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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35/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35화

미래는 정말 바뀌지 않는 것일까?

민서후가 나를 ‘정담은 이사’라고 부른 순간, 저주의 주문이 읊어진 듯했다.

저주는 직장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익명 어플과 단체 채팅방을 통해서 퍼져 나갔다.

시작은 누군가 익명 어플에 올린 게시글이었다.

『오늘 우리 회사 공주님이 누군지 밝혀짐.』

익명의 게시자 아이디 옆에서는 정웅그룹의 회사 로고가 찍혀 있었다.

해당 게시글에는 정웅그룹뿐만 아니라, 가십을 좋아하는 이들의 댓글이 수도 없이 이어졌다.

┗ 웃긴 게 우리 공주님 진짜 별명이 공주였음. 동화 속 공주처럼 예쁘고 착하다고.

┗ 예쁘기는 함. ㅇㅇ.

┗ 사내 연애 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공주가 평민이랑 연애한 거임?

‘사내 연애’라는 언급에서 시작된 코난 놀이는 퇴근 시간 무렵에 절정에 이르렀다.

인터넷 신문사에서 기사를 터뜨린 것이다.

『공주의 남자는 누구?』

진짜 지랄하고 자빠졌다.

지난번에 J그룹 장녀와 B전자 아들의 결혼 기사를 내보냈던 전력이 있는 인터넷 신문사였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봐 가며 후속 기사를 내보낼 것 같았다.

직장인 전용 어플을 통해 퍼져 나간 소식에는 어두웠던 선준이 기사가 뜨자마자 득달같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세상에 뒤집힌 건데?]

[수습할 거야.]

지금 당장에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선준에게까지 시달린다면 내 인내력이 바닥을 드러낼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민서후한테 차인 지 불과 3시간.

아직 이별이 실감 나지 않는 탓인지 눈물이 나질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을 때만 해도 내 인생이 곧 나락으로 떨어질 것처럼 겁이 났었다.

그런데 평소처럼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지금은…… 그저 아무렇지 않은 기분이다.

이별의 현실 반영 속도는 내 생각과 같지 않은가 보다.

다만 이별보다 더 확 와닿는 게 있다면 우정의 상실로 인한 아픔이었다.

[수아야.]

내가 메신저를 통해 조용히 말을 걸었을 때, 수아는 솔직한 성격답게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나 지금 너 불편해. 우리 나중에 이야기하자.]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나중에 이야기하자.]

수아는 내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사내 메신저에서 로그아웃 해 버렸다.

묵묵히 주어진 업무를 마치고, 나는 제시간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퇴근했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선준의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에는 별다른 언급 없이 인터넷 기사의 링크만 있었다.

『공주의 남자, B전자 아들로 밝혀져…… 본보에서 예고했던 대로 두 사람이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해 왔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두 사람은…….』

내가 회장실에 쳐들어가서 아이를 가졌다고 쇼하기 전에 미리 써 둔 기사인 것처럼 보였다.

기사의 신빙성을 더하듯, 끝에 사진이 하나 삽입되어 있었다.

강재만이 우리 집에서 식사했던 날, 나와 강재만이 집 마당 주차장을 함께 걷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쩐지……. 강재만처럼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인간이 외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점이 수상쩍기는 했었다.

『두 사람은 이날 아침을 함께 보내고, 같은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자극적인 문구와 얼굴을 모자이크 한 사진, 재벌가 이니셜의 조화는 내 눈에도 흥미로워 보였다.

대중의 눈길을 끌 자극적인 요소를 모아 놓은 기사는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할 시간을 벌어 준 것인지, 선준이 이제야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 어떻게 된 거야?

선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변하면 된다고.”

- 응.

선준은 짧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알아서 수습할 거니까.”

내 인생을 두고 몰아치는 폭풍우 앞에서 나는 비교적 담대하게 굴려고 애썼다.

- 어디야?

“집에 가는 길.”

- 잠깐 만나.

선준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누구라도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을 붙들고 속풀이를 하고 싶었다.

선준의 집 근처 고깃집, 선준은 이런 때일수록 힘을 내야 한다며 나를 어른스럽게 다독이려고 애썼다.

“많이 먹어. 빌빌거리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고기 한 점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민서후한테 차였어?”

“차였는데, 헤어진 것 같지가 않아. 이상하지? 그냥 내가 전화하면 받아 줄 것 같고,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만나 줄 것 같고……. 그래.”

