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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2/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32화

    식사 도중 일이 생겼다며 급히 자리를 뜬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때는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여보세요?”

    - 잤어?

    짧은 물음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요. 아직 안 잤어요.”

    그의 연락을 기다리느라 속이 새까맣게 타 버리는 줄 알았다.

    내가 누구의 딸인지 말하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그의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께 무슨 일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괜찮은 거예요?”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아서 그저 괜찮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 어,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는데……. 할머니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서. 지금은 괜찮으셔. 저녁 드시고 잠드셨어.

    “주말에는 항상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거죠?”

    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는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늘 곁에 있던 손주가 요즘 자주 집을 비워서 할머니께서 불안하셨나 봐요.”

    나는 그가 꺼내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 주었다.

    - 이해해 줘서 고마워. 미안하고.

    여전히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기운이 다 빠져서 축 처진 음성이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까 고깃집에서도 먹다 말고 일어났잖아요.”

    - 응, 할머니 저녁 챙겨 드리면서 대충.

    나의 지난 삶만큼이나, 그의 삶도 만만치 않게 힘들어 보였다.

    - 얼른 보고 싶다. 내일 출근이나 해야 볼 수 있겠네.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도 보고 싶어요.”

    - 그런 말 들으니까 힘 나네. 얼른 자. 늦었다.

    통화가 아쉽게 끝나 버렸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힘이 난다고 했던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말 한마디에도 힘이 나는데, 얼굴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천장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던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민서후는 나를 보러 올 수 없지만, 나는 민서후를 보러 갈 수 있잖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정담은은 죽었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담은으로 살아갈 것이다.

    파자마를 벗고, 청바지에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입었다.

    양말을 신는 것도 깜빡하고, 점퍼와 지갑, 휴대전화를 챙겨 들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살금살금 움직이던 나는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침실로 향하려던 구 실장과 1층 로비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다.

    “두 분 주무시죠?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지금 이 시간에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늦을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주무세요.”

    나는 구 실장의 능력을 믿는다며 싱긋 웃어 보이고는 집을 나섰다.

    대문 앞에서 조금 걸어 나와서 호출한 택시에 올라탔다.

    차가운 밤바람에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늦은 시각이어서 그런지 도로에 차가 별로 없었다. 택시는 금세 그의 집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런데 막상 그의 집 대문 앞에 서고 보니, 겁이 났다.

    보고 싶다는 말에 달려오기는 했는데, 그가 곤란해하면 어쩌나 싶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죄없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요?]

    [이제 씻고 나왔어. 아직도 안 잤어?]

    [잠이 안 와서요. 잠깐 산책 나왔어요.]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지금 이 시간에, 산책? 대체 어디로 산책을 나갔다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냥 바람도 쐬고 싶고……. 그래서 나왔는데, 걷다 보니까 서후 씨 집 앞이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뭐?

    놀란 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대문이 벌컥 열렸다.

    “너는, 진짜.”

    그가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며 웃었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그가 내 몸을 당겨 안았다.

    집에서 뛰쳐나온 그는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추운데 이러고 나오면 어떡해요.”

    “너는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오면 어떡해!”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의 입술이 목을 스치고, 뺨을 미끄러져 내 입술을 찾았다.

    부드럽게 맞물리는 감각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의 녹진한 입안을 파고들며 두꺼운 팔뚝을 어루만졌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그의 맨살 위로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입을 떼고는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나 좀 추운데…… 여기 계속 세워 둘 거예요?”

    질문을 내뱉은 동안에도 그는 내 입술 위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들어가자는 말도 없이,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집 안으로 이끌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

    그의 말마따나 할머니는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할머니를 깨울까 봐 걱정되었는지, 그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침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흐응.”

    침실 문이 닫히자마자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게 매달리듯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으며 뒷머리를 쓸어 올렸다.

    막 씻고 나온 것인지, 그의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검은색 점퍼가 침실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보리색 스웨터도 그 위로 곤두박질쳤다.

    “하아.”

    어느새 뜨거워진 숨결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그의 호흡에 따라서 뭉개졌다.

