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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36/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36화

“오빠, 예쁜 언니는 잘 있어?”

치약을 짠 칫솔을 건네받은 할머니가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응.”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의 헛소리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었다.

“예쁜 언니 보고 싶다우. 그 언니 진짜 착해. 맛난 도시락도 만들어 주고. 나 데리고 저어기 먼 데로 소풍도 다녀왔다우. 큰오빠, 그거 기억나지?”

어린아이처럼 구는 할머니는 지난가을의 소풍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날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웃으며 할머니의 오빠 역할을 연기하곤 했었다.

“오빠, 왜 대답이 없어?”

“응. 얼른 양치질부터 해.”

그런데 오늘은 할머니의 물음에 답하는 게 쉽지가 않다.

“예쁜 언니 또 안 와? 언니 본 지 백 년은 된 것 같다우. 나도 이제 밥도 지을 줄 아는데…….”

할머니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욕실 거울에 비친 나를 응시했다.

“혹시, 예쁜 언니……. 여관방 그 총각 놈이랑 도망간 거야? 정말 다른 데로 시집가 버려서 우리 집에는 안 오는 거야?”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니야.”

짧은 대꾸에 할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빠는 만날 아니라고만 하지! 근데 왜 언니가 집에 안 와! 왜 오빠는 그렇게 뿔이 난 건데!”

할머니의 비명을 들은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가 욕실로 달려왔다.

“뭐가 이렇게 서러워서 눈물 바람일까? 왜 울어요? 응?”

아주머니가 할머니의 젖은 뺨을 닦아 주며 어르기 시작했다.

“오빠 나빠! 오빠가 나빠서 예쁜 언니가 우리 집에 안 오는 거야! 오빠 미워!”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제껏 할머니의 응석과 생떼를 묵묵히 견뎌 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할머니가 내뱉는 말 한 마디조차 들어주기가 버겁다.

하필 할머니의 그리움은 전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욕실에서 나와 부엌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바구니를 살폈다.

할머니가 잠들기 전에 약을 챙겨야 하는 시간이었다.

“서후 군, 할머니 양치질하시기 전에 약 드셨어.”

아주머니의 조용한 목소리에, 나는 약봉지를 뜯다가 말고 멈칫했다.

“아, 그랬네요. 제가 깜빡했습니다.”

“무슨 일 있어? 오늘 퇴근하고 계속 얼굴이 안 좋은데……. 안 하던 실수를 다 하고…….”

“아닙니다. 회사 일이 좀 많아서요.”

마른 얼굴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고,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 없다.

갖고 싶어도 가지고 싶다고 말하기 어렵고, 붙잡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여자의 모습이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서 되살아났다.

떨치려고 애를 써도 쉽지가 않은데, 할머니가 끊임없이 ‘예쁜 언니’를 찾아 대니 미칠 노릇이다.

“이모, 가지 마요. 나 오빠 싫어. 오빠랑은 안 잘 테야!”

잠옷으로 갈아입은 할머니는 나에게 눈을 흘기고는 침실 문을 닫아 버렸다.

“오늘은 내가 그냥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좋겠어요. 서후 군 얼굴도 말이 아니야. 회사 일이 힘들기는 한가 보다. 오늘은 할머니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요.”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아주머니는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려 주고는 할머니의 침실로 들어가셨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나는 소파에 허물어지듯 앉았다.

샤워도 해야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그녀를 품에 안고 보듬었던 침실, 서로의 옷가지가 뒤엉켜 있었던 바닥.

지금 당장은 그걸 마주할 수가 없다.

소파 팔걸이를 베개 삼아서 길게 몸을 눕혔다.

잊히겠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집 안 곳곳에 부모님과의 추억이 묻어나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었다.

지금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정담은의 모습이 살아났다.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던 여자가.

마당 나무 테이블에 앉아서 도시락을 펼치던 여자가.

할머니의 침실 바닥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가.

내 침대에 누워서 사랑을 속삭이던 여자가.

너무 무방비했다.

이런 식으로 내 생활 속까지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면 안 되는 거였다.

하물며 평범한 사람이었어도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 여자였다.

잠시 꿈을 꿨다고 생각하자.

앞으로 고된 삶을 이어 나갈 단꿈을 꾼 거라고.

