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25화
“사촌 동생이랑은 약속 잡았어?”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맞다. 수능 끝나면 한번 보자고 했었지.
“아직 못 했어요. 아직 수능도 안 끝났잖아요.”
언젠가 선준이 내 사촌 동생이 아니라고 밝혀야 하는데…….
아까 방지희를 보고 친척 동생이라고 했던 강재만의 뻔뻔스러움이 떠올라서 기분이 묘해진다.
아냐! 이건 경우가 다르지!
내가 문선준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도 아니고! 우리는 전쟁 같은 삶을 함께한 전우나 다름없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에 두 사람이 만날 자리가 마련되면, 그때 솔직히 털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촌 동생이 아니라는 것까지만, 전쟁을 함께한 전우라는 말은 빼고.
“이번 주말엔 진짜 소풍 가자.”
그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말을 이었다.
“요양 보호사님께서 미안했다고……. 이번 주에는 주말 내내 할머니 돌봐주신다고 하셨어.”
“주말 내내요?”
되묻고 나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주말 내내라는 의미는 토요일, 일요일 내내?
그러니까 소풍이 1박 2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건가?
“응, 토요일하고 일요일 내내.”
그의 조용한 대답에 나는 홀린 듯이 받아쳤다.
“그럼 숙소부터 예약해야겠어요.”
비장하게 내뱉은 말에 그가 의문을 표했다.
“응? 숙소는 왜?”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맞부딪힌 순간, 깨달았다.
그는 토요일과 일요일, 따로따로 만날 수 있다고 말한 거였다.
나는 대체 민서후 앞에서는 왜 이렇게 앞서가는 것일까?
“우리 담은이 또 머릿속이 더러워졌나 보네.”
“제 머리 완전 깨끗하거든요!”
민망해진 나머지 조금 큰 소리로 대꾸하고 말았다.
그가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참느라 눈을 딴 데로 돌렸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두 분 어떻게 같이 오세요?”
출근 시간, 한 회사 사람이 회사 로비를 걷고 있을 뿐인데, 음흉한 유수아는 그걸 콕 집어서 인사를 건넸다.
“어, 유 대리. 좋은 아침.”
그는 웃음을 참다 말고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 수아 대리. 본부장님하고는 이 앞에서 만났어.”
“아, 그렇구나. 하필 두 사람이 이 앞에서 만났구나.”
수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게만 들리게 귓속말을 해 댔다.
만원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수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러다 이번 생에서는 유수아 눈총에 맞아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내린 사람들이 각자의 사무실로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민서후도 나와 수아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PC를 켜 놓고 커피를 내리기 위해 탕비실로 향하려는데, 수아가 잽싸게 따라붙었다.
“이 앞에서 만나셨어요?”
“진짜야.”
“사내 연애 하는 것들이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이 뭔지 알아?”
나는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탕비실로 들어갔다.
좁은 탕비실에 굳이 따라 들어온 수아가 순둥순둥한 표정을 흉내 내며 과장된 어조로 지껄였다.
“우리 이 앞에서 만났어요! 같이 온 거 절대 아니에요!”
“진짜야! 이 앞에서 만났다고! 너 오늘 왜 그래?”
오늘따라 유수아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과한 흥분을 좀 가라앉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다소 미친년처럼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이 앞에서 현욱 씨랑 헤어졌거든.”
“뭐? 현욱 씨랑 헤어졌어?”
사귄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벌써 헤어졌다는 뜻인가……. 했다.
“으흐흐흐흐흐.”
수아가 음흉하게 웃어 댔다.
그러니까 저 말은 내내 같이 있다가 이 앞에서 헤어졌다는 뜻이구나! 누가 볼까 봐?
“대박!”
“현욱 씨 집에 컨디셔너가 다 떨어졌다고 해서 샴푸만 했더니, 머리가 부스스하네. 꼭 미친년 산발한 것처럼. 으흐흐흐흐.”
너 지금 머리카락이 문제가 아니야. 그냥 미친년 같아,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유수아, 너 점심때 다 말해 주기다. 꼭!”
살다 살다 내가 남의 연애사를 궁금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 앞에서 나는 생전 처음 맛보는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예를 들면 유수아의 염병 천병 연애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그날 점심, 수아는 해장이 필요하다며 시카코 치즈 피자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교환 학생 시절 치즈 피자로 해장을 한 이후로 수아는 과음한 다음날 꼭 시카고 피자를 먹는다고.
“그래서 어제 술김에?”
“아니, 그럴 리가. 술에 취한 척. 뭐, 그런 거지.”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그게 돼?”
수아는 쭉 늘어진 피자 치즈를 호로록 삼키고는 대답했다.
