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23화

    “급발진 할 생각하지 말고, 일단 좀 들어 봐.”

    이번 생, 내 특기가 급발진이라는 것을 문선준은 기막힌 통찰력으로 파악한 모양이다.

    “이거 내가 초등학교 때 보던 책이거든? 지금은 절판되어서 안 나와. 출판사도 망했고.”

    “그래서?”

    나는 시답잖은 소리를 하려거든 썩 꺼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가슴 앞에 팔짱을 꼈다.

    “그렇게 호전적으로만 나오지 말고, 좀 들어 보라고.”

    “너도 가, 족 같은 놈한테 살해당하면 나처럼 의심이 많아질 거다.”

    선준은 대단히 심각한 정보를 가진 듯이 내 으름장에도 호기로운 미소를 보였다.

    “자, 여기 봐 봐.”

    선준이 책 중간을 펼쳐 들었다.

    단층 주택 마루에 걸터앉은 남자의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족히 40년은 넘은 사진 같다.

    “이 남자 사연이 기구해, 우리처럼.”

    “우리처럼?”

    책에 실린 이야기인즉, 남자는 80세까지 살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40세로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근데 봐라? 이 남자가 한 말. 사람들은 전부 납작한 기계를 들고 다녔다. 그 기계로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전화 통화도 할 수 있으며, 언제든 물건을 주문할 수도 있다.”

    “이건 수십 년 전 공상 과학 영화에도 나올 법한 이야기 아냐?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이야기는 안 해?”

    “일부 외국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미 같은 기계로 물건을 배달하기도 한다! 이게 뭐겠어? 드론이잖아!”

    나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선준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선준아. 너 지금 초딩 때 보던 괴담 이야기에 취해서 이게 뭐 하는 짓이니?”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내자, 선준이 목덜미를 잡았다.

    “이 괴담 시리즈 인기 엄청 많았거든? 실화 베이스라고! 이 남자 이야기 끝까지 봐 봐!”

    궁금한 것도 같고, 궁금하지 않은 것도 같았다.

    “○○○ 씨는 자신이 41세부터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해,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고, 80세가 되던 해에 끝내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살인 중독이라 고백하며, 악한 영혼을 지옥으로 보낼 방법을 알고 싶다고 했다!”

    무척이나 괴담다운 전개였다.

    “그래서 살인을 저지를까 봐, 자기 자신을 지옥으로 보내길 바랐다는 거야?”

    “응, 그렇다는 거지. 수십 명의 무고한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제발 지옥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는 거야.”

    삐딱했던 고3 선준의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얘는 정말이지 이 괴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이 남자는 결국 어떻게 됐는데?”

    “찾아보려고.”

    “뭐 인마?”

    기가 막혀서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이 남자 80세에 죽었다고 했잖아. 근데 이 인터뷰가 진행된 게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이야. 이때 나이 40세였고.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

    “무슨 수로 찾으려고?”

    “우리 작은아빠가 경찰이잖아. 일단 범죄 기록부터 조회해 보려고.”

    “공권력 허투루 쓰지 마라. 그거 다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거야.”

    선준이 심각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만약 우리처럼 돌아오는 사람들이 더 있다면 어떡할래? 어쩌면 세상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삶을 사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라면? 전생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뜸을 들이는 모양새가 불안해 보인다.

    “우리 둘이 돌아왔는데……. 강재만은? 그 인간도 돌아왔을 확률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비교적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런 방법 정말 싫은데, 강재만을 한번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놈 역시 돌아온 건 아닌지, 그래서 더 포악한 짓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악은 더 빠르게 진화하는 법이거든.”

    선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이내 손사래를 쳐댔다.

    “아니다! 그러지 마! 강재만은 절대 상종도 하지 마. 그놈이 돌아왔으면 어떻게든 티를 냈을 거야.”

    과연 그럴까?

    유비무환, 비단 피임 도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싸움에 이길 수 있다는 말은 진리다.

    강재만을 무슨 수로 떠봐야 할까.

    ***

    기회는 아주 손쉽게 찾아왔다.

    부엌에 들어서려던 나는 어머니가 구 실장과 이야기 나누는 소리를 듣고는 그릇장 뒤로 몸을 숨겼다.

    “내일부터 일주일에 한 번, 아침마다 강재만 청년이 집에 올 겁니다. 와서 회장님하고 같이 운동도 하고, 바둑도 두고. 아침 식사도 우리랑 같이할 거고.”

