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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28화

    지난 삶에서 나는 평생의 반려로 삼았던 남자에 의해 처참하게 죽었다.

    그러니 사랑을 나눌 때 느껴지는 아픔쯤이야,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서 단단한 목선과 다부진 어깨를 쓸어보았다.

    “후우.”

    그가 더운 숨을 몰아쉬고는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내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침대에 몸을 눕힌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가운을 천천히 벗었다.

    가슴이 들썩거리도록 숨이 가빠 왔다.

    순간 내 얼굴을 향해 있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

    오르내리는 몸을 내려다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짙게 가라앉았다.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서로에게 깊숙이 빠져들기 직전의 숨 막히는 분위기.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빨리 그가 들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가운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흉근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복근이 경련하듯 움직였다.

    “머릿속에 더러운 거로 가득했던 공주님 감상은?”

    나는 다리를 슬쩍 들어서 그의 허리 근처에 갖다 붙였다.

    “보고만 있기는 아깝네요.”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부끄럼을 타고 있다고 해도 가만히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여유는 그만 부리면 좋겠는데.”

    “지금 내가, 여유 부리는 거로 보여?”

    한쪽 눈썹을 치뜬 그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보기만 해요?”

    그의 목소리가 연기와 같이 탁하다면, 내 목소리는 노을빛에 달아오른 구름처럼 몽글몽글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뻐서 제어가 안 될까봐 걱정하는 중이야. 나도 처음이니까.”

    처음이라는 말이 이토록 감동적인 순간이 또 있을까.

    나는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듯 목덜미를 안았다.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올리자, 손바닥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내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목 안쪽에 그의 호흡이 먼저 닿았다.

    귓불을 살짝 혀로 핥는 감각에 목덜미를 타고 전율이 흐른 순간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옆구리를 타고 천천히 올라왔다. 살결을 가늠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파르르 떨렸다.

    허리춤에 걸려 있던 실크 슬립을 움켜쥔 그는 가슴 위로 더운 숨결을 흘리며 옷자락을 끌어 내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 마주 누워 있을 뿐인데도 머릿속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못 견디겠으면 이야기 해. 아픈데 참지 말고. 응?”

    그가 소담하게 솟아오른 살결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으응.”

    나는 절대로 그에게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입술에 키스하는 것처럼 그는 살갗 위에 입을 맞췄다.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 때마다 따끔한 전율이 일었다.

    “하아.”

    나는 연신 그의 뒷머리를 쓸어올리고,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을 때, 손등에 그의 귓불이 닿았다.

    엄지와 검지로 그의 귓불을 잡고 작은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후우.”

    작은 손짓에 자극이 심한 듯 그가 열띤 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살짝 치켜든 그의 뺨이 아까보다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불쑥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요?”

    침대에 무방비한 상태로 흐트러져 있는 나를 보며, 그가 테이블 위에서 네모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지난주 그의 집 거실에서 압수당했던 물품이었다.

    상자를 우그러뜨리듯 비닐 포장을 뜯은 그가 안에서 내용물을 하나 꺼냈다.

    치아를 세워서 포일 포장을 뜯어 발기는 그의 모습을 나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제 못 물러.”

    “알아요.”

    그는 가늠하듯 내 몸을 더듬었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손이 닿은 적 없는 곳이었다.

    “준비는 된 것 같네.”

    아까부터 나는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그가 몸을 숙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흐읏.”

    아직 준비가 덜 된 거였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통증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어때?”

    “으응.”

    나는 괜찮다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한숨을 몰아쉬며 내가 안쓰럽다는 듯이 웃었다.

    찡그린 미간을 그가 도톰한 입술로 부드럽게 내리눌렀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어.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이래 봬도 나 죽어 본 적도 있는 사람이라고요!

    속으로 센 척한 게 무색하리만큼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픔이었다.

    눈초리를 타고 눈물이 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혀로 눈물을 핥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흐으으. 아아!”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렇게 야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인간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독한 고통만 있는 게 아니었다.