“이제 사귀는 거지, 뭐.”
나는 제법 성인다운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합이 잘 맞았나 보네?”
그러자 수아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공주님, 그런 말 하는 거, 되게 안 어울리는 거 알아요?”
“야! 너 공주라고 부르지 말랬지!”
“우리 공주님, 화내도 귀여운 거 알아요?”
약간 정신이 나간 듯한 수아가 깐족거리며 웃었다.
“공주님은 아까 왜 머릿속이 깨끗하다고 소리 질렀어요? 왕자님이 뭐라고 했으면?”
키득거리는 수아를 보고 나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 아까 네 얼굴 터지는 줄 알았어. 너무 빨개서! 본부장님이 뭐라고 했는데, 어?”
나는 망설이다가 입술을 짓씹으며 조용히 우물거리듯 말했다.
“내가 너무 순진해 보여서, 자기가 더럽히는 느낌이 든다잖아. 그래서 나도 야한 생각 한다고, 내 머릿속 더럽다고 그런 적 있는데……. 그 후로 자꾸 놀려서.”
수아가 입에 물고 있던 콜라를 뿜어 댔다.
“너야말로 진짜 대박이다. 미치겠다, 정담은.”
급기야 수아가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 댔다.
“애가 순진한 거야, 발칙한 거야? 근데 하나는 분명하다!”
“뭐가 분명해?”
“사랑스럽다는 거? 으으! 귀여워!”
썸 타던 남자와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고 출근한 수아 눈에는 지금 세상 모든 게 귀엽고 아름다워 보이나 보다.
그게 그렇게 좋았니?
나는 속절없이 머릿속으로 민서후와 내가 음란하게 뒤엉킨 모습을 그려 보기 시작했다.
수아가 피클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물었다.
“무슨 생각해?”
“그냥, 뭐.”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공주는 아무 데서나 더러운 생각하고 그러지 마요. 지금 눈이 몽롱해. 너 그런 생각하는 거 다 티 난다, 야.”
“아니거든!”
“맞거든! 아무것도 모르던 순둥이가 연애 시작하고 나서 시도 때도 없이 몽롱해지는 것 같거든? 너 전에는 안 이랬어.”
“그랬나.”
하긴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 나는 수녀나 비구니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정숙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지금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야한 민서후 때문에 날이 갈수록 음란해지고 있지만.
우리는 피자를 먹으며 또다시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어 댔다.
오늘부터 SPA브랜드가 세일을 시작했다는 말에 나는 덩달아 수아를 따라 웹사이트를 구경하다가 철 지난 비키니 수영복을 한 벌 충동 구매했다.
“뭐야, 웬 비키니?”
“너무 싸서.”
“겨울에 따뜻한 나라로 여행 가게? 누구라앙?”
수아의 음흉한 질문에 나는 앞서 나가지 좀 말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서로가 가진 재산을 가늠하고, 얼마만큼의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관계인지 계산하지 않는 사이.
서로의 자산 목록이나 투자 대상, 사업 목적과 방향성보다, 연애할 때 뭘 하고 노는지가 더 궁금한 사이.
서로 이용하고 버릴 시기를 고민하느라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되는 사이.
그런 사이, 수아는 나에게 처음 생긴 친구였다.
“수아야.”
“응?”
“고마워.”
“갑자기?”
수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웃었다.
점심을 먹고 복귀한 사무실에는 식후의 나른한 기운이 부유하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자마자, 메시지가 들어온다.
[점심 맛있게 먹었어? 뭐 먹었어?]
내가 요즘 점심으로 뭘 먹는지까지 궁금해하는 민서후였다.
[시카고 치즈 피자요. 수아가 피자로 해장을 한다고 해서. 본부장님은요?]
[나는 황태 콩나물 해장국. 김 과장이 과음했다고 해서. 여기 어때?]
메시지 뒤에 링크가 하나 따라붙었다.
클릭해 보니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 있는 풀 빌라 리조트였다. 날씨가 추워지기는 했지만, 단독 수영장을 온수로 이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좋아 보이네요.]
[주말에 여기 갈까?]
[당일치기로 가기엔 너무 멀지 않아요? 왔다 갔다, 도로에서 버리는 시간이 더 많겠다.]
나는 가끔 눈치가 없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나는 자고 올 건데.]
그가 보낸 메시지에 나는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영복 준비할게요.]
나는 낮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그의 집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세상 심각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것처럼 PC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영할 시간이 있을까?]
[근처에 다른 일정 잡을 거예요?]
아, 또 눈치 없이 군건가?
[밖에 못 나가게 할 건데.]
갑자기 열기가 확 치솟아서 나는 한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이번 주말 안에 비키니가 와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