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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33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키보드를 치고 있기는 했지만, 졸음을 이겨 내기가 쉽지 않았다.

머그잔을 들어 올려 입에 가져다 대자, 커피 한 방울이 쪼르륵 입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오후에만 커피를 석 잔이나 마셨다. 다시 커피를 내리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이게 뭐야? 뭐라는 거야, 대체?”

사무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내 인트라넷에 전체 중요 공지가 새로 떴다는 알림이 모니터 하단에서 반짝거렸다.

공지 내용이 대단히 충격적인 모양이다.

“대박.”

옆자리에서 수아가 조용히 읊조렸다.

“왜? 뭔데 그래?”

수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니터를 응시하던 수아의 건조한 시선이 나에게 옮겨붙었다.

수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말아 문 채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불길하다.

내가 공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호들갑을 떨면서, 내용을 읊어 줘야 할 수아가 평소답지 않게 조용하다.

나는 상체를 굽히고 마우스를 달칵 움직였다.

『인사 공고

정웅에너지 및 정웅그룹의 전사적 경영 증진을 위해,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 소속 정담은 대리를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의 총괄책임자로 임명한다. 정담은 총괄책임자는 정웅그룹의 이사직을 겸하여…….』

공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사무실 직원 휴대전화가 여기저기서 울려 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대체…….”

총괄책임자면서 그룹의 이사직이면 민서후 본부장의 보고를 받아야 하는 상사의 위치가 된다.

혈관이 얼어붙는 듯했다. 미미한 현기증이 이는 것만 같아서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또 쓰러질 수는 없는 일이다.

안 돼, 제발. 정신 차려, 정담은.

공고 내용을 샅샅이 살피느라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본부장실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는지 심각한 얼굴이었다.

공지에는 내가 정웅그룹 회장의 맏딸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임직원의 의심을 키우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나는 서슴없이 본부장실로 걸었다.

통화를 마친 그가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우리는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마주 섰다.

누가 귀에서 전쟁을 알리는 북을 쳐 대는 것처럼, 심장이 둥둥 울려 댔다.

“정담은 대리……. 아니, 이사님.”

그가 말끝을 높이며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방금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건조한 그의 음성이 잘 벼린 칼날이 되어 가슴에 훅 박혔다.

“본부장님, 그건.”

“제가 지금 급히 회의가 잡혀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업무 보고는 회의가 끝난 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구 실장의 당부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왕왕 울려 댔다.

‘꼭 담은 양이 먼저 말해야 해요. 다른 사람 통해서 듣게 하면 안 되고. 알죠?’

당연한 거였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다.

어제 그가 급히 자리를 뜨지만 않았어도, 할머니를 돌보느라 힘겨운 모습만 보이지 않았어도…… 나는 그에게 내 삶의 고단함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타이밍이 엿 같았다.

본부장실 앞에 넋을 잃고 서 있는 나를 직원들이 흘끗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날뛰어 댔다.

나는 아버지에게 경영자로서 인정받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 삶에서 내가 정웅에너지 대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강재만의 계략 덕분이었다.

강재만은 본인의 경영 능력이 의심받을 때마다 창업주의 딸인 나를 앞세우고 이용해 먹었다.

누군가가 즐기고 있는 체스 게임 속 말이 되어 이용당하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게임을 포기하는 것도, 나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이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부터 수습해야만 했다.

나는 조용히 목청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인사 공지 때문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당한 인사라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제가 바로잡겠습니다.”

최대한 모호한 말로 입장을 밝혔다.

원래 사내 정치질에 쓰이는 말은 모호하기 짝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불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나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

또 굳이 사과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지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직원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야 하는 사람은 정웅그룹의 회장이자, 나의 아버지다.

여기서 내가 지금 사과의 말을 건넨다면, 직원들은 나에게 잘못이 있기에 사과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런 식으로 사내 정치질을 시작하시겠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우둔한 결단력에 화가 치밀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는데,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모난 구석 하나 없이, 성격이 밝기만 한 수아도 당혹스러운지 얼른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가슴이 찌르르 아파 왔다.

새벽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는 내게서 차갑게 돌아섰고, 친구라고 여겼던 수아는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

절망감이 전신을 덮치고, 울화가 솟구쳤다.

이대로 무너지면 안 돼.

나는 어금니를 악문 채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 사무실을 나와서 복도를 걷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

나를 알아보는 임직원들이 어색한 눈인사를 건네왔다.

회사 경영에 어리숙한 사람을 세우는 게 아니라며 딸을 무시했던 아버지가 이렇게 나온 배후에는 분명 강재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회장실로 향했다.

정웅그룹에 입사한 이후, 내 발로 회장실에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말단 비서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회장님 좀 뵐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비서실 부실장이라는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안녕하십니까, 정담은 이사님.”

“저 아직 이사직 수락 안 했습니다. 정담은 대리라고 불러 주세요. 회장님 좀 뵙고 싶은데요.”

부실장이 서늘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은색 안경테를 검지 끝으로 살짝 밀어 올렸다.

“회장님께서는 지금 주요 사업본부장들과 긴밀한 회의 중이십니다.”

그렇다면 저 안에 민서후도 앉아 있다는 뜻이 된다.

아버지가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강재만과 결혼할 당시, 대리 직함을 달고 있었다.

그 당시 임직원들 사이에서 평범하고, 조용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 입지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나를 드러내 놓고, 그다음에는 스캔들을 터뜨릴 차례인가?

얕게 읽히는 수에 실소가 터져 나오려고 했다.

능력이 되지 않으니, 여론몰이에 공을 들이려는 양아치 같은 꿍꿍이가 딱 강재만다웠다.

“그럼, 회의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비서진들을 향해 턱을 까딱거렸다.

이제껏 정 회장의 맏딸에 관해 접했던 소문과는 사뭇 다른 나의 태도에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어리숙한 평직원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회의가 끝났는지, 회장실에서 임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중에 민서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회장님, 따님께서 접견을 청하십니다.”

부실장이 깍듯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넣고 있었다.

“들어오시랍니다.”

나는 부실장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내 필요한 사람이 여기 다 모였구먼!”

나는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버지에게는 맏딸인 나조차도 그저 ‘필요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였다.

“저를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시고, 정말 감사하네요.”

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떠들며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소파 세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버지는 상석에 앉아 있었고, 대각선 맞은편에 각각 민서후와 강재만이 자리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지 그러니.”

민서후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소파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마주 앉은 강재만은 느물거리는 웃음을 귀에 걸고는 나를 바라보며 지껄였다.

“앉아요, 담은 씨.”

강재만이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순간 민서후의 날카로운 눈빛이 강재만의 손을 향했다.

다행이다.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민서후의 마음이다.

그가 강재만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과 같다.

나는 보란 듯이 민서후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깍지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자, 다 모였으니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지.”

정 회장이 운을 띄웠다.

“이번에 백헌전자에서 새로운 배터리 개발에 돌입한다고 하네. 아무래도 백헌과의 업무 협약에 있어서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앞으로 우리 정담은 이사가 큰 역할을 해 줄 것 같아. 민 본부장이 우리 정 이사 잘 보필해 주길 바라네.”

나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소심한 정담은이 울음이라도 터뜨리며, 그런 엄청난 일을 감히 맡을 수는 없다고 빌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그런데 내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쏘아보고 있으니 심기가 영 불편해 보였다.

“으음. 그리고 여기 강재만 과장하고, 우리 담은이는…….”

이쯤에서 아버지 말을 끊어야겠다.

“저 민서후 본부장 아이 가졌어요.”

세 남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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