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24화
퍼즐이니, 가족의 완성이니 떠들 때마다 아버지는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나는 아버지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에만 열중했다.
일단 여기서는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강재만에게 말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로 출근하는데, 재만이가 우리 담은이랑 같이 가면 되겠네.”
재만이? 언제 저렇게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셨을까?
누가 보면 저쪽이 아버지 아들이고, 나는 남의 딸인 줄 알겠다.
“저에게 함께 출근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하마터면 나는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동화 속 왕자님이 할 법한 말을 강재만이 뻔뻔하게 내뱉었다.
저건 동화 속 왕자가 와서 지껄인다고 해도 못 봐 주겠다.
아니지, 우리 민서후가 저런 말을 했다면 나는 출근길이 아니라 저승길도 따라나섰을 것이다!
“영광까지야.”
나는 고저 없이 대답하고는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며 침실로 올라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구 실장도 내 뒤를 따랐다.
“어떡하려고 그래요? 출근 같이해서 회사에 소문이라도 나면…….”
“회사 도착하기 전에 저 사람 차에서 내릴 거예요. 회사 앞까지 갈 생각은 없어요.”
“처음이 어려운 법입니다. 오늘 이렇게 허락하시면, 다음에는…….”
나는 침실과 이어진 드레스룸으로 향하다 말고 구 실장을 바라보았다.
“다음이 과연 있을까요?”
나의 호기로운 질문에 구 실장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구겼다.
“모쪼록 조심하세요. 아시겠죠? 제가 따로 알아보니, 저분 만나는 여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회장님이 모르시는 걸까요?”
나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모르실 리가요. 신기술 가지고 있는 건실한 중소기업 꿀꺽하실 생각에 모른 척하시는 거죠.”
그게 사기인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경영인으로서 피해야 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성공으로 만들어진 아집,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과욕, 탐욕에 눈이 어두워 소중한 것을 보듬지 못하는 어리석음,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주변인까지.
아버지는 독단적인 가부장의 표본임과 동시에 하루빨리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무능한 경영자의 모습을 두루 보여 주었다.
1층으로 내려가자, 아버지는 먼저 집을 나서고 없었다.
“담은 씨, 제 차가 외부 방문자용 주차장에 있어서 조금 불편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집안사람들을 의식한 탓인지, 뱀 같은 눈길을 숨기고 유순하게 구는 강재만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네, 가시죠.”
저택 안에 자리한다고는 하나, 일회성 방문자용 주차장은 현관에서 꽤 멀었다.
이 집 안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주차장에서부터 등급이 매겨졌다.
정 회장 및 그의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저택 지하의 실내 주차장으로 안내되었고, 그 외에는 등급에 따라 외부 주차장을 이용했다.
그중에서도 강재만이 차를 대놓은 곳은 정 회장 눈 밖에 난 사람들이나 이용하는 불편한 자리였다.
“차를 왜 여기 대셨어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글쎄요. 제가 아직 회장님 마음에 덜 들었나 봅니다.”
강재만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더는 승강이를 하고 싶지 않아서 차에 올랐다.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아니, 사실 밀폐된 공간에 있다가 내 손으로 강재만을 죽이게 될까 봐 두렵다는 말이 맞다.
“오늘 함께 출근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지 영광입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불같이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직설적이시네요.”
“제가 더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네요.”
위선을 떠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결혼하자마자 돌변할 거면서.
“저랑 왜 결혼이 하고 싶으세요?”
이유야 뻔히 알았지만, 그의 진심이 궁금하다는 듯이 순한 어조로 물었다.
“강재만 과장님이라면, 좋다는 여자 많을 것 같은데요.”
마치 강재만이 대단한 인기라도 얻고 있는 것처럼 추켜세워 주었다.
물론 순진한 눈으로 그를 우러러 보듯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요? 아니에요. 여자는 무슨.”
그는 뭔가 켕기는 게 있는지 잠시 어색하게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저에 관해 사내에 안 좋은 소문이 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배경을 숨기고 입사했다고는 하지만, 백헌전자 아들인 걸 아는 사람이 좀 있거든요.”
“아아.”
그러니까 있는 집 아들이어서 받는 오해다?
“그렇잖아요. 사람들은 좀 있는 집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어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인한 피해라는 듯 강재만이 약한 소리를 해 댔다. 나도 그런 오해를 받지 않느냐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눈치이기도 했다.
