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27화

눈앞에 있는데도, 그리워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을…… 그도 느끼는 걸까?

나는 쪼르르 달려가서 그의 무릎에 살포시 엉덩이를 안착했다.

그가 미리 열어 둔 와인을 오로라 빛으로 반짝거리는 잔에 따랐다.

11월의 선선한 바람에 그윽한 와인 향이 실렸다.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유리 상자 안에서는 에탄올 난로의 불꽃이 붉고 푸른 빛으로 멋스럽게 일렁거렸다.

턱을 살짝 들어 올리자, 까만 하늘에는 하얀 별들이 총총 박혀 있었다.

어둠이 내린 탓에 바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파도 소리는 분명하게 들렸다.

그의 어깨에 옆머리를 살짝 기대자 숲 냄새가 짙어졌다.

“이제 먹을까?”

그가 와인 잔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와인 잔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그의 품에 안겨서 마시는 와인은 로마네 콩티 못지않게 근사한 풍미를 선사했다.

“으음, 맛있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안으로 잘 익은 고기 한 점이 들어왔다.

그는 감탄하느라 벌어진 내 입 안으로 고기를 밀어 넣고는 흡족하게 웃었다.

“맛있어?”

그가 먹여 준 고기는 입안에서 녹아 없어진 듯했다.

“와! 씹지도 않았는데, 없어졌어요!”

감탄했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자, 그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나무랐다.

“씹고 삼켜. 배고프다고 그냥 막 삼키지 말고.”

누굴 돼지 취급하십니까?

뾰로통한 눈빛으로 쏘아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웃으며 내 입안에 고기를 넣어 주었다.

나도 포크를 집어 들고는 그에게 고기를 한 점 먹였다.

그가 엄지로 입가를 섹시하게 닦고는 깨끗한 입술로 내 목덜미에 촉,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입안에서는 잘 구워진 꽃등심이 사라지고 있었고, 그의 품 안에서는 잘 달궈진 내가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몸이 비비 꼬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있어. 정신 사나워.”

나도 모르게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는지, 두꺼운 팔이 내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가 길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내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와인 잔 입구로 내 아랫입술을 살짝 내리누른 그가 한쪽 눈썹을 관능적으로 치켜올렸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입을 벌렸다.

혀끝에서 와인 맛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목구멍으로 찌르르한 적색 액체가 넘어갔다.

이보다 더 관능적인 와인이 있을까?

나는 그가 먹여 주는 대로 와인을 삼키고, 고기를 먹으며 배를 불렸다.

그 역시 내가 씹거나, 삼키는 틈을 타 배를 채웠다.

어느새 와인 한 병과 음식이 전부 동났다.

“이제 들어갈까?”

그가 내 목덜미에 콧잔등을 비비며 물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녹아내릴 듯이 가슴속이 뜨거웠다.

와인 때문에 적당히 취기가 오른 탓이라고 하기엔 그 온도가 지나치게 격렬했다.

“응, 들어가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내 몸을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걸어갈 수 있는데.”

민망해서 조용히 읊조렸지만, 그는 대답을 해 줄 생각이 없는지 짙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아니면 이 남자도 말을 내뱉지 못할 정도로 떨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의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팔을 끼워 넣으며 등허리를 끌어안고는 단단한 가슴에 옆얼굴을 대보았다.

그의 굳건한 성품을 무너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심장이 맹렬한 속도로 뛰어 대고 있었다.

“먼저 씻을래?”

그의 물음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러다 욕실에서 졸도해 버리면 어쩌나?

나는 파우치 안에 미리 준비해 둔 슬립과 속옷을 싸들고는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신을 비추는 물결 모양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꼭 분홍색 액체 덩어리 같았다.

사랑을 듬뿍 받아서 가장 예쁜 색으로 빛나는 생명체처럼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녹아서 사라질 것처럼 흐물흐물한 상태였다.

“와, 미쳤나 봐.”

너무 떨려서 턱이 덜덜거릴 정도였다.

나는 평소와 같은 속도로 샤워를 마치려고 무진장 애를 써야만 했다.

구석구석 열심히 닦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시간을 오래 끌면 안 되니까.

샤워를 마친 후,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나왔을 때, 그는 테라스 밖을 막 정리하고 들어온 참이었다.

“저 다 씻었어요.”

이제 욕실을 써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어리숙한 말이 흘러나왔다.