    미묘하게 자라나는 쾌락이 호기심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더듬거렸다. 어딘가로 추락할 것도 아닌데, 절박하게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꿈틀거리는 등 근육은 미끄러운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나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가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아, 서후 씨.”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한껏 격앙되었다.

    “힘들어?”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미칠 것 같아. 세게 쥐면 부서질까 봐…….”

    매트리스와 등허리 사이로 그의 팔이 들어왔다.

    “괜찮아요. 흐읏. 안 부서져.”

    신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가 웃었다.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르니까 하는 소리야.”

    등허리를 더듬거리던 손을 움직여 그의 얼굴을 붙들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의 혀가 목 안 깊숙한 곳까지 밀려들어 왔다.

    가장 예민한 살점을 툭툭 건드릴 때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안으로 신음이 빨려들어 갔다.

    눈이 질끈 감기고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감각이 이어졌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입술이 닿았던 적 없던 곳에서 관능이 피어났다.

    깊숙이 맞닿아 있는데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무지함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축축하게 젖은 열기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더, 안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움직임을 따라서 말이 툭툭 끊겼다.

    “나도. 나도 죽을 것 같다.”

    그의 두툼한 몸이 내 위로 허물어졌다.

    기분 좋은 무게감에 숨이 턱 막혀왔다.

    “흐읏, 아아!”

    내가 정말이지 소중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따뜻한 손길이 이어졌다.

    그의 몸짓은 짜릿하고 관능적이면서도 동시에 다정하다고 느껴졌다.

    통증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조차도 달가웠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피어올랐다.

    발가락 끝이 말려들어 가고, 눈이 질끈 감겼다.

    숨을 들이쉬는 법도 내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관능과 뒤섞인 앓는 소리조차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어딘가로 내몰린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으음.”

    그가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나를 으스러뜨릴 듯이 안았다.

    그런데도 그의 몸짓에서는 절제력이 느껴졌다.

    욕정조차도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절감케 했다.

    단순히 몸을 탐하는 행위가 아니라, 진짜 사랑을 나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그가 내 뺨 위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며 조용히 읊조렸다.

    “괜찮아?”

    가쁜 숨결이 섞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좋아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조금 더 빠르고 부드럽게 나를 맴돌았다.

    밤하늘에 총총 박혀 있던 별이 침대 위에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아까웠다.

    그와 오롯이 함께하는 지금의 모든 것을 내 안에 간직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 역시 나를 허물어뜨릴 것처럼 단단히 안았다.

    환희라는 말로 부족할 만큼 따뜻하고 다정한 매혹이었다.

    새벽녘 지독한 갈증에 눈을 떴다.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어루만지다가 잠이 들었었다.

    그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로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왼팔은 내 목을 받치고 있었고, 오른팔은 허리에 감겨 있었다.

    물이 너무 마시고 싶었다. 화장실도 가야 했다.

    그런데 팔을 들어 올리면 그를 깨울까 걱정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가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왜, 안 자고.”

    “나 안 자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간지럽게 꼼지락거려서.”

    편찮은 할머니를 모시는 탓인지 그는 잠귀가 밝은 듯했다.

    “목이 말라서요. 화장실도 가고 싶고.”

    그가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내가 가도 되는데.”

    “힘들 것 같아서.”

    그는 나를 화장실 앞에 얌전히 내려 주었다.

    그의 말마따나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그가 미지근한 물이 담긴 물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물 한 컵을 다 비우고 나자, 그가 나를 다시 안아들고는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숟가락을 포개듯 나를 뒤에서 안고 누운 그의 손이 옆구리를 타고 올랐다.

    “왜요? 잠이 안 와요?”

    “응, 누가 깨워서.”

    한번 맛본 즐거움은 꽤 인상적이었다.

    “그럼 자지 말까요?”

    “너 힘들어서 안 돼. 그냥 만지기만 할 거야.”

    “나 그렇게 약하지 않은데…….”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이 젖혀졌다.

    그가 새벽빛에 가라앉은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붙들고 부드럽게 끌어 내렸다. 입술이 맞물렸다.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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