“저는요. 정말 경영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냥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었을 뿐인데요.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담은 씨.”
미친놈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린다.
“아…….”
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내숭을 떨어 댔다.
“결혼하면 회사는 옮길 생각입니다.”
“어디로요?”
“아무래도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장인어른이 회장님으로 계신 곳보다야, 아버지가 대표로 계신 곳이 제 마음이 편하니까요.”
“백헌전자 물려받으실 생각이세요?”
강재만은 백헌으로 돌아가서 물밑작업에 열을 올렸다.
백헌이 정웅그룹에 인수당하는 척하면서, 역으로 정웅의 대표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악랄했고 비열했다.
“아니요. 그럴 생각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 남편에게 경영을 맡기실 거라고 공공연하게 말씀하고 다니셨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슬쩍 운을 띄우자, 강재만의 눈이 뱀처럼 희번덕였다.
“만약 회장님 뜻이 그렇다면……. 제 의지를 굽히고 따라야겠죠. 어른이 하시는 말씀인데요.”
말은 정말이지 청산유수다.
“근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만약 결혼하면 한국 뜰 거거든요. 캘리포니아 변두리에 있는 작은 포도 농장 하나 사서 포도주나 만들면서 살려고요. 농사, 어때요?”
“네? 그래도 담은 씨. 어떻게 한국에 계신 가족 뜻을 거스르고 그런 결정을…….”
“아버지의 뜻은 그렇지만, 제 결혼이잖아요. 한 번뿐인 인생이고요. 우리가 인생 두 번 사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요?”
나는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기민하게 살폈다.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어른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 두 번’이라는 말에 강재만은 걸려들지 않았다.
부부로 살을 섞지는 않았지만, 나는 누구보다 강재만에 관해 잘 알았다.
당황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목소리가 어떻게 떨리는지, 어조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도, 모조리 기억했다.
결론은 너무 쉽게 내려졌다.
강재만은 이번 생이 처음이다.
만약 강재만도 두 번째 삶이라고 치자. 그런데 내가 결혼을 거부한다면? 아둔한 놈은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며 거만하게 굴었을 것이다.
어차피 남편은 강재만이다! 이런 환상에 사로잡혀서 제멋대로 굴 위인이었다.
그런데 강재만은 이번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저 앞에서 세워 주세요. 회사까지는 택시로 갈게요.”
“여기서요?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회사 경영에 관심도 없고, 저랑 농사지을 생각도 없는 분이 괜한 스캔들에 휘말리면 곤란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얼른 세워 주세요. 얼른요!”
나는 재벌 집에서 막무가내로 자란 천방지축처럼 그를 채근했다.
“아! 네, 네!”
그가 차를 세우려는 순간이었다. 차량 블루투스 시스템으로 연결된 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고, 센터페시아 화면에 발신인 이름이 떠올랐다.
[방지희♡]
내가 키운 아들을 낳은 여자의 이름이었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아! 친척 동생입니다. 제가 워낙 가족을 아껴서……. 가족 이름 뒤에는 꼭 하트를 붙이거든요.”
너는 그럼 중세 유럽 왕족이냐? 친척이랑 애를 낳게?
“아, 네.”
나는 영혼 없이 대꾸하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비상등 버튼을 누르려다가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지, 강재만 차에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오빠 어디야? 나 일어나기 전에 출근한 거야? 그렇게 빨리? 히잉.
그놈의 ‘오빠’ 소리 여기서 들으니 귀가 썩을 것 같다.
“그럼, 강재만 씨! 오늘 아침은 즐거웠어요. 살펴 가세요!”
나는 일부러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웃으며 말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 누구야? 오빠 누구랑 같이 있어? 지금 어딘데?
방지희 오빠, 강재만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 가고 있었다.
아, 한심한 정담은.
너는 저렇게 허술한 새끼한테 그런 몹쓸 짓을 당한 거냐?
나는 가까운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향했다.
출근길, 정웅그룹 사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그리고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정담은의 오빠, 민서후를.
나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빠르게 뛰었다.
“본부장님!”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그가 대번에 돌아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좋은 아침.”
아침 햇살이 그의 앞머리에 드리웠다. 그가 레몬 빛 햇살만큼이나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