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34화

    “저! 저! 저!”

    아버지가 허공에 삿대질을 해 대며 목덜미를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강재만이 과장된 어조로 물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부축하려고 했다.

    “우리 회장님, 엄살이 느셨네요.”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감히 아비 앞에서!”

    “강재만 과장은 정 회장님 수양아들이라도 되기로 했어요? 아버님 소리가 되게 쉽게 나오네요.”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무구한 의문을 표하듯이 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재만의 얼굴이 곧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너 어디 강 과장한테!”

    “회장님, 방금 인사 공고 떴잖아요. 저 이사라면서요? 감히 과장 나부랭이가 천지 구분 못 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잘못된 호칭을 쓰는데, 윗사람으로서 주의 정도는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찬 대답에 아버지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니까.

    “강재만 과장. 재생에너지가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배터리 성능과 관련 있어요. 백헌에서 해당 개발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은 참 반갑네요.”

    돈에만 눈이 먼 강재만의 얼굴에 미미하게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요. 배터리 개발,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면, 벌써 재생에너지 보관 문제가 해결됐겠죠. 생산한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고효율 저비용의 배터리가 진작 보급되었을 테고요.”

    나는 엄정한 시선을 아버지에게로 옮겨 갔다.

    “우리 사업본부가 백헌하고 손잡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손해만 보는 투자는 주주들도 반대할 거고요.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업무 시간에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시죠, 본부장님.”

    민서후가 재킷 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났다.

    “앉아! 어딜 나가? 해명하고 나가!”

    “해명이요?”

    나는 선 채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이라니!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이라니! 아, 이것 좀 놔!”

    자꾸 부축하려고 드는 강재만이 귀찮은지, 아버지가 강재만을 밀쳤다.

    다소 무안해하는 듯했지만, 강재만은 뻔뻔하게 아버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 표정을 금세 바꾸었다. ‘아첨’이라는 단어와 ‘강재만’은 동의어인가 보다.

    “설명하고 가! 아이라니!”

    “축하드려요. 곧 할아버지 되시겠어요. 아버지 배포를 닮은 손자일지, 아버지 혜안을 닮은 손녀일지, 저도 무척 궁금하네요.”

    손자, 손녀라는 단어에 아버지는 사고 회로가 정지된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제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버지가 이성을 되찾기 전에 나는 얼른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가 나타날 때까지 나는 쉼없이 걸었다.

    밀폐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뒷무릎에서 힘이 쭉 빠졌다.

    “와, 저 진짜 심장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일단 뻔뻔하게 나가 보기로 하자.

    짜잔! 제가 바로 정웅그룹 회장님의 맏딸 정담은이었답니다! 정말 모르셨나요? 제 얼굴을 알려지지 않았어도, 이름도 못 들어 보셨어요?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민서후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기……!”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팔을 기다랗게 뻗어서 비상 정지 버튼을 우아하게 눌렀다.

    덜컹 소리와 함께 아래로 향하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바닥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달라붙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한 발짝씩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나는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다가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몰렸다.

    펌프스의 둥근 앞코가 그의 구둣발 사이에 갇혔다.

    그가 두 손을 뻗어서 내 머리 옆, 엘리베이터 벽을 짚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하나도.”

    목소리가 낮았다.

    “안 닮았는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그의 질문에 나는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아버지를 안 닮고, 어머니를 닮기는 했어요.”

    그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은?”

    의문을 하나씩 해소하려는 모양인지, 그가 눈썹을 치뜨며 물었다.

    “거긴……. 그때 보셨던 선준이 집이에요.”

    그는 이번에도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선준은 어떻게 사촌이지? 이종 아니면 고종?”

    이종, 고종은커녕 세종대왕 할아버지가 온다고 해도 우리는 사촌이 될 수가 없다.

    “사촌 동생은 아니에요. 사정이 있었어요.”

    “아.”

    이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사정이라……. 꽤 복잡한 사정일 것 같네?”

    대답을 원하고 묻는 말이 아닌, 혼잣말인 것 같았다.

    “그래. 누구나 인생에 복잡한 사정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또다시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잘 풀려 가는 것인지, 아닌지…….

    그의 반응만 놓고 봐서는 모르겠다.

    “사실 어제 이야기할 생각이었어요. 선준이랑 같이 저녁 먹고 나서, 집에 들어가는 길에 다 털어놓으려고 했어요.”

    “속이기는 했지만, 사실을 말할 계획도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상참작을 바라는 건가?”

    나는 눈을 한 바퀴 굴리고는 되물었다.

    “제 죄가 정상참작을 바랄 정도인가요?”

    “감히 날 가지고 놀아 놓고?”

    그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고개를 불쑥 내밀면 미소를 머금은 입술을 쭉 빨아당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화를 내는 순간에도 미치도록 섹시한 남자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가지고 논 거 아니에요! 저는 진심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진심이라면서 아까 회장실에서 그런 말을 해?”

    “회장실에서 제가 한 말이 하도 많아서……..”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모르는 내 아이는 언제 생긴 걸까?”

    “아마도 어젯밤에?”

    나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가 실소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급기야 그가 고개를 숙이며 박장대소했다.

    “그러니까 정담은이……. 우리 집에 와서 할머니랑 마당에서 가을 소풍 놀이 하던 정담은이……. 어젯밤에도 우리 집에 왔던 정담은이……. 회장님 딸이라고?”

    그는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계인 것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그가 어깨를 들썩이도록 한숨을 몰아쉬었다.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나는……. 내 배경이 알려지기 전에, 내 마음부터 전하고 싶었어요.”

    그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는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그런 걸 일부러 속였다고 하는 거야.”

    “만약 제가 정웅그룹 회장의 딸이라고 솔직히 말했다면, 편견 없이 저를 봐 주셨을까요?”

    “왜 내가 편견을 가질 거라고, 먼저 가정했지?”

    나는 말문이 턱 막혀서 머뭇거렸다.

    “네가 나한테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고?”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에요! 좋아해서 조심한 거라고요! 내 배경만 보고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내가 네 배경에 혹해서 접근할까 봐 걱정이라도 한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서후 씨도 가족 이야기 아무한테나 하지 않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그게 그거랑 어떻게 같을까.”

    절대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와 나는 마주 서서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할 뿐, 상대방의 마음에는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대화만이 이어졌다.

    “그럼, 내가 너한테 어떤 편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나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제 주변에는요. 강재만처럼 조건만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어요. 친구도, 연애도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서후 씨였어요.”

    목소리 끝이 자꾸만 떨리려고 해서 한 번 더 심호흡해야만 했다.

    “손익에 따라서 관계를 결정하는 그런 사이 말고, 나만 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그가 약간 동요하는 듯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해요. 그렇지만 나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요. 고민도 많이 했어요.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제 다 털어놓으려고 했어요.”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제발 내 진심을 알아달라는 뜻으로 그를 응시했다.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열망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허공에서 시선이 눅진하게 얽혔다.

    “왜 울고 그래?”

    그가 엄지로 광대 위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윽고 젖은 입술에 그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그의 혀가 밀려들어 오면서 눈물 맛이 났다. 혀가 얽힐 때마다 복잡하게 꼬여 있던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그는 거짓을 일삼은 나를 탓하기라도 하듯 커다란 손으로 내 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키스는 달콤하고도 쌉싸름했다.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안타까운 입맞춤이었다.

    가까스로 입술을 뗀 그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여전히 이 관계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그의 말투에서는 서글픔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가능성,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내 뺨을 한 번 더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온도가 사뭇 차가웠다.

    “정담은 이사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호칭이 모든 것을 결정할 때가 있다.

    그에게 나는, 이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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