맛있는 불 냄새를 가득 머금은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열기를 품은 숲과 같은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는 게 어려울 만큼 섹시했다.

바닷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은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스웻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탓에 푸른 힘줄이 돋아난 건장한 팔뚝이 도드라졌다.

“알아. 다 씻은 거.”

그가 웃으며 대꾸하고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들었다.

“나도 얼른 씻고 나올게.”

그의 차가운 입술이 뺨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키스는 입술이 마르고 닳도록 나눈 사이였다.

그런데도 가벼운 뺨 키스 한 번에 뒷무릎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하얀색 가죽 소파 위로 엎어졌다.

“와, 미쳤다. 진짜.”

심장이 어쩜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커플 전용 풀 빌라 욕실의 방음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일부러 이렇게 설계한 걸까?

밖에 있는 사람 몸 달아 죽으라고?

그도 밖에서 내 샤워 소리를 듣다가 못 견디고 테라스 밖으로 나간 걸까?

나는 소파 위에 엎어지듯 몸을 기대고는 욕실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써댔다.

내가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인간이었나?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그의 몸 어디에 안착해서 어떤 모양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을까?

자꾸만 그 모습이 상상되어서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벌컥거렸다.

이러다 그가 욕실 밖으로 나오기 전에 심장 마비로 죽거나, 혹은 말라죽을지도 모르겠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정신을 차려 보자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을 때였다.

욕실 문고리가 철컥,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샤워 가운을 입은 채로 욕실 밖으로 나왔다.

물론 나도 민소매 슬립 위에 샤워 가운을 입은 채였다.

똑같은 보디 제품 냄새를 풍기며, 똑같은 샤워 가운을 입은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우리 꼭 신혼부부 같지 않아요?

차마 그 질문은 던지지 못하고,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가 젖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털어 대며 다가왔다.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처럼,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어 댔다.

“머리, 덜 말랐네요.”

그의 눈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응, 너도.”

샤워하고 난 뒤에 더욱 붉어진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

나는 그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끝내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깊이 맞물렸다.

어느새 서로의 키스에 익숙해진 사이였지만, 할 때마다 새로운 감각이 깨어났다.

윗입술을 살짝 머금었다가, 아랫입술을 빨아들인 그가 입술을 맞댄 채로 잠시 숨을 골랐다.

“숨이 막힐 것 같네. 너도 그래?”

그가 가쁜 숨을 고르며 물었다.

“나도 그래요.”

나는 다급하게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붙였다.

허리에 두꺼운 팔뚝이 휘감겼다.

그가 천천히 걸으며 나를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그의 뜻에 순순히 따르며 뒷걸음질 쳤다.

다리에 침대 모서리가 닿은 순간, 그가 내 몸을 살며시 안아 올려서 침대 위에 눕혔다.

아기도 아닌데, 누군가 나를 안아서 침대에 눕혀 주는 느낌은 몹시 묘했다.

그가 맞붙어 있던 입술을 떼고는 짙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쇄골과 쇄골 사이로 똑 떨어졌다.

“하아.”

단지 물방울 하나가 살갗 위에 닿았을 뿐인데, 나는 참지 못하고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물방울이 흘러내린 자리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는 물방울의 움직임이 이러했을 거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입술을 살갗 위에서 미끄러뜨렸다.

“으음.”

가운 깃이 옆으로 슬며시 젖혀졌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손등으로 입가를 살짝 가렸다.

온몸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빨리 그에게 안기고 싶으면서도 모든 것을 보여줄 생각을 하니 수줍어졌다.

“너무 예뻐.”

가운이 천천히 벗겨졌다.

흰색 민소매 실크 슬립 끈도 매끄러운 어깨를 타고 끌려 내려갔다.

“하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가 어떤 상상을 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더 엄청나네.”

목선부터 허리까지 그의 눈동자가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저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 있을 뿐인데, 신음이 흘러나올 것처럼 몸이 홧홧했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계속, 보기만 할 거예요?”

안달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

커다란 손이 움켜쥐고, 어루만질 감각을 떠올리는 동안 타는 듯한 갈증이 전신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담은아.”

그가 연기처럼 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으응.”

그는 내 머리 옆을 두 팔로 짚은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매끄러운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내가, 널 아프게 할 수도 있어.”

조용한 경고에 숨이 멎는 듯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