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29화

    서울로 향하는 길에는 차가 많이도 막혔다.

    “어? 이 노래, 나 진짜 좋아해요!”

    좋아하는 노래라는 말에 그는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여 주었다.

    나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 부른 상큼한 사랑 노래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 불렀다.

    아,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우리 애기들 노래인지 모르겠다.

    연애 초기의 기운과 청년들의 새콤달콤한 목소리에 힘입어 나는 조수석에 앉은 채로 안무까지 요리조리 따라 하며 즐거워했다.

    “춤까지 다 외워?”

    그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제 최애거든요.”

    그는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살짝 내젓고는 웃었다.

    노래가 끝난 뒤, 라디오 디제이가 졸린 오후를 깨우듯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 방금 듣고 오신 곡은 오늘 자정에 공개된 따끈따끈한 신곡이었습니다!

    나는 조수석에 앉은 채로 굳어 버렸다.

    자정이라면 우리가 한창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을 때였다.

    그가 조수석 쪽을 흘끗 보고는 중얼거렸다.

    “최애는 최애인가 봐? 오늘 자정에 공개된 곡이라는데, 그렇게 다 외우는 걸 보면.”

    그의 목소리에서 뾰로통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듣는 노래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나는 이 노래가 무명 그룹의 신곡이라는 사실을 간과해 버렸다.

    게다가 이 그룹이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한 때는 내년쯤 방영되는 드라마 삽입곡을 부르고 나서부터다.

    “이걸 대체 언제, 어떻게 외운 거야?”

    나는 졸지에 남자 친구와 함께 있는 와중에 남자 아이돌 그룹의 신곡을 외우는 다소 트렌디 한 여자 친구가 되어 버렸다.

    “아까 서후 씨 씻으러 들어갔을 때, 뮤직비디오 뜬 거 잠깐 봤어요. 제가 암기력이 좋거든요. 그래서 한 번 듣고 본 건, 잘 안 잊어버려요.”

    말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다.

    최애라는 말이나 하지 말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면 모를까, 그룹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아이돌 가수였다.

    “원래 좋아하는 건 잘 외워져.”

    그의 목소리에서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기어로브를 잡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에 손깍지를 꼈다.

    “그냥 노래 가사가 좋아서 빨리 외워진 거예요. 꼭 우리 이야기 같잖아요.”

    나는 노래의 후렴구를 다시금 흥얼거렸다.

    “내 말에만 귀 기울이는 너의 표정. 황홀한 미소는 심장을 녹이고. 내 얼굴만 바라보는 너의 눈빛. 다정한 손길은 영혼도 사로잡아. Hold me tight, baby. 내 모든 걸 가져도 좋아. My sweet heart.”

    그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실소했다.

    “맞잖아요. 우리 이야기.”

    내친김에 나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세상 모든 사랑 노래가 우리 이야기 같거든요. 그래서 사랑 노래는 부른 가수들은 전부 최애가 될지도 몰라요.”

    마치 우리의 연애 때문에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아끼게 되었다는 듯이 둘러댔다.

    “으이그. 말이나 못 하면.”

    그가 깍지 낀 손을 끌어가서 내 손등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차는 영동고속도로 위를 천천히 굴러가고 있었다.

    핸드백 속에서 휴대전화가 왕왕 울리기 시작하자, 그가 잡은 손을 슬며시 놓아주었다.

    아쉬운 마음을 내리누르며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오냐, 네가 이번 주말에는 왜 조용한가 했다?

    발신인은 선준이었다.

    “누나 지금 강원도에서 집에 가는 길.”

    나는 ‘여보세요’도 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 대표님……. 으윽, 대표님…….

    수화기 너머에서 다 죽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선준?”

    나는 선준의 이름을 다급하게 외쳤다.

    - 도와주세요……. 대표님……. 저 좀……. 살려 주…….

    “문선준! 너 지금 대체 어디야?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었다.

    관자놀이에서도 맥박이 뛰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설마 강재만 이 자식이 문선준을 건드렸나?

    아니면 선준이에게 다른 다급한 일이 생긴 걸까?

    머릿속에서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문선준! 무슨 일이냐고!”

    휴대전화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회하는 길 없을까요?”

    운전대를 잡은 남자에게 울먹이며 물었을 때였다.

    - 으흐흐흐흐흐흐.

    흐느낌이 이상한 웃음소리로 변질되고 있었다.

    아, 이 새끼가 진짜!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욕을 짓씹어 삼켰다.

    재벌가 맏딸로 태어나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나는 쌍시옷과 친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하마터면 나는 남자 친구 앞에서 거한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이, X발 새끼야!

