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30화

    “이거 선준이 갖다 줘.”

    퇴근길, 그가 내 손에 쥐여 준 것은 찹쌀떡 상자였다.

    여자 친구의 사촌 동생 수능 찹쌀떡까지 챙기는 세심한 남자라니.

    “자꾸 이렇게 멋있으면 곤란한데요.”

    나는 그의 차 조수석에서 내리기 싫어서 뭉그적거리는 중이었다.

    그는 여전히 선준의 집이 우리 집인 줄 알고 나를 매일 이곳에서 내려주었다.

    언제 말해야 할까.

    지난 여행 이후로 그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다.

    크리스마스에 고백하는 건 어떨까?

    추운 겨울이지만,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마음이 너그러워지곤 한다.

    “무슨 생각해?”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내리기 싫다. 뭐 그런.”

    나는 그를 향한 애정 표현을 에두르는 법이 없었다.

    직설적인 나의 고백에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난감한 미소를 머금던 남자가, 이제는 제법 능글맞은 장난도 친다.

    “그럼 여기서 밤새우든지.”

    그가 빙그레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내 귓불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저 귓불에 그의 손가락이 스쳤을 뿐인데, 전신이 열기에 휩싸인다.

    “너 지금 또.”

    “맞아요. 제 머릿속 지금 쓰레기장이에요. 분리수거도 안 되는 소각용이요.”

    유쾌한 웃음이 와르르 터져 나온 순간, 누군가 조수석 유리창을 똑똑똑 두드렸다.

    아이씨, 깜짝이야!

    차창 밖에 서 있는 놈은 문선준이었다.

    그가 창문을 스르륵 내리자, 선준이 먼저 껄렁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기 정차는 가능한데, 주차 금지 구역이라. 좀 있으면 저 카메라에 찍힐 텐데요?”

    모범 시민으로 빙의한 선준이 턱짓으로 카메라를 가리켰다.

    “응, 이제 가려고. 누나가 안 내리네.”

    그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이제 내릴 거예요.”

    나는 시무룩하게 내뱉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할게.”

    그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그가 집으로 향하는 동안,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곤 했었다.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하고, 그의 차가 먼저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선준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자, 이거 우리 서후 씨가 너 주래.”

    선준은 찹쌀떡 상자를 착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받아라. 팔 아프다. 수능 꼭 잘 보고.”

    “알았어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처럼 선준이 망설였다.

    “왜, 또.”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요? 나랑 그 할아버지 만나러 가 볼래요?”

    “그 할아버지?”

    나는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찾았다는 그 사람이요. 우리처럼 같은 인생을 두 번 산 남자.”

    선준의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그 남자가 어딨는지 어떻게 알았는데?”

    “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 남자가 결국 사람을 죽였거든요. 범죄 기록이 남아 있더라고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만약 미래를 바꿀 수 없는 거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선준의 목소리가 차가운 대기를 스산하게 울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너 그 책에 나온 사람이랑, 우리가 비슷한 상황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어? 증거가 없잖아.”

    “그러니까 만나러 가요. 네? 만나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너 내일이 수능이야. 지금 대체 어딜 가자고 조르는 거야?”

    선준이 한숨을 몰아쉬고는 으르렁거리듯 사납게 되물었다.

    “만약 내가 수능을 보고, 군대에 가고, 우리 집이 예상한 대로 망하고, 나는 정웅그룹에서 일하다가 강재만 손에 죽는다면요? 그럼 수능을 볼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요?”

    비뚤어진 고3의 지나친 상상력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이야기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우리가 이미 한번 겪은 일이니까.

    “일단 선준아.”

    그래도 어른으로서 선준을 달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문선준? 집에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해? 내일이 수능인데, 너 지금 대체!”

    격앙된 목소리로 선준을 다그치며 다가온 사람은 선준의 모친이었다.

    “아, 엄마. 내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한다고요. 들어가세요, 먼저.”

    아들에게 눈을 한번 흘긴 여인의 매서운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아가씨. 멀쩡하게 생겨서, 정신 차려요! 지금 고등학생이랑 뭐 하는 겁니까?”

    “아,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오해? 무슨 오해! 우리 선준이가 얼마나 착한 아들이었는데, 엄마 말이면 껌뻑 죽는 애였어.”

    선준이 한때 마마보이였다는 소리를 했던 것 같기는 하다.