    나는 기가 막혀서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사위도 아닌데, 강재만이 왜 우리 집에 들락거려?

    “구 실장. 구 실장이 우리 담은이를 딸처럼 아끼는 마음은 내가 알아. 하지만 어미인 나만큼 아끼겠어? 나는 우리 담은이 좋은 사람이랑 결혼시키고 싶어.”

    구 실장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우리 담은이한테는 귀띔해 주지 말아요. 미꾸라지처럼 담은이 빠져나가게 도와주지도 말고. 알겠어요?”

    어머니는 상냥한 어조로 구 실장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아, 구 실장님. 왜 당하고만 있어요? 고용노동부에 신고해 버려!

    나는 정의감에 불타올라서 두 주먹을 꽉 틀어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어머니는 별관 다실로 차를 가져다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별관으로 나가는 문으로 우아하게 사라졌다.

    나는 비장하게 얼굴을 굳힌 채, 부엌으로 들어섰고.

    “아, 담은 양…….”

    구 실장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내가 귀신도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귀신은 아닌데.

    “혹시 들었어요?”

    안쓰러운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아침은 피할 생각 없으니까.”

    강재만과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서 만나는 건 이만저만 짜증 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 발로 호랑이 굴에 걸어들어온다니, 덥석 물어뜯어 줘야지.

    구 실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우려의 기색이 고여 있었다.

    “저는 담은 양. 그때 말씀드렸다시피…….”

    어머니의 겁박으로 마음을 바꿨으려나 했는데, 강재만을 향한 구 실장의 판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알아요. 무슨 말씀하시는지요.”

    다행이라는 듯이 구 실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내 곁으로 한 발짝 다가와서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는 담은 양이 정말 행복하길 바란답니다. 사랑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셔야 해요. 죽고 못 살아서 결혼한 사람들도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는 게 바로 결혼이라는 겁니다. 마음에 없는 사람과 결혼하셔서, 속앓이하는 일은…….”

    나는 말을 잇지 못하는 구 실장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고마워요, 이모. 나한테 이런 말 해 주는 사람은 이모밖에 없어요.”

    첫 삶에서 강재만과 결혼할 당시, 나는 부모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딸이었다.

    그러니 구 실장이 이런 조언을 건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의지가 확고해지고 나니, 내 곁에 두어야 할 사람과 멀리해야 할 사람의 기준이 분명해진다.

    나의 행복을 바라며 진심을 축원하는 이들, 자신들의 이득을 계산하며 나를 방편으로 이용하는 이들.

    그걸 구분 지을 수 있는 선이 생긴 것만으로 나는 지난 삶과 죽음의 보상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마치 계획에도 없던 일이 생긴 것처럼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어머, 세상에! 아버지가 재만 청년이랑 오늘 아침에 바둑 약속을 하시고는 깜빡하셨단다. 미안해서 이를 어째. 그래서 아침 식사라도 같이 하기로 했어.”

    어머니는 내가 아침 식사 자리에서 빠질까 봐 더욱 부산스럽게 굴었다.

    “그래요?”

    심드렁한 나의 대답에 어머니는 의심 어린 눈동자로 내 안색을 살폈다.

    “집에 온 손님을 빈속으로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죠.”

    이어진 내 말에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식탁 의자에 앉아서 태블릿 PC로 신문 기사를 찾아보았다.

    “그렇지! 아침 먹고, 재만 청년이랑 같이 출근하면 되겠다. 응?”

    출근까지 같이할 필요가 있나?

    거부감이 들기는 했지만, 강재만을 파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도 되고요.”

    나는 무심한 척 신문 기사를 스크롤 했다.

    하필 포털 메인 기사가 백헌전자와 관련한 호재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것들은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구나.

    오늘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라도 백헌의 대외적 전략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알아야 했다.

    기사 내용을 꼼꼼히 살피고 있는 사이, 아버지와 강재만이 다이닝 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원. 내 귀한 딸내미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

    한껏 들뜬 분위기를 풍기며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셨어요.”

    나는 짧고 간결한 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앉지, 앉아요!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아침 식사할 생각을 하니까, 내가 참 감회가 새롭구나.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은 기분이야! 이렇게 꼭 맞는 그림일 수가 없어!”

    “제가 회장님이 원하시는 그림의 퍼즐 조각이 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강재만이 낯간지러운 아부를 떨어 댔다.

    놀고 있다, 진짜!

    0