    혓바닥 위에서만 쌍욕이 난무하는 가운데, 선준이 수화기 너머에서 지껄였다.

    - 나 돌아오는 수요일에 수능 봐요. 살려 주세요. 죽을 것 같아요.

    수능을 두 번 봐야 한다는 선준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 도와주세요, 대표님. 대표님 빽으로 나 그냥 정웅에 취직시켜 주면 안 되나요? 학벌 제한, 폐지하라! 폐지하라!

    미친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화를 돋웠다.

    “야, 문선준.”

    나는 어금니를 꽉 문 채로 선준의 이름을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 이왕 취업시켜 주는 김에 대표님이 빽 좀 써서 나 군대도 좀 어떻게 해 주고요. 네? 군대를 어떻게 또 가요? 난 절대 못 가. 안 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났으면, 국방의 의무를 다 해야지, 선준아. 그리고 수능도 봐야지. 너 이제껏 공부한 거 안 아까워?”

    - 그럼, 나 혼자 가기 억울하니까. 나랑 동반 입대해 줘요. 왜 나만 군대가? 나랑 같이 가요! 수능도 같이 봐! 억울해!

    나는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휴대전화에서 귀를 뗐다.

    그러자 그가 오른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고는 휴대전화를 달라는 시늉을 했다.

    내가 선준을 달래는 소리를 들은 탓인지 그는 통화 내용을 대충 짐작한 눈치였다.

    아마도 철없는 고3 사촌 동생이 어리광을 부리려고 전화했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

    “기다려 봐. 누구 좀 바꿔 줄게.”

    - 누구요? 누구? 왜! 어딜 도망가! 누굴 바꿔 주려고!

    선준이 있는 힘껏 소리치는 중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사촌 동생 선준 군? 우리 그때 집 앞에서 인사했죠?”

    그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질문을 건네며 나를 흘끗 보았다.

    멋있어! 믿음직한 어른 남자의 모습! 방황하는 10대 청소년에게 귀 기울이는 바람직한 어른상!

    “그래요. 수능이 며칠 안 남았지? 응, 알아요. 힘든 거 알지. 수능으로 인생 전체가 결정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하루아침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 같아서 억울하기도 하지.”

    선준이 뭐라고 하는 건지, 그는 적당한 반응을 보이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

    “아, 수능 끝나고 술을 사 달라고요? 수능 끝나도 미성년이지? 술 말고 맛있는 밥 사 줄게. 누나랑 같이 약속 잡아요. 응?”

    선준의 나이 열아홉, 그의 나이 서른둘, 무려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 사이였다.

    그리고 상대인 선준은 나의 사촌 동생이니 아랫사람이 맞는데도, 그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말을 높였다.

    그 모습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나는 눈동자 위에 하트를 뿅뿅 띄운 채로 그를 응시했다.

    “그래요. 끊을게요. 끝까지 마무리 잘하고. 건강 관리, 스트레스 관리도 잘 하고요.”

    그가 통화를 끝냈다며 나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선준이 되게 예쁨받고 컸나 봐? 응석을 많이 부리네.”

    “뭐, 그렇죠.”

    제 입으로 있는 집에서 귀하게 자란 놈이라는 말을 하는 녀석이었다.

    아직 인생 고난 패치가 달리지 않은 덕에 싸가지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응석을 받아 주는 사람이 사촌 누나뿐이야?”

    “집에서 약간 포기한 것 같아요.”

    미안하다, 선준아. 변명거리가 이것밖에 없어.

    “나한테 군대 갈 때 동반 입대하재요.”

    “미쳤나? 남의 여자 친구를 어딜 데려가.”

    그가 내 손을 끌어다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그쵸? 걔 만나면 혼내 줘요! 어디 감히 나한테 군대에 같이 가재? 나 대신 서후 씨가 선준이랑 같이 군대 다시 갔다 올래요?”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다.

    “정담은.”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여자가 하는 말이라고 해도, 군대 다시 가라는 말은 용납 못 해.”

    그는 ‘군대 다시 가라는 말은 용납 못 한다’는 내용에 무게를 실은 듯했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여자’라는 말에 홀려 버렸다.

    “어떤 여자요?”

    “못 들었으면 됐어. 두 번은 말 안 해.”

    근엄하게 미간을 모으며 센 척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을 흘린 순간이었다.

    휴대전화가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메시지 수신음이었다.

    [그 남자 찾았음. 수능 끝나고 만나러 갈 예정. 같이 갈 거임?]

    괴담 속 남자를 찾았다는 선준의 메시지였다.

    아무래도 용건은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에 만날 때 우리의 코난 문선준 선생님께서 마취 침이 달린 빨간 보우 타이를 매고 나오는 것은 아닐지,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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