    “요즘 수능을 안 본다는 둥, 대학을 안 가겠다는 둥. 사업하게 아버지 유산 미리 끌어다 달라는 소리를 하질 않나. 아가씨였어요? 아가씨 때문에 우리 선준이 이러는 거야? 그쪽 대체 몇 살이야?”

    선준 모친의 언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여보! 거기서 뭐 해요?”

    누가 봐도 선준의 부친처럼 보이는 남자가 이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선준 아빠! 이 여자예요! 이 여자가 우리 선준이 망쳐 놓은 거야!”

    선준 모친이 급기야 뒷목을 잡는 시늉까지 했다.

    “우리 길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문선준 군과 아무런 사이도…….”

    “오해? 뭐가 오해고, 뭐가 수작인지!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여기서 내뺄 생각하지 말고! 어딜 감히 집 앞까지 찾아와, 찾아오길!”

    나는 선준을 흘끗 쏘아보았지만, 선준은 괴담 책에 등장했던 남자 생각으로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머리채만 잡히지 않았을 뿐이지, 나는 선준의 집에 거의 끌려 들어갔다.

    네 사람이 거실에 마주 앉았다.

    선준은 아직도 그 남자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인지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불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부모였어도 속이 터지고도 남을 만한 태도였다.

    으이그, 저 새끼를 내가 진짜!

    “말해 봐요. 대체 우리 선준이가 요즘 왜 이러는지! 아니 아버지 사업자금 빼서 달라고 하지를 않나. 좋은 투자처가 있다면서 다 망해 가는 회사 이름을 대질 않나. 이상한 주식을 사라고 하지를 않나. 이 집 팔아서 경기도 어디 땅을 사야 한다고 우기질 않나. 얘 요즘 정신이 반쯤 나갔어요. 대체 왜 이래?”

    아마도 선준이 투자하자는 회사는 미래에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는 회사일 것이고, 주식은 떡상 할 것이며, 이사하자는 경기도 땅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땅값이 갑자기 치솟는 곳일 터.

    “우리 선준이한테 돈 벌어 오라고 했어요? 혹시 아가씨, 우리 집이 좀 사는 거 알고. 선준이 꼬신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내 조용하던 선준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엄마.”

    “너는! 이놈 새끼! 가만히 있어! 엄마가 이 아가씨한테 들을 말이 있으니까!”

    아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 누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그리고 우리 집 돈 보고 날 꼬셔?”

    선준이 코웃음 쳤다.

    “네가 좀 귀티가 나야지! 있는 집 아들 같으니까, 순진한 애 홀랑 꼬셔서는!”

    “이 누나, 정여은 친언니야.”

    나는 선준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와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정여은은 내가 애지중지하는 나의 하나뿐인 여동생 이름이었다.

    순간 선준의 교복 가슴팍에 달린 학교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여동생 여은이 다니는 학교의 교복에도 저 로고가 박혀 있다.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녀들이 다닌다는 사립학교였다. 둘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왜 둘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걸 기억해 내지 못했을까?

    하긴 이전 생에서는 고등학생 문선준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으니.

    “정여은 친언니?”

    선준 모친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나를 다시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려 있던 분노가 경외심으로 변해 가는 게 빤히 읽혔다.

    “여은이가 정웅 막내딸이라고 그러지 않았어? 그거 너만 아는 비밀이라고 했잖아! 학교 선생님들도 일부만 안다며! 근데 여기 이분이 여은이 친언니? 그럼 혹시 정웅 맏딸?”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선준을 흘끗거렸다.

    수습해, 이놈아!

    “이 누나가 관악산 정기를 이어받은 대학교 경영 탑이었어. 내가 진로 상담 좀 했어.”

    여기까지는 좋았다.

    “투자 상담도 좀 받았고.”

    일확천금의 꿈을 버리지 못한 선준이 제법 신빙성 있는 정보라는 듯이 덧붙인 말에 선준 부모의 눈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어머,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몰라요. 우리 선준이 성적에 그 학교 경영학과 가능할까요? 우리 선준이가 제 아빠 사업 물려받고 싶어 하는데, 전문경영인 돼서 회사 키울 거라고.”

    선준이 이번 생에서는 내 비서로 살지 않겠다는 듯이 눈썹을 한 번 들썩거렸다.

    나도 너같이 싸가지 없는 비서는 싫다, 이놈아!

    “근데 그 소문은 사실이에요? 백헌 장남이랑 혼담 오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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