    뒷걸음질 쳤는지 그가 안고 움직였는지 확실치 않았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우리는 그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의 반팔 티셔츠가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방 안 가득 차오른 열기를 식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너는 정말.”

    그가 젖은 입술을 쉼 없이 물고 빨았다. 치아를 세워서 살근살근 깨물었다가, 거세게 흡입하기를 반복하면서 나무라듯 중얼거렸다.

    “이 늦은 밤에…… 보고 싶다고 했다고…… 달려오면…….”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다 못해서 탁하게 쉬어 있었다.

    끓어오른 열기를 제대로 발산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듯한 모습에 가슴이 찌릿했다. 그의 뜨거운 손은 내 심장을 움켜쥘 듯이 봉긋한 살점을 더듬고 있었다.

    “보고 싶다고 하니까요. 볼 수 있는 데 있으니까요.”

    내 목소리 역시 달뜬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의 몸을 덮고 있던 옷가지가 전부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위로 내 스웨터와 청바지가 얽혀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끈기 있는 태도로 나를 안아 주었다.

    살갗을 쓸어올리는 손길은 뜨거웠지만,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으응.”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는 곳을 집요하게 탐하면서도 다정하기만 했다.

    정성스럽게 보듬으면서 격렬한 관능을 감추지 않는 그를 마주하자 눈초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읏.”

    울음 섞인 신음을 흘리자, 그가 내 눈가에 가만히 입을 맞춰 주었다.

    혀를 내밀어 눈물을 핥고, 다시금 입을 맞추며, 사랑을 나누는 동안 흘리는 눈물까지도 안타까워했다.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내가 올게요…….”

    커다란 손이 땀에 젖은 이마를 보드랍게 쓸어넘겨 주었다.

    “고마워.”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어떻게 내가 너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을까.”

    커다란 품이 내 몸을 빈틈없이 꽉 끌어안았다.

    나는 황홀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았다.

    감은 눈 안에서 또다시 별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의 몸을 얇은 막이 뒤덮은 것처럼 은밀한 열기가 주위를 에워쌌다.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치달은 관능에 젖은 숨결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숨을 고르는 동안, 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누워 있었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등을 쓸어내리며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이렇게 와 준 것도 정말…….”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넘긴 그가 이마에 촉,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서후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꼭 달려올 거예요.”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서후 씨도 그럴 거잖아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 이해해 주고……. 그쵸?”

    그는 나에게 무작정 달려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이해를 바란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그래야지.”

    그의 자상한 대답을 듣는 순간,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오늘 그에게 내가 사실을 털어놓았어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 일로 힘들어진 그에게 당장 내 상황을 이해해 달라고 강요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다.

    지금은 이대로 서로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선하게 살면 결국, 복을 받을 거라고.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나는 살면서 나쁜 짓이란 걸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그의 고백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선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복은 나한테 해당 사항이 없는 건지, 나는 항상 고단했고, 외로웠고, 힘들었어. 부모님께 응석 부릴 나이에, 나는 할머니를 도와야 했고. 어른이 되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을 때, 나는 어른으로서 할머니를 책임져야 했거든.”

    솔직한 그의 고백은 경건한 마음마저 갖게 했다.

    “근데 복을 한꺼번에 다 쓰려고 그랬나 봐. 그동안 고생한 걸,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야.”

    이마에 다시금 그의 입술이 닿았다.

    “고마워, 담은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는지, 그가 내 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울리려고 한 이야기 아닌데…….”

    “있잖아요.”

    “응.”

    나는 눈물기를 꾹 삼키고는 간절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서후 씨를 이해한 것처럼……. 나도 이해해 줘야 해요. 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야 해요. 알았죠?”

    “그럼.”

    “약속해 줘요.”

    아이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가 웃으며 손가락을 걸어 왔다.

    “그래, 약속.”

    지금 당장 그에게 폭탄을 떨어뜨릴 수는 없다.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황에서 고백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최대한 이성적인 상황에서 그가 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말을 꺼낼 것이다.

    그 순간, 이 약속이 유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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