“충격이 심해서 현실감각이 떨어졌구나?”

선준이 실소했다.

“아냐. 충격은 무슨. 나 멀쩡해.”

불판 위에서 고기 한 점을 더 집어서 입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그거 안 익었어.”

“소고기는 불만 닿으면 먹어도 돼.”

“그거 돼지고기야.”

나는 입에 넣으려던 고기를 앞 접시에 내려놓고는 어설프게 웃었다.

“본인이 소를 먹는지, 돼지를 먹는지도 모르고.”

“지금 너무 배고파서 그런 거야.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입술을 옆으로 찍 늘리며 웃었다.

“본인이 웃는지, 우는지도 모르고.”

멍청하게도 나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데,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뺨을 닦아 주던 남자가 생각났다.

따뜻했던 손길과 그윽했던 눈빛,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여겨지는 눈물 젖은 키스까지.

입술에서 촉촉한 감촉이 되살아나자 울음이 와르르 터져 나왔다.

“으흐흑.”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스테인리스 테이블에 엎드려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었다.

“어휴.”

선준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둥, 계획이 뭐냐는 둥,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냐는 둥, 선준은 호들갑스럽게 묻지 않고 내 등을 다독여 주었다.

“너 이렇게 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예전에 사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누굴 패륜으로 몰아?”

나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는 항의하듯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힘들어 보인다고.”

선준이 머쓱한 얼굴로 휴지를 내밀며 물었다.

“어떻게, 술이라도 좀 마실래?”

“술?”

“이럴 때는 술을 한잔 마셔야지. 일이 빵빵 터졌는데, 멀쩡한 정신으로 어떻게 버텨?”

선준은 겁도 없이 소주를 주문해서 내 앞에 놔주었다. 자기는 안 마시고 누나만 마실 거라는 말도 깨알같이 종업원에게 전했다.

“한잔 마시고, 오늘은 푹 자.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에 생각해 보자. 우리.”

나는 작은 유리잔에 선준이 따라 주는 소주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술이 물처럼 들어갔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있잖아. 우리 서후 씨가 나한테 그랬다? 자기는 선하게 살았는데……. 선하게 살면 복 받는다고 했는데……. 복을 받았던 적이 없대.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나를 만나고 그 복을 한꺼번에 받은 것 같다고.”

나는 그의 고백을 떠올리며 오열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나는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고백을 들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굴러 들어온 복 맞지! 정웅 딸이라는데! 고민할 게 뭐가 있어? 안 그래? 남들은 내 옆에 붙고 싶어서 난린데!”

술집은 시끄러웠고, 나의 주정은 그 소음에 희석되었다.

“그래. 복덩이지, 복덩이야.”

선준은 내가 하는 말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있잖아. 우리 서후 씨가 나한테 그랬다?”

나는 했던 말을 또 하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 댔다.

지난밤에 들었던 고백이 퍽 인상적이었던 탓인가 보다.

나는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선준은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들어 주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러다 눈이 까무룩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잘생긴 얼굴이 하나 보였다.

“어? 민서후다. 우리 민서후다.”

이제 헛것이 다 보인다. 마주 앉은 얼굴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선준아. 나 택시 좀 불러 줘. 나 집에 갈 거야. 나 집에 가야 돼. 집에 가서 마저 싸워야지. 내가 취한 김에 다 엎어 버려야지.”

한참을 혼자 떠드는 동안,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선준이 나를 업고 걷는 듯했다.

“고맙다. 문선준……. 자식……. 너 향수 뭐 쓰냐? 우리 왕자님이랑 냄새가 똑같네.”

나는 선준의 등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택시 뒷좌석으로 몸이 밀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좌석 위에 널브러져서 외쳤다.

“기사님. 정웅그룹 회장 집이요. 거기가 우리 집이거든요. 근데요.”

술기운에 울컥 눈물이 났다.

“그 사람은 우리 집 앞에 저를 한 번도 데려다준 적이 없어요. 제가 말을 못 했거든요. 나도 말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차였어요.”

차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차가운 가죽 시트에 엎드려서 울었다.

“나도 말하고 싶었거든요. 정말 말하고 싶었거든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랑 결혼까지 생각했어! 같은 집, 같은 방에서…….”

나는 철 지난 노래를 부르면서 눈을 감았다.

또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 예쁜 언니 일어났다!”

고개를 돌린 곳에서 민서후의 할머니가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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