 덜컹거렸다.

“할머니 말이에요. 이렇게 다시 뵈니까 좋다고요.”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집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잖아요. 아니면 선준이한테 알아서 하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녀는 민망한 아침에 관한 책임을 나에게 묻고 있었다.

“문선준이 너 버리고 갔어.”

“나쁜 새끼.”

그녀가 욕을 씹어뱉었다.

그런데 그 욕이 선준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럼 공범이라고 해 두죠.”

“공범?”

내 되물음에 그녀가 나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술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집에 제 발로 가지 못한 죄인. 그리고 민서후 씨는 그런 여자를 측은하게 여기고 집으로 데리고 온 죄인. 서로 헤어진 마당에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공범이죠.”

뾰로통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머리는 산발해선 자존심은 챙겨 보겠다고 떠드는 모양새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랑스럽다.

마음이 한없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옆자리를 채워 줄 수 있는 조건 좋은 남자는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나보다 더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평생 꽁꽁 싸매 두었던 마음을 열고 내어 준 곁이었다.

어렵사리 소중한 자리를 내어 줄 사람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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