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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31화

“얼마 전에 우리 선준 아빠가 백헌 대표하고 라운딩 나갔었는데, 정웅이랑 사돈 맺으면 우리 쪽에 투자해 주기로 했거든요.”

허공에서 나와 선준의 시선이 위태롭게 마주쳤다.

‘그 남자가 결국 사람을 죽였거든요……. 만약 미래를 바꿀 수 없는 거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아까 선준이 했던 말이 다시금 귓전을 맴돌았다.

“제가 지금 여기서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서 집에서 걱정하실 겁니다.”

나는 식사를 하고 갔으면 좋겠다는 선준 모친의 간청에 완곡한 거절 의사까지 밝히고는 그 집을 나섰다.

선준은 나를 택시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는 핑계로 따라 나왔다.

“이것 봐. 바뀌는 게 없잖아! 강재만은 원래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대꾸했다.

“일단 이번 주말에 그 사람한테 이야기할게.”

“민서후한테 본인이 정웅 딸이라는 걸 밝히겠다는 거야?”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자, 선준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꼭 민서후가 아니어도, 결혼은 할 수 있는 거잖아. 민서후는 플랜 A로 생각하자고. 응? 플랜 B를 만들자! 괜찮은 남자 알아볼게. 그 나이 또래 남자들 정보, 나 꽤 많이 갖고 있어. 비서 시절 모았던 인사 기록 다 기억한다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문선준. 너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착각하다니, 뭘?”

나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죽기 직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강재만한테 복수하겠다?”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내젓고는 대꾸했다.

“나도 사랑받는 인생을 살고 싶다. 사랑받고, 사랑하며, 진심으로 나를 아껴 주는 사람과 살았어야 했다.”

선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래서 나는 민서후가 아니면 안 돼. 이번에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야.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 또 조건만 맞춘 남자와 결혼한다면……. 강재만과 다를 게 뭐야? 그거야말로 불행이 반복되는 거야.”

선준은 막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죽기 전에 무슨 생각했어?”

내 진지한 질문에 선준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사실 사고 직전까지는 내가 죽는 줄 몰랐어. 그런데 사고 나고 잠시 넋이 나갔을 때, 강재만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문선준은 잘 처리했다. 문선준 차 브레이크 패드를 손봤는데, 거기 정담은은 안 탔다. 절반의 성공이다. 뭐 그런 소리였어. 누구랑 이야기했는지, 상대가 누구였는지……. 그건 기억이 안 나. 상대방 목소리는 안 들렸거든.”

“만약 신이 있다면, 너한테 새 삶의 기회를 주기 전에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알려 주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넌 강재만한테 복수하는 게 목표야?”

선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복수는 두 개의 무덤을 파고 시작하는 일이야. 하나의 무덤은 원수의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나의 것. 나는 내 손으로 내 무덤 파고 들어갈 생각 없어. 억울한 죽음은 한 번으로 충분해. 나는 우리 가족이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할 거야. 절대 강재만한테 홀리는 일 없게.”

이전 생에서도 현명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나는 기특하다는 듯이 선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 만나자. 응? 내 촉이 그쪽에 가깝다고!”

“일의 우선순위를 따져 보면, 그 할아버지보다……. 내가 강재만을 쳐내고, 민서후랑 결혼하는 일을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닐까?”

선준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일단 이번 주말에 같이 만나기로 한 약속은 취소할게.”

나와 민서후, 문선준은 수능이 끝난 직후의 주말에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다.

“민서후한테는 어디까지 말할 생각이야?”

“내가 정웅 딸이라는 것까지만.”

계책에 능한 선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주말 약속은 취소하지 말자. 만약 민서후한테 전부 털어놔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내가 두 번째 삶의 증인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첫 번째 죽음은 억울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얻은 삶은 소중했다.

원통한 죽음을 맞았던 나와 선준은 이번 삶에서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런데 괴담 책에 나오는 남자의 근황을 접한 후, 선준은 미래를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선준아. 세상은 원래 안 변해. 우리 변화시킬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야. 우리 인생이잖아. 우리가 변하면, 결과는 분명히 달라질 거야.”

“왜 갑자기 진지해지고 그럼?”