피곤하고 몽롱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깨어 있지도 않은 상태.

지금쯤 퇴근했으려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잠들기 전까지 전화 통화를 하던 생각이 나서 가슴이 갑갑해졌다.

눈시울이 느닷없이 뜨거워져서 한숨을 내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부모의 죽음을 향한 고달픈 애도의 시간도 지나가기 마련인데, 이 또한 잊힐 것이다.

소파에 누워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원망할 무렵이었다.

식탁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어김없이 정담은을 떠올렸고, 가슴이 죄였다.

휴대전화 화면에 떠오른 이름도 정담은.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냥 그녀가 포기하고 물러나 주기를 바랐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싫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울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내가 너한테 더는 상처 주는 일이 없게 해 줘.

마침내 신호가 끊기고 나서야, 나는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처음 마음을 내어준 여자다.

누구보다 소중하게 보듬어 주고 싶은 사람이다.

어설픈 농담으로라도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존재다.

만약 내가 처한 상황을 그녀의 집에서 고까워한다면 자존심이고 뭐고 내버리고 필사적으로 매달릴 작정이었다.

그러다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의 행복을 바라겠노라고 무던히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녀와 나의 관계는 알량한 자존심 따위 버린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손 가정에서 온갖 편견을 안고 자란 것도 모자라, 할머니의 직업 탓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받아 마땅한 여자다.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 나는 그녀에게 나의 모든 시간과 정성을 할애할 수도 없다.

약속을 취소하고, 밥 먹다가 집으로 달려 들어온 것처럼.

어쩌면 예견된 이별이 조금 빨리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멀리서 지켜본 세월은 짧지 않았다.

처음 신입 사원 OT에서 그녀를 발견한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가끔 회사 로비, 복도에서 마주치면 무심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몰래 지켜보곤 했다.

절대 꺾어서는 안 될, 세상 유일한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눈길로만 그녀를 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었다.

책임자로 부임해야 할 사업본부 소속 직원 명단을 받아 보았을 때,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발견하고는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회의 시간에 넋을 놓은 그녀를 본부장실로 불러내고, 그날 밤에는 충동적으로 전화도 걸었다.

내 전화에 유쾌하게 반응하는 그녀와 통화를 마치고, 그날 밤 나는 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을 때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고, 탕비실에서 입을 맞췄을 때는 제어하지 못할 욕구가 치밀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녀를 지켜본 시간과 우리가 함께했던 날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따듯한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연애라는 것에 공을 들인 물리적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후유증을 앓는다면 공들인 시간만큼만 앓길 바랄 뿐이다.

또다시 동굴 같은 세상으로 기어들어 온 것 같은 기분.

햇살처럼 밝았던 여자 덕분에 보송보송한 바깥공기를 조금이나마 들이마실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지.

이제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식탁 소파 위로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휴대전화 주인이 인사불성이 되어서요.]

문자메시지를 마주하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빈혈 때문에 정신을 잃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뛰어 댔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또다시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지금 거기 어딥니까?”

- 민서후 씨?

그녀의 휴대전화 너머에서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꽉 틀어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려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뒤섞였다.

이 시간에 네 전화를 왜 남자가 받는데?

“지금 어딥니까?”

- 지금 도곡동입니다. 휴대전화 주인이 많이 취했는데요.

취했다고? 그래서 남자와 함께 있다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 여자 옆에 동행은 없습니까?”

- 없는 것 같네요.

숨이 턱 막혔다.

“지금 거기로 가죠.”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을 뛰쳐나왔다.

도곡동까지 운전해서 가는 동안, 피가 거꾸로 솟아서 눈앞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남자가 일러 준 고깃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고깃집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의 사촌 동생이라고 속였던 문선준이 서 있었다.

“너야? 나한테 전화한 거?”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네, 제가 전화했어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네가 알아서 해.”

돌아서려는데, 문선준이 먼저 걸음을 뗐다.

“저도 모르겠네요. 그럼 그냥 버리고 가시든지요.”

선준이 택시 정류장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무심한 태도였다.

“문선준!”

선준이 천천히 돌아섰다.

“누나한테 못 들었어? 우리 이제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럼, 그쪽은 누나한테 못 들으셨어요? 저랑 누나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어 보인 선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여긴 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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