무거워진 분위기를 못 견디는 10대 청소년 선준이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준의 눈가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자식, 누나가 하는 말에 감동받았으면서 아닌 척하시기는.

“일단 너는 수능이나 잘 봐. 시험 망쳤다고 질질 짜지 말고.”

“내가 또 기억력은 엄청나게 좋잖아? 나 내가 틀렸던 수능 문제 다 기억하거든? 두고 봐라. 대학 간판을 바꿔 놓을 만한 성적이 나올 테니까.”

선준은 바뀔 대학 간판을 생각하며 웃었고, 나는 바뀔 남편을 떠올리며 웃었다.

우리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걸까?

정말 네 말대로 미래는 바뀌지 않는 것일까?

택시는 선준을 홀로 남겨 두고 출발했다.

인생의 출발점이 달라지면, 미래는 바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

수능이 끝난 직후의 주말이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붐볐다.

선준이 약속 장소를 예약해 두지 않았더라면, 식당을 찾아 헤매느라 고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선준아, 너는 아무래도 비서가 천직인 것 같다!

그가 달궈진 철판 위에서 안심 한 점을 집어서 선준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저 먼저 안 주셔도 되는데, 누나부터 챙겨 주세요.”

오늘은 듬직한 사촌 동생 코스프레를 하기로 작정했는지, 선준이 늠름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가 고기 한 점을 집어서 내 앞 접시에 놓아주며 미소 지었다.

“누나는 당연히 챙길 거고요. 오늘은 수능 본 동생 위해서 모인 날이니까요.”

그는 한참 어린 선준에게도 꼬박꼬박 예의를 갖췄다.

선준은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눈빛으로 민서후를 바라보았다.

그를 우러르는 선준의 눈동자에는 일종의 경외심이 어려 있었다.

식사하는 내내 그는 왼팔을 내 허리께에 살포시 두르고 있었다.

함께 있는 동안은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은 그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다.

“우리 누나 어디가 좋으세요?”

선준의 느닷없는 질문에 그가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착하고, 솔직하고.”

솔직하다는 말에 찔리지 않는다면, 나는 인간도 아닌 거다.

“그리고 예쁘잖아요.”

그가 선준을 향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선준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누나가 솔직해요?”

“솔직한 편이죠.”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거 알아요? 누나가 나한테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 감정을 표현할 때, 솔직하고 용감한 거……. 나는 그렇게 못 살았거든요.”

선준이 이제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만. 집에서 전화가 오네. 나 전화 좀 받고 올게요.”

그가 양해를 구하고는 식사실 밖으로 나갔다.

“솔직해서 좋다는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선준이 목소리를 가라앉히고는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어…….”

“감정 표현에 솔직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잖아. 그리고 본인이 가진 배경에 대해서 밝히기 꺼리는 건, 민서후 본부장도 마찬가지야. 근데 누나가 먼저 다가와 줘서 고맙다는 거잖아.”

“너 오늘 좀 기특하다.”

선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마주 앉은 녀석이 비서였던 시절에도 나는 이 녀석을 꽤 의지했었다.

“너 이번에는 내 비서로 안 살 거야?”

“미쳤냐? 내가 그쪽 비서로 살다가 뒤졌는데?”

선준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순간이었다.

식사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어두운 얼굴을 한 민서후가 들어왔다.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 집에 일이 생겨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그가 식사실 옷장에서 급하게 코트를 꺼내 들었다.

“할머님께 무슨 일 생겼어요?”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기는 했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사달이 나기는 났나 보다.

“이따 연락할게. 식사 계산은 내가 미리 했어. 동생이랑 마저 먹고 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도 아쉬운 듯이 내 어깨를 한번 그러쥐었다가 놓고는 서둘러 식사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선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묘하게 맥 빠지네.”

맥이 빠지는 사람은 나였다.

오늘 밤에는 꼭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자고 크게 마음먹고 나온 참이었다.

오늘 안 되면, 내일 이야기하면 되지.

그렇게 스스로 다독여 보았지만, 심장은 불안정하게 날뛰었다.

일이 꼬이기 직전의 불길함이 신경 줄을 날카롭게 긁어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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